한국 금융의 자금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예금과 부동산에 머물던 시중 자금이 ISA·국민성장펀드·BDC·IMA 등을 통해 AI·반도체·바이오 같은 미래 산업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이재명 정부가 국정 계획 발표에서 '생산적 금융' 정책을 공식화한 이후 10개월, ‘생산적 금융’은 단순한 정책 실험을 넘어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전환의 신호가 되고 있다.
[커버스토리] 생산적 금융의 시대
시장에서는 단순 유동성 장세를 넘어 자본시장 활성화와 첨단 산업 육성 기대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 한국 자금이 아파트와 토지 같은 실물자산으로 향했다면,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첨단 제조업 등 성장 산업에 대한 기대가 증시로 유입되며 자본시장이 다시 자금 순환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재명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생산적 금융’이 아직 완성된 단계는 아니지만, 시장이 그 가능성에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자본시장이 자금 순환의 중심으로
실제 고액자산가들의 자산 운용 방식에서도 변화 조짐은 감지된다. 하나금융연구소의 ‘2026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에 따르면 최근 부자들의 자산 포트폴리오는 과거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부자들의 투자 선호 변화는 자산 리밸런싱 계획에서도 확인된다. 올해 포트폴리오 조정 의향이 있다고 답한 부자 가운데 “부동산 비중을 줄이고 금융자산 비중을 늘리겠다”는 응답은 18%로, “부동산 비중을 늘리고 금융자산 비중을 줄이겠다”는 응답(10%)보다 높았다. ETF 선호도 역시 전년 29%에서 48%로 상승했고, 주식 투자 선호도도 29%에서 45%로 높아졌다. 반면 예금 선호도는 40%에서 35%, 채권은 32%에서 24%로 낮아졌다. 시장에서는 금리 환경 변화와 자본시장 접근성 확대, 글로벌 투자 정보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보고서는 부동산 영향력이 완전히 약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실제 부자들의 부동산 보유율은 여전히 높았고, 프라이빗뱅커(PB)들 사이에서도 “한국에서 부 형성의 기본은 여전히 부동산”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다만 과거처럼 부동산 가격 상승만으로 자산을 확대하기보다 금융 투자와 글로벌 자산 배분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자산관리 전략이 다변화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변화로 꼽힌다.
시중 자금의 흐름을 생산적인 분야로 유도하기 위한 정부 정책도 탄력을 받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생산적 금융’을 핵심 금융 정책 기조로 내세우며 금융 시스템 전반의 체질 개선 작업을 추진 중이다. 이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부터 ‘코스피 5000 시대’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자본시장 활성화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또한 첨단 산업과 벤처 생태계 육성을 위한 대규모 국민성장펀드 조성과 혁신 기업 투자 확대 방안도 주요 경제 공약으로 제시했다. 부동산 중심으로 쏠린 시중 자금을 AI, 반도체, 바이오 등 미래 성장 산업과 자본시장으로 유도하겠다는 구상이 현 정부의 생산적 금융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생산적 금융의 방향은 분명하다. 금융을 단순한 자산 보관 수단이 아니라 국가 성장의 엔진으로 재설계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편부터 국민성장펀드, BDC, 종합투자계좌(IMA)까지 흩어져 보이는 정책들의 방향 역시 결국 하나로 모인다. 부동산과 예금에 머물던 시중 자금을 미래 산업과 혁신 기업으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10개월은 단순한 금융 상품 확대를 넘어 가계 자산의 운용 방식과 자본시장의 구조, 금융 회사의 기능 자체를 재편하려는 정책 실험에 가까웠다.
ISA, 절세 계좌에서 투자 플랫폼으로
금리 예금에 머물던 자금 일부가 ETF와 배당주, 채권형 상품 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과거 자산가 중심이던 절세 투자 전략이 직장인과 청년층으로까지 확산되는 흐름이다. 금융권에서는 ISA 개편의 핵심을 단순한 계좌 증가가 아니라 ‘투자의 대중화’에서 찾는다. 예금 중심의 수동적 자산관리에서 벗어나, 성장 산업에 장기적으로 참여하는 투자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정은영 KB 골드앤와이즈 더퍼스트 반포센터장은 “과거에는 특정 지역 부동산이나 단기 수익형 자산 문의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자산 구조 자체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상담이 크게 늘었다”며 “AI, 반도체, 글로벌 인프라처럼 구조적으로 성장 가능한 산업을 장기 자산에 어떻게 편입할지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은지 삼성증권 반포금융센터 PB팀장도 현장에서 비슷한 흐름을 체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은행 예금 자금뿐 아니라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 퇴직연금·개인연금 자금까지 점차 주식 자산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ISA 개편 이후 투자 계좌가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국내 증시가 AI·반도체 중심의 구조적 성장 국면에 진입하면서 ISA는 단순 절세 계좌를 넘어 ‘국민 성장 계좌’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초대형 기술주 랠리 속에서 개인투자자의 직접투자 참여 역시 확대되는 모습이다. 김유란 하나은행 분당PB센터 골드 PB부장은 “최근 고객 자금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방산, 로봇 등 실적 성장 가시성이 높은 산업으로 집중되고 있다”며 “불확실성이 큰 시기일수록 실제 수출 데이터와 기술력이 검증된 주도주 중심의 ‘선택과 집중’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데스밸리의 스타트업…모험자본 시대 열리나
그는 그러면서 “무조건적인 장기 투자보다 장기와 단기 전략을 구분해 분산하려는 상담이 늘고 있다”며 “ISA, 개인형퇴직연금(IRP) 같은 절세 계좌는 장기 운용 수단으로 활용하고, 일반 투자에서는 주도주 중심의 단기 전략으로 시장 변동성에 대응하려는 흐름이 뚜렷하다”고 덧붙였다.
이은지 팀장은 “단기적으로는 국내 증시 활성화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반도체와 수출 업황의 체질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장기 투자 문화 형성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며 “AI·반도체 중심 장세가 단순한 테마를 넘어 시대 변화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과거와 가장 큰 차이”라고 평가했다. 즉, 과거에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 자산 증식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기업 성장과 자본시장 성과를 통해 자산을 늘리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 벤처투자 현장에서는 초기 기업들의 자금난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벤처투자의 한 관계자는 “현재 창업 초기 기업들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며 “AI·딥테크 분야로 자금이 집중되면서 시장 내부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초기 스타트업들이 이른바 ‘데스밸리(death valley)’를 견뎌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BDC와 국민성장펀드다. 핵심은 개인 자금을 벤처·혁신 기업 투자와 연결하는 데 있다. BDC는 개인투자자들도 공모 형태를 통해 비상장 성장 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다. 기존에는 기관투자자와 일부 고액자산가 중심으로 접근 가능했던 영역을 일반 투자자에게까지 확대한 셈이다. 미국에서 BDC가 중소·벤처기업 자금 공급의 핵심 채널로 자리 잡은 만큼 국내 시장에서도 역할 확대 가능성이 주목된다.
단기 차익에서 장기 베팅으로…달라지는 자금 성격
국민성장펀드 역시 같은 맥락이다. AI, 반도체, 바이오, 우주항공 등 전략 산업에 장기 자금을 공급해 국가 성장 동력을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과거 정책금융이 단순 지원 성격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민간 자금을 함께 끌어들여 시장 중심 성장 금융 구조를 만들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자금의 성격 자체다. 단기 차익 중심의 투자 흐름에서 벗어나 기업의 미래 가치와 산업 성장성에 장기적으로 베팅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이 다시 실물경제와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한국벤처투자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의 핵심 키워드로 ‘시그널’을 꼽았다. 그는 “비상장 벤처기업 투자 시장에 지속적으로 자금이 유입된다는 신호 자체가 중요하다”며 “시장에서는 결국 자금의 지속성과 민간 참여 확대 여부를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또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비상장 투자 시장에 새로운 자금이 유입되면서 ‘뉴 마켓(new market)’이 형성되고 있다”며 “벤처 생태계에 장기 자금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자산가 시장에서도 투자 기준은 과거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정은영 센터장은 “최근 자산가들은 단순 수익률보다 세후 기준의 안정적 현금흐름을 훨씬 중요하게 본다”며 “배당형 자산과 인컴형 포트폴리오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 센터장은 그러면서 “자산 규모가 커질수록 공격적 수익률보다 자산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우선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며 “지금 같은 시장일수록 잃지 않는 투자가 더욱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생산적 금융이 던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금융 회사의 역할 재정의다. 특히 IMA 도입은 증권 업계 체질 변화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동안 국내 증권사는 위탁매매와 자산관리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하지만 IMA 도입 이후 초대형 투자은행(IB)들은 기업 자금조달과 산업 투자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업 영역 확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금융 회사가 단순한 ‘중개자’를 넘어 산업 성장의 파트너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업은 보다 다양한 자금조달 창구를 확보할 수 있고, 투자자는 성장 산업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게 된다. 특히 AI와 첨단 제조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빠르게 재편되는 상황에서 장기 자금 공급 역량은 국가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미국 투자은행들이 기술 혁신 기업 성장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것처럼, 국내에서도 초대형 IB 육성이 자본시장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실제 금융권에서는 생산적 금융 체계가 자리 잡을 경우 증권사의 수익 구조 역시 단순 브로커리지 중심에서 기업금융, 모험자본, 장기 투자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자본시장의 역할 자체가 달라지는 셈이다.
물론 과제도 적지 않다. 단기 투기 수요로 자금이 왜곡될 가능성, 고위험 투자 확대에 따른 투자자 보호 문제, 세제 형평성 논란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다. 시장 일각에서는 “제도만으로 자금 흐름을 완전히 바꾸기 어렵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특히 최근 증시 과열 양상에 대한 우려도 함께 나온다. 정 센터장은 “AI와 반도체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산업이지만 시장이 과열되면 기대감만으로 가격이 움직이는 구간이 생긴다”며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시장에서는 분산투자와 현금흐름 관리 원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코스피 7000 시대라고 해서 금융자산을 주식에 올인하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라며 “시장 조정 시 분할매수 할 수 있는 현금 비중을 반드시 남겨 둘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방향성만큼은 분명하다. 금융을 부동산 가격 상승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본시장을 통해 혁신 산업으로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흐름이다.
정부와 금융권은 앞으로 추가적인 세제 지원과 규제 완화, 금융 샌드박스 확대 등을 통해 생산적 금융 체계를 더욱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도를 높여 글로벌 투자 자금을 끌어들이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목표다.
지난 10개월이 생산적 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투자 확대와 기업 성장, 고용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지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시중 자금이 부동산과 단기 예금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혁신 산업으로 안정적으로 유입되는 흐름이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하는 분위기다. 생산적 금융 정책이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 개선과 성장 동력 확충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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