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금융은 단순히 시중에 자금을 더 공급하는 정책이 아니다. 금융이 부동산과 단기 수익 중심의 흐름에서 벗어나 기술혁신, 산업전환, 지역경제, 장기 투자로 향하도록 자금 배분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금융 개혁에 가깝다. 핵심은 금융의 양이 아니라 방향이다.

[커버스토리] 파트1: 생산적 금융의 시대
영국 런던 금융가 시티 오브 런던에 위치한 잉글랜드 은행(BoE)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연합EPA
영국 런던 금융가 시티 오브 런던에 위치한 잉글랜드 은행(BoE) 앞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연합EPA
한국 경제에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가계의 금융자산은 커졌고(2025년 말 기준 6201.9조 원), 금융 회사의 총자산(1경 3264.3조 원)도 크게 늘었다. 예금, 펀드, 보험, 연금, 부동산 금융, 단기 금융 상품을 통해 돈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 돈은 과연 한국 경제의 미래 생산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충분히 흐르고 있는가.

생산적 금융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생산적 금융은 단지 기업대출을 늘리자는 주장이 아니다. 정책금융을 더 많이 공급하자는 뜻도 아니다. 생산적 금융은 돈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꾸는 금융 시스템 개혁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부동산 담보, 단기 수익,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있는 자산에 집중되기 쉬운 금융을 기술, 산업 전환, 지역경제, 혁신 기업, 장기 투자, 에너지 전환, 공급망 재편과 같은 미래의 생산능력으로 이동시키자는 것이다.

돈은 많은데 성장 기반은 제자리…자금 배분의 역설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저성장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돈이 있음에도 그 돈이 새로운 성장 기반을 충분히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기에 금융은 담보가 확실하고 회수가 쉬운 자산으로 자연스럽게 집중됐다. 가계는 주택 구입과 자산 보전에 몰입했고, 금융 회사는 상대적으로 관리가 쉬운 담보대출과 부동산 관련 금융에 치중했다. 그 결과로 금융은 커졌지만, 미래 산업과 혁신 기업을 키우는 힘은 충분히 커지지 못했다.
분양 중인 한 모델하우스에서 방문자들이 견본주택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분양 중인 한 모델하우스에서 방문자들이 견본주택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생산적 금융은 이 구조를 바꾸자는 문제의식이다. 한국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단순히 돈을 더 많이 공급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돈이 부동산과 단기 금융 상품에 머물지 않고, 기술 혁신, 산업 전환, 지역경제, 장기 투자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돈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새로 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미래 산업과 혁신 기업은 담보가 부족하고, 수익이 늦게 발생하며, 위험을 평가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그곳으로 돈이 실제로 흘러가게 하려면 자금 공급 방식, 위험분담 구조, 사후관리 체계, 성과 평가 기준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생산적 금융의 핵심은 금융의 양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금융이 과거의 담보와 단기 수익만이 아니라 미래의 생산능력을 평가할 수 있도록, 돈의 흐름과 금융의 작동 방식을 함께 바꾸는 데 있다.

생산적 금융은 이번 정부 들어 새롭게 나온 유행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금융이 생산을 돕는가, 아니면 자산 가격 상승과 투기를 키우는가를 둘러싼 경제학과 금융론의 오랜 논쟁 위에 서 있다. 금융은 어떤 조건에서 혁신과 산업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가. 생산적 금융은 이 오래된 문제의식을 한국 경제의 저성장, 부동산 금융 쏠림, 산업 전환 지연이라는 현실 속에서 정책 과제로 구체화한 개념이다.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슘페터·케인스가 말한 '좋은 금융'의 조건

첫 번째 배경은 조지프 슘페터의 혁신 이론이다. 슘페터에게 금융은 단순히 남는 돈을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었다. 은행은 신용을 창출해 기업가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혁신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미래에 먼저 자원을 투입하는 일이기 때문에, 과거 실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산적 금융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금융은 이미 담보가 충분한 곳에 돈을 빌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직 완전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의 생산능력을 키울 수 있는 영역으로 자금을 연결해야 한다. 생산적 금융은 바로 그런 금융의 역할을 오늘의 산업 전환, 기술 혁신, 성장 기업 지원의 맥락에서 되살리려는 개념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조지 슘페터. 슘페터는 금융은 단순히 남는 돈을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신용을 창출해 기업가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사진=한국경제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조지 슘페터. 슘페터는 금융은 단순히 남는 돈을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신용을 창출해 기업가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사진=한국경제
두 번째 배경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투자 이론이다. 케인스는 투자가 단순히 저축에 의해 자동으로 결정된다고 보지 않았다. 투자는 기대, 금리, 유동성 선호, 금융 시장의 분위기, 불확실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금융 시장이 장기 투자를 뒷받침하면 생산능력 확충에 기여하지만, 단기 가격 변동과 유동성 추구가 지배하면 금융은 산업적 투자보다 자산 거래를 부추길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산적 금융은 금융 시장이 단기 유동성의 장이 아니라 장기 투자와 산업 전환을 뒷받침하는 제도로 작동하도록 바꾸자는 주장이다.

세 번째 배경은 현대 금융안정론이다. 과거 금융 안정은 주로 개별 금융 회사가 부실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문제로 이해됐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 안정의 의미는 더 넓어졌다. 금융 회사가 당장 부실하지 않더라도, 금융 시스템 전체가 특정 자산에 과도하게 쏠리면 경제 전체의 취약성은 커질 수 있다. 부동산 가격 상승, 담보 가치 확대, 추가 대출, 다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위험을 키울 수 있다.

이 때문에 생산적 금융은 단순한 성장 정책에 머물지 않는다. 금융이 부동산과 담보 가치 상승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상승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가격이 꺾이는 순간 가계와 금융 회사, 실물경제가 동시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금융 안정은 은행이 당장 부실하지 않은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돈이 특정 자산에 과도하게 몰리지 않고, 생산과 투자, 고용과 소득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유지하는 것도 넓은 의미의 금융 안정이다. 생산적 금융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성장 기반을 넓히는 일과 금융의 쏠림을 줄이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가 아니라, 같은 방향의 변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담보가 더 쉽다…‘합리적 선택’이 부른 왜곡

한국 금융이 부동산에 집중된 것은 금융 회사들이 보수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금융 회사의 선택은 제도와 평가 기준의 결과이기도 하다. 부동산담보대출은 담보가 명확하고, 회수 가능성이 비교적 높고, 내부 심사와 사후관리가 표준화돼 있다. 반면 기술 기업, 혁신 기업, 지역 프로젝트, 에너지 전환 사업은 평가가 어렵고, 현금흐름이 늦게 발생하며, 위험의 성격도 복합적이다. 이 때문에 금융 회사 입장에서는 부동산 금융이 더 익숙하고 더 설명하기 쉬운 선택이 된다.

문제는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 경제 전체의 자금 배분이 왜곡된다는 점이다. 개별 금융 회사 차원에서는 합리적 선택일 수 있지만, 모든 금융 회사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새로운 산업과 기업에 자금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도 담보가 부족하면 금융 접근성이 낮아진다. 지역의 산업 전환 프로젝트도 초기 위험을 누가 부담할지 정해지지 않으면 실행되기 어렵다. 장기 인내자본이 필요한 첨단 산업도 단기 성과 평가 체계에서는 충분한 자금을 받기 어렵게 된다.
서울 시내 한 은행 종합상담창구에서 시민들이 대출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서울 시내 한 은행 종합상담창구에서 시민들이 대출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이것이 생산적 금융이 필요한 현실적 이유다. 생산적 금융은 금융 회사에 “좋은 뜻으로 더 위험한 곳에 돈을 공급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금융 회사의 합리적 선택이 산업금융, 혁신금융, 지역금융, 전환금융일 수 있도록 제도와 규칙을 바꾸자는 것이다. 보증, 후순위 금융, 정책금융, 민간자금, 자본시장, 사후관리 체계가 결합돼야 한다. 그래야 금융 회사 입장에서 미래 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이 사회공헌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금융 활동이 된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민성장펀드도 이런 문제의식 위에 있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9월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향후 5년간 150조 원 이상의 자금을 첨단전략산업과 관련 생태계에 제공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 펀드는 첨단 산업 경쟁력 강화, 벤처·기술 기업의 스케일업, 지역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한다. 2025년 12월 출범 방안에서는 150조 원을 정부보증채권 75조 원과 민간자금 75조 원으로 구성하고, 직접투자, 간접투자, 인프라 투·융자, 초저리 대출 등으로 나누어 지원하는 구조가 제시됐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자금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산업 현장에 연결되는가다. 정책자금이 단순히 기존 투자를 대체하거나, 이미 가능한 거래에 이름만 붙이는 방식이라면 생산적 금융이라고 보기 어렵다. 생산적 금융이 되려면 이러한 정책과 금융이 없었다면 실행되지 않았을 투자, 더 늦어졌을 투자, 더 작은 규모에 머물렀을 투자를 실제로 가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생산적 금융에서 말하는 추가성이다.

CHIPS·IRA·이토 리포트…선진국의 생산적 금융 실험

생산적 금융은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미국, 영국, 유럽, 일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금융의 방향을 바꾸려 하고 있다. 공통점은 하나다. 미래 산업과 장기 전환에 필요한 자금은 시장에만 맡겨 두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정부는 단순히 보조금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을 나누고, 민간자금을 끌어들이고, 장기 투자가 가능한 제도를 만들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청정에너지, 전기차, 핵심 공급망 분야에 대규모 재정 지원과 세액공제, 대출·보증을 결합했다.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과학법에 근거한 ‘CHIPS for America’ 프로그램을 통해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를 집행하고 있다. 2025년 1월 기준 330억 달러가 넘는 인센티브가 배정됐고, 이와 연계해 반도체와 전자 산업 기업들의 민간투자 발표도 크게 확대됐다. 12만5000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 2024년 4월 뉴욕주 시러큐스를 방문한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론 CEO로부터 기념패를 받고 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반도체과학법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고 역설했다. 사진=연합AFP
지난 2024년 4월 뉴욕주 시러큐스를 방문한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론 CEO로부터 기념패를 받고 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반도체과학법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고 역설했다. 사진=연합AFP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국의 정책이 단순히 보조금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공자금은 민간투자를 유도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기업은 투자를 약속하고, 정부는 보조금과 세액공제, 대출, 보증을 통해 프로젝트의 금융 가능성을 높인다. 다시 말해 정부는 미래 산업을 “정책적으로 중요한 산업”이라고 선언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산업의 프로젝트가 실제로 금융 시장에서 자금조달이 가능한 구조가 되도록 돕고 있다.

영국의 ‘인내자본 평가보고서(Patient Capital Review)’는 생산적 금융을 장기 모험자본의 관점에서 보여주는 사례다. 2017년 영국 재무부가 주도한 이 검토는 혁신 기업이 스케일업 단계에서 필요한 장기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영국 기업은행(British Business Bank)은 영국 인내자본 평가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연간 약 40억 파운드 규모의 자금 공백으로 정리했고, 특히 500만 파운드 이상의 지분투자가 필요한 성장 기업에서 장기 자금 부족이 두드러졌다고 설명했다.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성장 단계가 더 어렵다…장기 자본의 공백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혁신 기업에는 창업 초기 자금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더 어려운 단계는 기술을 검증한 뒤 생산설비를 늘리고,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 인재를 확보하며, 연구개발(R&D)을 계속하면서 규모를 키우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 수익률을 중시하는 금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산적 금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창업 초기 지원을 넘어, 성장 단계의 기업에 장기 자본을 공급하고 그 위험을 정책금융, 연기금, 민간 펀드, 자본시장이 나누어 맡는 구조가 필요하다.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금융도 금융의 방향을 바꾸려는 제도적 시도다. EU 택소노미(taxonomy)는 어떤 경제활동이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지 분류하고, 금융기관이 보유한 자산 가운데 어느 정도가 택소노미에 부합하는지 공개하도록 했다. 유럽은행감독청은 은행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자료를 바탕으로 기후위험 관련 지표를 발표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대형 은행들은 2024년부터 ‘green asset ratio’, 즉 녹색자산비율을 공시해야 한다.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일본의 ‘이토 리포트’는 생산적 금융을 자본시장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다. 생산적 금융은 은행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업이 조달한 자본을 어디에 쓰고, 투자자가 그 기업의 장기 가치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도 돈의 흐름을 결정한다.

2014년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이토 리포트는 바로 이 지점을 다루었다. 이 보고서는 기업이 자본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투자자와의 대화를 통해 지속적인 기업 가치 제고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주가 부양책이 아니라, 자본시장이 기업의 투자와 혁신,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동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한국의 생산적 금융 논의도 이와 맞닿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 단기 가격 변동을 좇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투자, 성장, 혁신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공급액보다 구조가 중요…생산적 금융 5대 조건

한국에서 생산적 금융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생산적 금융은 공급액 경쟁이 돼서는 안 된다. 금융 회사들이 몇 조 원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짜 평가는 공급 규모가 아니라 자금의 성격과 효과다. 이미 가능했던 대출에 생산적 금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정책과 금융의 개입으로 새로운 투자가 가능해졌는지, 민간자금이 함께 들어왔는지, 기업의 성장 단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지, 지역 프로젝트가 실제로 실행됐는지를 보아야 한다.
지난 1월 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지난 1월 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둘째, 추가성을 평가해야 한다. 추가성이란 단순히 돈을 더 공급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금융 지원이 없었다면 해당 투자가 실행되지 않았거나, 더 늦게 실행됐거나, 더 작은 규모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묻는 기준이다. 예컨대 담보와 신용도가 충분해 어떤 은행에서도 쉽게 대출받을 수 있었던 기업에 낮은 금리의 정책자금이 들어갔다면 추가성은 낮다. 반대로 기술력은 있지만 담보가 부족한 기업, 지역의 전략 산업 프로젝트, 장기 설비투자가 필요한 첨단 기업에 대해 보증, 후순위 투자, 장기 대출, 지분투자가 결합돼 투자가 가능해졌다면 추가성은 높다.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셋째, 위험분담 구조가 분명해야 한다. 생산적 금융은 위험을 없애는 금융이 아니다. 미래 산업과 혁신 기업에는 당연히 불확실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위험을 누가, 어느 정도, 어떤 조건으로 부담할 것인지 정하는 일이다. 정부나 정책금융기관은 초기 위험을 일부 흡수하고, 보증기관은 손실을 나누며, 은행은 일정 부분 위험을 보유하고, 자본시장은 성장 단계에서 후속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 보험사와 연기금은 장기 자금 공급자로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야 민간자금이 들어온다.

넷째, 자본시장과 회수시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은행 대출만으로 생산적 금융을 완성할 수는 없다. 혁신 기업은 성장 단계에 따라 다른 자금이 필요하다. 초기에는 벤처투자와 기술금융이 필요하고, 성장 단계에서는 메자닌, 사모펀드, 성장자본이 필요하며, 더 큰 단계에서는 상장, 회사채, 인수합병(M&A), 세컨더리 시장이 필요하다. 생산적 금융은 이 전체 성장 사다리를 설계하는 일이다. 돈을 처음 공급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의 자금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다섯째, 금융 회사의 평가 기준을 바꿔야 한다. 생산적 금융은 금융 회사에 손해를 감수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단기 수익률, 담보 중심 심사, 부동산 대출 중심의 안정성 평가만으로는 생산적 금융이 작동하기 어렵다. 금융 회사 내부의 핵심성과지표(KPI), 위험조정수익률, 자본비용, 산업별 한도, 사후관리 성과, 민간자금 유치 실적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감독 당국도 단순히 부실률만 볼 것이 아니라 금융 회사가 어떤 분야에 자금을 배분하고 있는지, 그 배분이 경제 전체의 성장 기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아야 한다.

최근 지방 우대금융 논의도 이런 관점에서 중요하다. 금융위원회는 지방 우대금융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정책금융의 지방공급액 비중을 2025년 약 40%에서 2028년까지 45%로 높이고, 2028년에는 지방에 대한 연간 자금공급액이 현재보다 25조 원 증가한 120조 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민성장펀드도 총조성액의 40% 수준을 지방에 투자할 계획으로 제시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이 수도권의 첨단 기업 투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역의 산업 기반, 인프라, 일자리와 연결돼야 함을 보여준다.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테마보다 구조…생산적 금융 시대의 투자법

생산적 금융은 정책 용어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투자 환경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부동산, 예금, 단기 금융 상품, 대형 우량주 중심의 자산 배분이 익숙했다. 그러나 생산적 금융의 시대에는 첨단 산업, 에너지 전환, 지역 인프라, 벤처·성장 기업, 장기 인내자본, 정책연계형 펀드가 점점 더 중요한 투자 대상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산적 금융 관련 상품이 안전하거나 유망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생산적 금융은 위험이 없는 금융이 아니라 위험을 더 정교하게 나누고 관리하는 금융이다. 투자자는 어떤 산업이 성장할지뿐 아니라, 해당 투자 상품이 어떤 위험분담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정부나 정책금융의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민간 운용사의 책임은 무엇인지, 회수 경로는 분명한지, 장기 투자에 맞는 구조인지 살펴야 한다.
미국·유럽도 ‘담보에서 미래로’…금융의 역할이 바뀐다
앞으로 중요한 질문은 “어떤 테마가 뜨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지속 가능한가”다. 생산적 금융이 이름뿐인 정책 테마에 그치지 않으려면 자금 공급, 위험분담, 사후관리, 회수시장, 성과 평가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투자자도 이 기준으로 상품과 시장을 보아야 한다. 정책이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정책과 민간자본, 산업 전략, 금융 구조가 잘 결합된 상품은 새로운 장기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

돈의 양보다 방향…미래 성장의 조건

생산적 금융의 본질은 돈이 과거의 담보만 보지 않고 미래의 생산능력을 평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에 의존하는 경제에서 벗어나 산업, 기술, 기업, 지역, 전환 프로젝트가 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금융의 판단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적 금융은 정부의 일회성 정책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한국 경제의 자금 배분 방식을 바꾸는 장기 개혁이어야 한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관계자가 원화 5만원권 지폐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관계자가 원화 5만원권 지폐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성공의 기준도 분명해야 한다. 생산적 금융이 성공했다는 것은 단순히 몇 조 원을 공급했다는 뜻이 아니다. 혁신 기업이 성장 단계별로 필요한 자금을 받을 수 있게 됐는가. 지역 산업 프로젝트가 실제로 실행됐는가. 민간자금이 정책금융과 함께 들어왔는가. 부동산에 집중되던 금융 회사의 자산 배분이 조금씩 달라졌는가. 투자자들이 단기 가격 상승보다 장기 가치 창출을 평가하기 시작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경제에는 많은 돈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성장은 돈의 양보다 돈의 방향에 달려 있다. 생산적 금융은 그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이다. 금융이 과거의 담보를 확인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미래의 산업과 기업을 평가하기 시작할 때, 한국 경제는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생산적 금융의 시대란 결국 돈이 부동산과 단기 수익의 익숙한 길을 넘어 생산과 혁신, 지역과 전환, 장기 성장의 길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대다.

김용기 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회장·전 아주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