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호황으로 한국 경제는 사상 최고 수준의 명목성장을 기록하고 있지만, 늘어난 소득이 기업 이익과 세수에 집중되면서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번 사이클의 성패는 반도체 호황이 일시적 호황에 그칠지, 생산성과 미래 산업 투자로 이어져 구조적 성장의 발판이 될지에 달려 있다.
[마켓 리더의 시각]
가격이 오른 건 반도체이고, 그 비싼 값을 치르는 건 한국 가계가 아니라 인공지능(AI) 서버를 짓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해외 빅테크다. 여기에 더해 아마존, 메타 등 글로벌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이어지면서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구매 단가 자체가 구조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외국 구매자가 웃돈을 얹어 지불한 만큼 한국의 소득이 늘어난 것이다. 다시 말해 국내 물가 상승이 아니라 교역 조건 개선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득이 증가한 구조다.
반도체·컴퓨터 부품이 전체 수출의 47%까지 차지하면서, 소비가 먼저 살고 투자가 뒤따르는 보통의 경기 회복이 아니라 AI 인프라 붐이 기업 이익과 세수를 먼저 끌어올리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실물 경기보다 명목소득이 먼저 확대되는 이례적인 회복 경로다.
핵심 질문은 이 돈벼락 같은 소득이 경제 전반에 퍼지느냐, 일부에만 머무르느냐다. 반도체는 자본집약적 산업이라 가격이 오르면 직원 월급보다 회사 이익이 먼저 늘어난다. 실제로 가격 상승기에는 인건비보다 영업이익 증가 속도가 훨씬 빠르게 나타난다.
종합반도체 기업 영업이익률은 2025년 21.1%에서 올해 1분기 50.9%로 뛰었다. 이는 가격 상승분이 비용 증가보다 훨씬 크게 반영되면서 기업 이익으로 집중된 결과다. 이 이익은 가장 먼저 법인세로 빠져나간다. 기업 이익 증가→세수 증가로 바로 연결되는 구조다.
올해 반도체 기업 합산 영업이익이 600조 원을 넘어서면서 법인세 중간 예납 만으로 40조 원 넘는 세수가 들어올 전망인데, 이는 2025년 전체 법인세수(84.6조 원)의 절반에 달한다. 이처럼 특정 산업에서 발생한 소득이 단기간 내 재정으로 크게 유입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세후 자금 중 설비투자·연구개발(R&D)로 가는 부분이 오늘의 명목소득을 내일의 실질적 성장으로 바꿔주는 통로다. 투자로 이어지는 비율이 높아질수록 성장의 지속성이 커진다. 결국 이 돈이 실물경제에 직접 영향을 주는 길은 인건비, 법인세, 설비투자 세 가지뿐이고, 주주 환원이나 사내 적립은 체감 효과가 제한적이다.
호황을 살린 나라·낭비한 나라
2000년대 호주는 중국 산업화로 원자재값이 오르면서 지금 한국과 똑같은 경로를 겪었다. 당시에도 수출 물량보다 가격 상승이 먼저 국민소득 증가로 이어졌다. 다행히 호주는 그 돈이 광산 투자, 일자리, 세수 확대로 이어졌다. 가격 상승으로 발생한 소득이 실제 투자 사이클로 연결된 것이다.
한국도 고대역폭메모리(HBM) 가격 상승이 삼성전자의 5년간 450조 원 국내 투자, SK하이닉스 설비투자 확대로 이어지는 비슷한 조짐을 보인다. 즉, 명목소득이 실제 설비투자로 이전되는 초기 단계가 형성되고 있다.
다만 호주는 자원 붐으로 다른 산업의 경쟁력이 약해지는 부작용도 겪었는데, 환율 상승과 자원 산업 집중으로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는 문제가 동시에 발생했다. 한국 역시 반도체가 수출의 47%를 차지하는 동안 비반도체 수출과 내수 서비스업은 부진하다. 산업 간 격차가 확대되는 모습이다.
대만은 TSMC 파운드리 호황으로 수출·이익·투자·증시가 동반 상승했지만, 그 과실이 서비스업이나 저숙련 노동 시장까지 퍼지진 않았다. 반도체 산업 비중이 커질수록 고용 확산 효과가 제한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한국이 반도체 호황 속에서도 'K자형'으로 갈리는 이유다. 실제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국내 직원은 16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0.6%에 불과해, 낙수효과를 기대하기엔 일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 반도체는 고용 유발보다는 자본 투입 중심의 산업이라는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기업 이익이 늘면서 정부도 예상보다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됐다. 올해 법인세수 목표(86.5조 원)를 넘어 30조~40조 원의 초과 세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반도체 중심의 이익 증가가 재정으로 빠르게 전이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복지·보조금으로 쓰면 체감 경기는 좋아지지만, 호황이 꺾인 뒤 지출을 줄이기 어려워 재정 여력이 빠르게 소진될 위험이 있다. 일시적 세수 증가를 상시 지출로 전환할 경우 재정 운용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2021~2022년 반도체 호황기에 세수가 명목 성장률의 3배로 늘었다가 2023~2024년 급감한 전례가 있다.
노르웨이는 석유 초과소득을 국부펀드로 해외에 장기 투자하지만, 한국의 반도체 호황은 변동성이 크고 잠재성장률도 1%대 후반까지 낮아진 상태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 특히 메모리 산업은 가격 사이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핵심 질문은 "해외냐 국내냐"가 아니라 "국내에 투자한다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방향인가, 현세대 소비로 소진되는 방향인가"다. AI·시스템 반도체, 로봇, 바이오, 우주·방산, 에너지 전환처럼 새로운 성장 축에 투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이유다.
명목 숫자 뒤의 진짜 투자 지도
주식 시장은 명목 숫자에 민감해, 반도체 대형주 주도로 코스피가 180% 넘게 올랐다. 매출과 이익이 명목 기준으로 증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수·전통 제조업은 같은 수혜를 받기 어려워 업종 차별화가 중요하다. 동일한 지수 상승 안에서도 이익 구조는 크게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원화는 경상수지 흑자 확대(올해 3000억 달러 전망)에도 지정학적 위험 때문에 약세를 보였지만, 긴장이 완화되고 신성장 투자가 늘면 1400원 선으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대외 변수와 내부 투자 사이클이 동시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다.
결국 중요한 건 반도체 가격이 얼마나 올랐느냐가 아니라, 그 상승분이 한국 경제의 생산성과 재정, 기업 투자, 가계소득으로 얼마나 바뀌어 돌아오느냐다. 명목 성장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그 소득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번 사이클은 단순한 경기 회복이 아니라, 특정 산업에서 발생한 소득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국면이다. 그 경로가 투자와 생산성으로 이어지면 구조적 성장으로,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 호황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투자전략부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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