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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움의 기술’, 교묘한 이재명 vs 투박한 윤석열

    [홍영식의 정치판]내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후보들 간의 경쟁은 그야말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다. ‘대장동 게이트’를 두고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 이재명 전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 간 이어진 ‘전투’는 ‘명낙대전’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고발 사주’, 처와 처가 의혹과 관련해 여당뿐만 아니라 같은 당 후보들에게도 맹공격받고 있다. 대선판은 ‘싸움의 기술’들만 난무하면서 포연으로 가득하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정책과 비전 경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가 내 삶을 더 좋게 만들어 줄까’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접는 게 낫다는 자조들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주요 대선 주자들에 대한 민심의 평가는 냉혹하다.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훨씬 높다. 과거 대선에서도 비호감도가 높은 후보들이 많았지만, 이번처럼 주요 후보 모두 비호감도가 훨씬 높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요 대선 주자, 비호감도가 호감도의 2배 달해한국갤럽이 지난 10월 19∼21일 전국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한 결과 이 전 지사에 대한 호감도는 32%인 반면 비호감도는 60%에 달했다. 윤 전 총장은 호감도 28%, 비호감도 62%,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호감도 31%, 비호감도 59%를 각각 나타냈다. 다른 여론 조사에서도 비호감도가 호감도보다 훨씬 높았다. ‘싸움의 기술’은 대장동 게이트와 고발 사주 문제로 엮인 이 전 지사와 윤 전 총장이 두드러진다. 두 사람의 ‘싸움의 기술’은 대선 등판 전 이

    2021.11.01 06:01:39

    ‘싸움의 기술’, 교묘한 이재명 vs 투박한 윤석열
  • ‘대장동 쇼크’ 주택 공급 정책 어디로 갈까

    [스페셜 리포트] 대장동 개발 특혜 시비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인허가 절차상 비리 의혹도 불거지고 있고 여야 모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상대 탓만 하고 있다. 정확한 사실 관계는 추후 사법 당국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대장동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해 살펴본다.대장동 사태의 원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있다.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기존의 사람이 뼈를 깎는 반성을 하든,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든 사상누각에 불과하다.예를 들어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기면 그 고양이가 하얀색이든 검정색이든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고양이 자체를 생선가게와 격리해야 하지만 지금 정치권에서는 하얀색 고양이가 잘했는지, 검정색 고양이가 잘했는지와 같은 소모적인 논쟁만 일삼고 있는 것이라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가슴은 고구마를 먹은 듯 갑갑하기만 하다.  대장동 사태로 드러난 택지 개발의 문제점그러면 대장동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대장동뿐만 아니라 한국 택지 개발 방식의 문제점은 무엇일까.대장동 사태가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 사업과 관련해 특혜 의혹을 받는 자산관리회사 ‘화천대유’의 막대한 이익 규모에 있다.출자금 5000만원짜리 작은 회사에서 577억원의 배당금 이익을 거뒀고 화천대유과 관련된 천화동인 1∼7호는 3463억원의 배당금을 가져가면서 특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몇 천억원대의 분양 수입도 추가로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사

    2021.10.23 06:02:03

    ‘대장동 쇼크’ 주택 공급 정책 어디로 갈까
  • 경선 관문 넘은 이재명, 더 높은 성벽과 마주하다

    [홍영식의 정치판]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이 처음 실시된 것은 1971년이다. 당시 신민당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영삼·김대중·이철승 후보가 경선을 치렀다. 경선 본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최종 승리했고 김영삼 후보는 승복했다. 이후 경선 불복 논란이 인 것은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서다. 당시 민주자유당(민자당) 내 민정계 실세로 꼽힌 이종찬 후보는 김영삼 후보에게 밀리자 중도 하차한 뒤 탈당했다. 이 후보는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정주영 국민당 후보를 돕는다. 이후 동교동계와 함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경선 불복의 아이콘은 이인제 전 의원이다. 그는 1997년 15대 대선 때 경기지사직을 내던지고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경선에 참여했다. 이회창 후보와 결선에서 맞붙었지만 패배한 뒤 탈당해 국민신당을 만들었다.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 이인제 후보 3자가 맞서는 구도였다. 이인제 후보의 출마로 영남표가 분산되면서 40.3%를 득표한 김 후보가 당선됐다.이인제 전 의원은 5년 뒤 2002년 대선 때도 경선 불복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국민신당에서 민주당으로 옮긴 그는 경선 초반엔 대세론에 힘입어 압승이 점쳐졌다. 하지만 ‘노풍(盧風 : 노무현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는 대선을 목전에 둔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하고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민련에 입당했고 이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했다.  3년 뒤 정치권은 ‘정당이 당내 경선(여론 조사 경선 포함)을 실시하는 경우 후보자로 선출되지 아니한 자는 (해당 선거의 본선)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다’는 내용을

    2021.10.18 06:01:00

    경선 관문 넘은 이재명, 더 높은 성벽과 마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