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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찬 디올, “우아한 상류층 여성 위해 디자인하는 게 즐겁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 ②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초,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서서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수년 동안 물자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던 그들은 독일 히틀러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차츰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파리뿐만 아니라 영국 런던, 미국 뉴욕은 실루엣의 변화를 원했고 패션도 이런 흐름을 쫓아가길 바랐다. 전쟁 이후 여성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이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를 모아 정체성과 명칭을 가진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역할에 정확하게 부응한 사람이 크리스찬 디올이었다. 전쟁 동안 사람들이 입었던 딱딱한 실루엣과 짧은 스커트는 쇠퇴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인 만큼 사람들이 옷으로 치장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디올은 길고 풍성한 스커트, 크리놀린(허리가 잘록하게 꼭 끼고 스커트 단이 넓게 퍼진 복식 양식), 그의 어린 시절 유행했던 페티코트(여성용 속치마)가 있는 것,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벌어진 스커트를 좋아했다. 스커트가 풍성하다는 것은 직물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타일 회사의 사장인 마르셀 부사크에게는 디올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디올은 부사크에게 투자 받은 뒤 자크 로에를 경영 책임자로 합류시켰다. 전쟁 뒤 절약 풍토 속 풍성한 스타일 거부감1946년 10월 시작된 디올 하우스는 3개의 작업실, 85명의 스태프와 세 명의 재단사로 구성됐다. 디올은 디자인 감독을 맡고 로에는 재정 문제를 담당했다. 이런 역할 분담은 당시 파리의 쿠튀

    2022.04.24 18:00:01

    크리스찬 디올, “우아한 상류층 여성 위해 디자인하는 게 즐겁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로퍼, 모조품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미국 중상류층에 ‘신분 상승’ 브랜드로 유명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④구찌가 로퍼 신발 제작을 시작한 것은 가족 중 제화업계 종사자가 있는 공장 직원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이 로퍼는 1950년대 초반에는 이탈리아에서 14달러 정도에 팔렸다. 미국 뉴욕에선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선 칼날처럼 뾰족한 스틸레토 굽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를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련된 여성들이 가격대가 적당하고 굽이 낮은 모카신의 멋과 편안함에 눈뜨게 되면서다. ‘모델 360’으로 불렸던 구찌 최초의 여성용 로퍼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가죽을 바탕으로 홀스빗 장식이 추가됐다. 그중 솔기를 두드러지게 바느질한 윗부분은 코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다시 넓어지는 형태를 보였다. 1968년 첫 모델에서 다소 수정된 ‘모델 350’이 탄생했다. 이 구두가 인기를 얻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조품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소위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장용에 더 적당한 모델 350은 얇은 금색 사슬이 들어간 스택 힐(가죽 원피를 쌓아 올려 굽 모양으로 다듬은 것)과 발등 부분에 금색 장식이 된 것이 특징이었다. 송아지가죽·도마뱀가죽·타조가죽·악어가죽·돼지가죽·뒤집은 송아지 가죽·에나멜 처리된 가죽 등 7가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구두는 독특한 분홍 베이지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매장에 나왔다. 패션 평론가 히비 도시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구찌가 새로 출시한 모카신 로퍼를 구입하기 위해서라도 로마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라고 쓸 정도로 유행했다. 1969년까지 미국 내 10개 매장에서 ‘모델 350’ 구찌 로퍼 신발은 약 8만40

    2021.08.05 06:00:08

    로퍼, 모조품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미국 중상류층에 ‘신분 상승’ 브랜드로 유명
  • 창립자 구치오, 아들들 간 싸움 붙여…구찌 왕조 쓰라린 가족 분쟁 단초 제공[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③구찌의 창업자인 구치오 구치의 첫째 아들 알도는 미국 뉴욕에 구찌 매장을 열기로 결심했다. 미국인들이 이탈리아 패션에 관심이 높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구찌의 최대 고객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인들은 구찌의 수제 가죽 가방과 신발 액세서리 스타일을 특히 좋아했다.알도는 아버지 구치오에게 뉴욕 매장을 열자고 재촉했다. 구치오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은행에서 대출해 돈을 대줬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뉴욕에 가려면 로마, 파리, 보스턴을 거쳐 가야 해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알도는 뉴욕에서 프랭크 듀건 변호사를 만나 초기 자본금 6000달러를 들여 미국 최초의 구찌 법인 구찌숍스 주식회사를 세웠다.미국 법인은 구찌 상표를 이탈리아 바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됐다. 그 후 설립된 구찌의 해외영업 법인은 모두 프랜차이즈였다. 알도는 피렌체에 있는 아버지 구치오에게 새로 만든 미국법인의 명예 대표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에 매장을 내는 것 자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는 격분했다. “이 정신 나간 것들, 당장 집으로 돌아와”라고 답신을 보냈다. 그는 아들들이 어리석고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다며 질타했다.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며 무모한 계획을 계속 추진하면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알도는 아버지의 걱정과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오히려 연로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뉴욕으로 모셔와 매장을 보여줬다. 매장을 둘러본 구치오는 오히려 기뻐했다. 흥분해 그곳이 마치 자신의 계획

    2021.07.18 06:18:02

    창립자 구치오, 아들들 간 싸움 붙여…구찌 왕조 쓰라린 가족 분쟁 단초 제공[명품 이야기]
  • 구찌의 성공 비결 ... 영국 귀족문화 접한 뒤 가죽 제품으로 성공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구찌①구찌의 창립자 구치오 구치는 1881년 밀짚모자 생산을 가업으로 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밀짚모자는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897년 영국으로 가는 모험을 단행했다. 그가 선택한 첫 직장은 런던 사보이 호텔의 벨보이였다.그의 비전은 원대했다. 사보이 호텔에서 일하면서 익힌 영국 귀족과 상류층의 격조 높은 취향과 문화를 고국인 이탈리아 고유의 기술에 접목해 명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02년 피렌체 고향에 돌아와 가죽 제조 업체인 프란지에서 가죽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그는 1921년 마흔 살이 되던 해 마침내 피렌체의 비냐 누오바 거리에 구찌라는 상호로 가죽 피혁 제품을 전문으로 하는 첫 매장을 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교통이 발달해 여행과 휴양 문화가 유행했다. 이에 발맞춰 구찌는 여행용 가방 생산을 전문 주력 사업으로 삼아 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자 핸드백·트렁크·장갑·신발·벨트 등의 컬렉션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여행용 가방에서 핸드백·장갑·신발·벨트로 영역 확대구찌 제품들은 특히 승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40~1950년대 구찌가 선보인 홀스빗 장식(사진 ①)은 승마 시 말에게 물리는 재갈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홀스빗 장식과 함께 등자(발 안장) 장식, 전통 안장 끈에서 착안한 그린-레드-그린 웹(Web·사진 ②) 줄무늬 등은 구찌 고유 브랜드의 상징이 됐다. 웹은 구치오 구치가 말의 안장을 고정하는 데 사용하는 끈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 만들어졌다.

    2021.06.25 06:24:01

    구찌의 성공 비결 ... 영국 귀족문화 접한 뒤 가죽 제품으로 성공 [명품 이야기]
  • 48가지 색상 실크 스카프 대성공…80년 넘게 이어져[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에르메스②3대 에밀 에르메스는 과거에 애착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에 대한 열정도 강했다. 따라서 그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장인들을 영입했고 1925년 처음으로 남성용 의류와 골프 재킷을 만들었다. 에르메스는 1927년 주얼리를 선보였고 이듬해 시계와 샌들을 출시했다. 그에게는 딸 4명이 있었고 사위들에게 사업을 물려줬다.이들 중 로베르 뒤마(사진)가 에밀 에르메스의 뒤를 이어 4대 에르메스 가업을 이어 받았다. 활동적인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던 에르메스는 군인들이 지령이나 지도를 프린트해 사용하는 제품을 1920년대부터 여성복 라인에 선보였다. 1937년 로베르 뒤마는 마들린~바스티유 간 파리 버스 노선 개통을 기념해 파리 버스와 노선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가로세로 90cm 정사각형의 ‘주 데 옴니버스 에 담 블랑쉬(사진)’라고 불리는 실크 스카프를 최초로 만들었다.뒤마는 당시 유명했던 실크 기술공들이 많은 리옹 지역에서 여성들을 위한 90cm 정사각형의 실크 스카프를 만들었다. 정사각형을 프랑스어로 까레(carre)라고 하며 에르메스 스카프는 정사각형을 기반으로 제작돼 80년 넘게 이어져 에르메스 까레라고 불린다. 기본 스타일의 스카프는 90×90cm, 가브로쉬는 50×50cm, 숄은 140×140cm로 만들어졌고 까레 출시 70주년을 맞아 70×70cm 크기도 출시됐다. 에르메스 스카프는 1년에 두 번의 새로운 디자인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에르메스 스카프는 일반 스카프보다 두께감이 두터운 특징이 있다. 최초의 목각판 인쇄 방식에서 1947년부터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변경해 사용하고 있다.마차·경마·달 탐험 등 그 시대상

    2021.06.01 15:18:15

    48가지 색상 실크 스카프 대성공…80년 넘게 이어져[명품 이야기]
  • [명품 이야기]샤넬, 바느질하며 꿈꿨던 가수의 길 접고 패션의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샤넬②코코 샤넬은 1905년 스물두 살 때 좀 더 큰 도시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물랭을 떠나 약 50km 떨어진 비시로 갔다. 물랭은 군사 도시였고 비시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휴양 도시였다. 예술가들의 도시이자 휴양 도시에서 샤넬은 외국어를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작은 방을 얻어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교습비를 내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바느질을 했다.잠을 아끼고 이를 악물고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선생님에게서 받은 평가는 절망적이었다. 선생님은 “새처럼 목소리가 가는 데다 표정이란 게 전혀 없다”며 “게다가 너무 말라 뼈밖에 보이지 않아 차라리 바느질이나 하는 편이 낫겠다”고 혹평했다. 샤넬에게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가수의 꿈을 접었다.샤넬은 비시의 온천 휴양지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하얀 복장을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온천에서 나는 약수를 길어 유리잔에 부은 뒤 휴양객들에게 건네는 일을 했다.그는 그 무렵 그의 인생에서 첫 연인 에티엔 발장과 사귀고 있었다. 샤넬은 발장과 경마장에 자주 들렀고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 있다니…”라며 감탄했다. 발장은 그런 샤넬의 요구를 채워 줄 재력이 됐다. 그는 샤넬에게 콩피에뉴에 말 사육장을 갖고 있다며 원한다면 그곳에 함께 가자고 샤넬에게 제안했다. 샤넬은 발장을 따라 프랑스 북부 도시 콩피에뉴로 갔다.도빌 샤넬 매장 앞에서 샤넬(가운데 서 있는 여성)과 연인 아서 카펠(샤넬 왼쪽).첫 연인 갑부 발장 따라 경마장 딸린 성으로발장의 부모는 직조 산업으로 유명한 생에티엔 출신으로, 대대로 운영해 온 섬유 공장을

    2021.02.06 08:50:03

    [명품 이야기]샤넬, 바느질하며 꿈꿨던 가수의 길 접고 패션의 길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