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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즈 테일러, 64.2캐럿 까르띠에 반지 선물로 받아[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까르띠에②고대의 장신구는 주술적인 의미와 신분·지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현대의 장신구는 개인의 개성이나 스타일을 표현하는 한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장신구는 착용자의 취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현대에서는 의상과 조화롭게 함으로써 개인의 감각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까르띠에 장신구를 애용한 사람 중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최고의 화제를 낳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955년 그레이스 켈리는 칸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에 왔고 이때 모나코 공국의 왕자인 레니에 3세를 처음 만났다. 레니에 3세는 1년 동안 그레이스 켈리에게 끊임없이 구애했고 결국 성공해 결혼에 골인했다. 그는 “그레이스, 나의 궁전은 혼자 지내기엔 너무 넓어요”라는 말로 청혼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에게 청혼 위해 특별 주문 제작 1956년 1월 레니에 3세가 그레이스 켈리에게 청혼하기 위해 까르띠에에 특별 주문 제작한 10.47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다(사진①). 이 반지는 약혼의 증표였고 그레이스 켈리는 그녀의 마지막 영화 ‘상류사회’에서 이 반지를 끼고 출연했다. 이 반지로 전 세계에 약혼을 공표한 셈이다. 1956년 4월 12일 모나코 성당에서 할리우드 여배우와 레니에 3세의 동화같은 결혼식이 거행됐다. 아마 왕실의 일원이 된 그레이스 켈리에게는 이 반지의 무게만큼이나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 않았을까 한다. ‘왕이 되려는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경구처럼 말이다. 그레이스 켈리는 당시 영화사와 계약이 몇 년 남아 있었는데 이 결

    2023.01.31 10:43:21

    리즈 테일러, 64.2캐럿 까르띠에 반지 선물로 받아[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까르띠에, 귀족들 파티 문화로 날개 달아[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까르띠에 ①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18년 7월 10일 인도 유학생들과 함께 ‘당갈’이라는 인도 영화를 관람할 때 착용했던 브로치가 까르띠에인지 아닌지 논란이 많았다. 당시 착용했던 표범 브로치가 ‘팬더 드 까르띠에’였다면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보석을 사용해 가격이 2억원 정도에 달해 말들이 많았던 것이다. ‘김정숙 여사님 옷장’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통해 아리랑닷컴에서 판매하는 14.95달러의 제품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 기사를 보고 씁씁한 기분이 들었다. 대통령 부인이 2억원대의 브로치를 착용했어도 욕을 먹었을 것이고 본인이 명품 카피를 맞췄어도 영부인의 품위가 손상됐을 것이다. 14.95달러의 명품 브랜드를 모방한 듯한 제품을 고른 안목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팬더 드 까르띠에’ 디자인은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의 3세손인 루이 카르티에의 연인인 잔 투생(사진④)이 다양한 포즈의 표범 디자인을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팬더는 프랑스어로 표범 혹은 사나운 여자를 뜻하고 당시 루이 카르티에의 연인이었던 잔 투생의 별명이기도 했다. 루이 카르티에에게 잔 투생을 소개해 준 사람은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었다.팬더 드 까르띠에, 김정숙 여사 착용 여부 논란잔 투생의 애칭이 ‘라 팬더’여서 표범 디자인의 종류들을 ‘팬더 드 까르띠에’라고 부른다. 잔 투생은 출신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카르티에 집안에서 결혼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카르티에는 잔 투생에게 보석 세공과 세팅 기술 등을 전수했고 잔 투생은 점차 보석 디자인에 눈을 떴다. 마침내 19

    2023.01.09 12:14:43

    까르띠에, 귀족들 파티 문화로 날개 달아[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몽클레르, 겨울 스포츠 패딩 위주에서 캐주얼로 확장[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몽클레르 ② 1952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몽클레르는 초기에는 산악용 텐트와 침낭류 등 캠핑 관련 제품을 주로 만들다가 1954년 첫 퀼팅 다운 재킷을 내놓았다. 노동자들이 작업복 위에 방한 목적으로 개발됐던 퀼팅 다운 재킷은 점차 발전해 세계 둘째로 높은 K2 정상을 탐험할 수 있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몽클레르는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역사적인 금메달을 획득한 프랑스 스키 국가 대표팀의 공식 후원사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사용한 로고의 형태가 프랑스의 국조인 수탉 형태를 변경해 만든 것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1972년 스키 강사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그들에게 적절한 옷과 장비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때 개발된 퀼팅 다운 재킷은 세계 최고의 스키 강사를 따뜻하고 상쾌하게 유지하고 얼어 붙을 정도의 극한 환경에서도 장시간 그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몽클레르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고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1986년 브루노 루카우어 감독이 연출한 가수 듀란 듀란에 관한 영화 ‘위 러브 사이먼 르 본(We Love Simon le Bon)’에 출연한 여배우들은 다양한 색상의 몽클레르 재킷을 입었다(사진①). 디자인 요소에서 다양한 변화를 준 몽클레르의 다운 재킷은 밀라노의 젊은 파니나니(1980년대 이탈리아 청소년을 지칭)라면 꼭 입어야 할 필수 아이템이 됐다. 스키장뿐만 아니라 도심에서도 몽클레르 퀼팅 재킷이 유행했다. 1988년 패션 잡지 마담 피가로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편집국 기자들이 몽클레르 다운 재킷을 입고 촬영한 사

    2022.12.12 14:17:20

    몽클레르, 겨울 스포츠 패딩 위주에서 캐주얼로 확장[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몽끌레르, 산악용 텐트·침낭에서 출발해 패딩 대명사로[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몽끌레르 ①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방송 TV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인 송중기 씨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학생으로 환생해 입은 모직 더플코트가 향수를 느끼게 했다. 1990년대에는 교복 위에 혹은 캐주얼 웨어로 모직 코트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직 코트는 점차 줄어들고 패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2010년대를 뜨겁게 달군 노스페이스의 패딩은 중·고등학생들에겐 교복처럼 여겨졌다. 부모들은 주머니 사정상 다소 과도한 지출인 줄 알고도 자식들의 요구로 마지못해 구매했다. 패딩을 둘러싸고 학생들 간 폭행 사건과 갈취에 대한 뉴스를 종종 접하곤 씁쓸해 했던 기억이 난다.소비자들은 무거운 모직 코트보다 가볍고 보온성이 뛰어난 패딩과 경량 다운을 선호한다. 아마 이 유행은 당분간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패딩의 최고 명품브랜드 중 하나는 처음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1992년 이탈리아 회사인 페퍼 컴퍼니가 인수한 몽끌레르다.몽끌레르는 1952년 르네 라미용과 앙드레 뱅상이 함께 만들었다. 당시 33세의 라미용 창립자는 산악 장비를 고안하며 다수의 특허를 보유한 발명가이면서 산악인이었다. 26세의 뱅상 창립자는 스키 강사이자 스포츠 유통업자였다. 몽끌레르라는 브랜드 이름은 그들이 회사를 설립한 지역명 모네스티에르 드 클레르몽(Monastier de Clermont)에서 첫 세 글자와 뒤에 네 글자를 따서 합성해 지은 것이다. 모네스티에르 드 클레르몽은 프랑스 쪽 알프스에 접한 그르노블 지역에 있다.  유명 스키 선수가 애용하면서 인지도 높아져 브랜드를 만든 1952년 초기에는 산악용 텐트와 침낭류 등 캠핑 관련 제

    2022.11.26 15:57:01

    몽끌레르, 산악용 텐트·침낭에서 출발해 패딩 대명사로[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33세 다니엘 리, ‘뉴 보테가 베네타’ 시대 열어[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보테가 베네타 ③현재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이끄는 맨 앞에 두 그룹이 있다. 첫째는 베르나르 아르노가 이끄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이다. 2020년 매출이 440억 유로(약 61조8200억원)에 달한다. 둘째는 프랑수아 앙리 피노가 이끄는 케링그룹으로, 2020년 매출은 131억 유로(약 18조4000억원)였다. LVMH 그룹이 소유한 명품 브랜드는 루이비통·크리스찬 디올·펜디·에밀리오 푸치·지방시·겐조·마크 제이콥스·셀린느·태그 호이어·쇼메·불가리·로로피아나·티파니 등이다. 케링그룹은 구찌·보테가 베네타·생 로랑·알렉산더 맥퀸·발렌시아가·부쉐론·브리오니·스텔라 매카트니 등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케링그룹은 2001년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인수한 뒤 토머스 마이어를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다. 그 뒤 보테가 베네타는 명품 브랜드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지켜 나갔다. 마이어는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를 살리기 위해 미니멀한 콘셉트의 디자인 위주로 콘셉트를 바꿨다. 기존 액세서리 브랜드에서 여성복·남성복·향수 등으로 영역을 넓혀 나가면서 토털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베스트셀러 아이템은 ‘까바백(사각형의 양가죽으로 만든 조금 큰 사이즈의 토트백)’과 ‘놋백(어깨끈이나 손잡이가 없는 여자들이 손에 드는 작은 형태의 가방으로 다양한 잠금장치를 장식으로 사용)’을 손꼽을 수 있다.그는 또 라 스쿠올라 델라 펠레테리아라는 가죽 제품 장인 양성 학교를 세우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7년간 보테가 베네타에서 일한 마이어는 몇 년 동안

    2022.11.15 15:57:44

    33세 다니엘 리, ‘뉴 보테가 베네타’ 시대 열어[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 부활시킨 토마스 마이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보테가 베네타②보테가 베네타는 창립자인 미켈레 타데이의 전처 라우라 몰테도가 인수한 뒤 경영 악화에 직면했다. 고유의 절제미와 브랜드의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인 자일스 데콘을 영입했다. 그런데도 어려운 경영 상황은 좀체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구찌그룹이 2001년 2월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인수했다. 당시 구찌그룹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의 권유가 있었다. 토마스 마이어가 그해 6월 톰 포드의 추천으로 보테가 베네타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마이어는 독일 남서부 포르츠하임의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초 집안의 전통에 따라 건축을 공부했다.그러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 진로를 바꿨다. 파리 ‘샹브르 신디칼 드 라 오트쿠튀르’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마이어는 일상복 디자인의 선구자로 꼽히는 소니아 리켈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8년간 일했다. 이어 레빌론에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4년간, 에르메스에서 여성복과 가죽 소품 디자이너로 9년간 각각 몸담았다. 마이어는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 1960년대 말 보테가 베네타가 광고 문구로 사용했던 ‘당신의 이니셜만으로 충분할 때(When Your Own Initials Are Enough)’에 주목했다. 그는 이 문구를 응용해 브랜드 로고를 없애 버렸다. 미니멀한 콘셉트의 디자인을 추구한 것으로 파격적이었다.마이어는 갖은 노력 끝에 보테가 베네타를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도록 길들여졌다”며 “모든 것을 가질 수는

    2022.11.01 10:15:20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 부활시킨 토마스 마이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까바백, ‘청담동 여자들의 백’ 입소문 나 큰 인기[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보테가 베네타 ①미국의 여론 조사 업체인 ‘럭셔리 인스티튜트’가 2006년 4월 소비자 브랜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보테가 베네타는 에르메스·샤넬·루이뷔통·구찌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보테가 베네타가 생산하는 가방은 그 흔한 로고도 새겨 넣지 않는다. 이 가방의 가격은 최저 150만원에서 라지 까바백(사각형의 양가죽으로 만든 조금 큰 사이즈의 토트백, 사진 ①)은 1200만원까지 한다.보테가 베네타의 대표 브랜드인 까바백은 한때 한국에서는 ‘청담동 여자들의 백’으로 입소문 나기도 했다. 바느질 선 없이 손으로 엮어 만드는 장인 정신이 강한 느낌은 청담동 여자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얼마 전 ‘뜻밖의 여정’이란 TV 프로그램에서 배우 윤여정 씨가 이 까바백을 든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가죽 공예로 잔뼈 굵은 친구 두 명 의기투합 까바백은 특별한 장식 없이 고급스럽고 유행을 타지 않는 장점이 있다. 미니 까바, 미디엄 까바, 라지 까바 등 3종류로 출시되고 있고 겉은 양가죽을 인트레치아토 기법으로 만들고 안감은 스웨이드를 사용한다. 장인들은 나무틀에 가죽을 고정해 가방을 제작하기 때문에 까바백의 옆선에는 봉제선이 없다. 모든 까바백에는 일련의 고유 번호가 부착돼 있고 바구니 같은 간단한 모양에 손잡이 두 개만 달려 있는 토트 스타일이다. 까바백은 보테가 베네타의 고도로 숙련된 장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2001년 발표된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보테가 베네타는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비첸자에서 1966년 미켈레 타데이와 렌초 첸자로가 함께 만든 브랜드다. 두

    2022.10.17 09:37:55

    까바백, ‘청담동 여자들의 백’ 입소문 나 큰 인기[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청순한 이미지 오드리 헵번과 콤비로 날개 달아[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지방시 ①위베르 드 지방시는 1927년 프랑스 보베 지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는 ‘고블랭 직물’ 공장의 감독이었다. ‘고블랭 직물’은 유명 화가의 밑그림을 기초로 무늬를 자유로이 짜 넣은 수공예적 방식을 일컫는다. 루이 14세 때 이런 방식의 호화로운 벽걸이 직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지방시는 어릴 적부터 예술과 패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시는 열 살이 되던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패션관을 방문한 후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44년 그는 열일곱 살 때 파리 예술학교에 입학해 순수 미술을 공부했다. 이듬해 그는 젊은 디자이너인 자크 파스의 하우스에서 1년간 수습 생활을 거쳐 1946년 로베르 피케에서, 1947년 루시엥 르롱에서 각각 6개월 동안 일했다.이후 전위적인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부티크에서 4년간 일을 배웠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그의 창업에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스키아파렐리 부티크에서 유명한 고객들과의 친분은 지방시가 자기만의 부티크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직물 공장 운영한 외할아버지의 영향 받아지방시는 1952년 파리의 알프레드 드비니가 8번지에 자신의 부티크 하우스를 열었고 그해 2월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의 첫 컬렉션은 지방시를 전 세계 패션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와 일반인에까지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스타가 탄생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는 “위베르 드 지방시가 하루 사이에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 어

    2022.09.19 08:05:20

    청순한 이미지 오드리 헵번과 콤비로 날개 달아[명품 이야기]
  • 발렌티노를 빛나게 한 번천 에반젤리스타 캠벨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발렌티노 ③발렌티노 가라바니는 “내가 생각하는 패션이란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평범한 말 같지만 그의 패션 스타일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그가 성공한 원인은 이탈리아의 실용적인 장인 정신에 더해 화려하고 장식적인 프랑스의 쿠튀르 정신을 잘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단에 프랑스 자수를 사용했고 대조와 과장의 테크닉을 통해 여성의 ‘우아함’을 표현했다. 특히 꽃을 모티브로 한 드레스와 빨강 색상으로 이뤄진 드레스 ‘레 루주 발렌티노(le rouge Valentino)’ 등은 시대를 넘어선 발렌티노의 창조성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발렌티노의 화려함의 극치는 빨간색뿐만 아니라 장식과 원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섬세한 비즈 장식(beading : 작은 구슬을 수놓음)과 화려한 레이스, 최고급 장인이 화려하게 놓은 자수, 펄럭이는 러플, 화려한 프린트 원단들은 발렌티노의 뛰어난 재단 기술을 통해 더욱 화려하고 우아하게 표현됐다. 의상들을 들여다보면 섬세하고 한없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눈에 봤을 때 시각적 효과가 크고 통일된 이미지를 만드는 독특한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발렌티노는 여성스러우면서도 당당한, 그러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는 여성의 우아함을 잘 표현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깜짝 출연지젤 번천, 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등 슈퍼 모델들과 ‘오스카 드레스’로 유명한 샤론 스톤이 발렌티노를 떠받쳐 줬다. 그는 유명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에도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브라질 출신의 1980

    2022.09.05 13:37:49

    발렌티노를 빛나게 한 번천 에반젤리스타 캠벨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오페라 공연 빨간 드레스에서 영감, ‘발렌티노 레드’ 탄생[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발렌티노①발렌티노의 창립자인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1932년 5월 11일 이탈리아 보게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솔리니의 독재 정권과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패션 디자이너인 이모 밑에서 일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17세가 되던 해 대학 진학보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 발렌티노는 파리에서 패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6개월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패션 디자인과 프랑스어를 배운 뒤 18세에 파리로 향했다. 1950년 파리 의상조합학교에 입학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년 뒤 파리 의상조합학교를 졸업했고 장 데세 밑에서 수습생으로 5년 동안 일했다. 1937년 조지 5세 거리에 패션하우스를 연 이집트 출신 장 데세는 장인 정신이 깃든 아주 섬세한 옷들을 만들었다.그의 주 고객은 그리스 왕실, 이집트 왕실, 영국 윈저 공작 부인 등 상류층이 주를 이뤘다. 발렌티노는 장 데세에서 일하는 동안 부유한 왕족 고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상류 사회의 생활 방식과 그들의 엄격한 에티켓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또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파리 쿠튀르 드레스의 섬세한 장식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발렌티노는 수습 기간 동안 취미로 오페라를 즐겨 봤다. 어느 날 무대 위 여배우가 레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에 반했다. 이 레드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아 훗날 그의 디자인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발렌티노 레드(사진 ①. 강렬한 홍색에 주홍색의 기운이 살짝 감도는 발렌티노의 사치스

    2022.08.01 13:18:56

    오페라 공연 빨간 드레스에서 영감, ‘발렌티노 레드’ 탄생[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명품이야기] 베르사체, 슈퍼모델·배우·팝스타 등장시켜 인지도 높여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베르사체 ③6월 27일 서울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장녀 결혼식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딸 원주 씨가 입은 하객 룩이 화제가 됐다. 원주 씨는 베르사체의 2022년 봄여름 컬렉션 제품 중 하나인 ‘바로크 여신 슬래시 드레스(Barocco Goddess Slash Dress)’를 입어 이목을 끌었다. 이 제품은 베르사체 공식 홈페이지에서 287만원에 판매됐고 품절됐다.블랙 색상의 미니 드레스는 A라인의 실루엣으로 바로크 여신의 프린트가 옆선을 따라 배색으로 부착됐고 컬러풀한 안전핀과 메두사 문양의 단추가 절개선을 따라 부착된 스타일이다(사진①). 베르사체로선 의도하지 않은 톡톡한 홍보 효과를 거둔 셈이다.이번 원주 씨의 하객 룩은 우연의 결과이지만 유명 인사들을 통한 브랜드 인지도 높이기는 베르사체의 전통적 전략이었다. 1978년 밀라노 컬렉션에 데뷔한 베르사체는 패션의 중심지이자 유서 깊은 파리에서는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베르사체는 패션쇼에 슈퍼모델들을 대거 세웠다. 슈퍼모델은 패션쇼뿐만 아니라 패션 사진, 화장품을 비롯한 각종 광고 등 다방면에서 활약을 보이며 고수익을 올리는 모델을 일컫는다. 패션업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중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델들이다.독일 출신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쉬퍼는 “슈퍼모델이 되려면 동시에 전 세계의 모든 패션 매거진 표지에 등장해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슈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크리스티 털링턴과 나는 일당 1만 달러 이하의 일을 위해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2022.07.18 07:49:47

    [명품이야기] 베르사체, 슈퍼모델·배우·팝스타 등장시켜 인지도 높여
  • 베르사체, '관능, 섹시, 모던'의 아이콘으로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베르사체 ①지아니 베르사체는 1946년 12월 이탈리아 레조디컬러브리아에서 재봉사였던 어머니와 세일즈맨인 아버지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누나는 열두 살에 사망했고 형 산토는 훗날 베르사체 브랜드를 만들고 경영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여동생 도나텔라는 지아니가 ‘완벽한 여성’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섹시했다. 지아니는 파티 걸인 여동생을 뮤즈(muse)로 삼아 디자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지아니 베르사체가 죽은 뒤 동생 도나텔라는 지금까지 브랜드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다. 재봉사였던 어머니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고 있던 크리스찬 디올의 드레스를 복제해 판매했다. 지아니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드레스를 만들고 나면 남은 천들로 인형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패션 디자인과 가까워졌다. 어머니 아틀리에에서 견습생으로 시작일설에 따르면 지아니가 아홉 살 때 첫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지아니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그가 훗날 뛰어난 재단 실력을 발휘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지아니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아틀리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는 게 더 적성이 맞았다. 어머니가 그의 패션 첫 스승인 셈이다. 작업실에서는 원단과 장식에 쓰이는 부자재를 만지면서 재단 기법을 배웠다. 그는 매장에서 손님들과 상담하면서 판매에 대한 노하우를 하나하나 쌓아 나갔다. 그가 26세 되던 1972년은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패션의 본고장인 밀라노로 이주했고 플로렌틴 플라워즈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이어 제니·컴플리체·컬러강과

    2022.06.17 09:46:17

    베르사체, '관능, 섹시, 모던'의 아이콘으로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크리스찬 디올의 뒤를 이은 수석 디자이너는 누구?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④크리스찬 디올은 1957년 9월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물려받았다. 그는 19세에 크리스찬 디올의 어시스턴트에 임명된 지 불과 2년이 지나 수석의 자리에 앉았다. 1958년 1월 로랑의 첫째 컬렉션인 트라페즈 라인(사다리꼴 라인)은 시작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몸을 자유롭게 하는 실루엣으로, 쇼가 끝난 후 파리 시민들은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환호했다.1960년 봄·여름 컬렉션은 1960년대의 젊음을 압축해 잘 표현한 것으로, 디올 하우스의 컬렉션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거리의 청소년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담한 비트룩과 디올이 가장 좋아하는 색상 중 하나인 블랙 색상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 컬렉션은 우아한 디올 라인을 선호하는 고객들에게 외면당했고 결국 디올의 경영진은 로랑을 해고했다. 마크 보앙, 디올 최장수 수석 디자이너 기록마크 보앙이 1961년 이브 생 로랑의 뒤를 이어 디올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장 파투의 디자이너이자 로버트 피아제의 보조 디자이너였던 보앙은 1958년 런던 자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디올 하우스에 합류했다. 보앙은 1953년 자신의 이름을 건 부티크를 열었지만 매출이 저조해 단 한 번의 컬렉션을 발표하고 폐점했다. 그는 1961년 파리 쿠튀르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그는 그곳에서 여성성에 대한 현대적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슬림룩을 만들었다. 에술의 세계, 특히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된 보앙은 거의 30년 동안 많은 할리우드

    2022.05.23 14:16:03

    크리스찬 디올의 뒤를 이은 수석 디자이너는 누구?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1990년대 패션에 나타난 스포츠 룩의 물결[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프라다 ③바쁘게 살아가는 20~30대 비즈니스 우먼을 겨냥한 1990년대 초반의 프라다 패션들은 클래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패션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 여성 의류에 진출한 미우치아 프라다는 저택의 색바랜 가구와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가방, 어머니가 쓰던 낡은 옷장 등 자신에게 친숙한 환경에서 디자인 콘셉트를 찾았다. 프라다의 디자인은 클래식하고 전반적으로 선이 날카롭고 경직된 느낌을 줬다. 또 프라다 패션에서 반복돼 나타나는 패턴인 제복의 느낌을 연출하는 밀리터리 룩의 경향도 엿보였다. 프라다는 1996년 패션 콘셉트의 새로운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중성적 이미지와 제복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버튼이나 장식을 제거하고 간결하며 모던한 세련미로 브랜드 이미지를 다시 구축해 나간 것이다.  프라다의 미적 특징은 명품 브랜드들이 고가의 사치스러운 제품을 생산해 소수만을 위한 옷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선입견을 깬 것이다.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진정한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튀지 않는 평범한 옷, 그러면서도 어딘가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 평범한 ‘보통 여자들’을 위한 옷이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 세계였다. 1993년대 중반 프라다의 콘셉트가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으로 전환되면서 프라다는 스포티한 감성이 묻어 나는 스포츠 룩을 출현시켰다. 그것이 스포티함과 캐주얼한 디자인의 프라다 스포츠다. 운동을 좋아했던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 파트리치오는 프라다의 요트인 루나로사로 국제 요트 대회에 참가해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기도

    2022.03.27 06:00:08

    1990년대 패션에 나타난 스포츠 룩의 물결[명품 이야기]
  •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프라다②‘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 또한 프라다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영화 예술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인 의상은 화면 언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화 의상은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를 형성하고 특징을 표현하며 인물의 심리 변화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로렌 아이스버거가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쓴 유명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에블리 블런트가 함께 출연했다. 영화 상영 후 이 소설은 30주 연속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로렌 아이스버거가 학교 졸업 후 미국의 유명한 잡지 편집장의 비서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담은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 극복, 패션 달인으로 성장처음 직장에 들어가 방황하다가 자신의 문제점을 찾고 극복하면서 훌륭한 패션 달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패션 브랜드와 영화의 합작으로 완성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때문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잡지사의 편집장 미란다는 프라다를 좋아했고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직장 신인 앤디는 샤넬을 많이 입었다.이 영화에는 프라다와 샤넬 외에도 캘빈 클라인·구찌·디오르·지미추·발렌티노·베르사체·펜디 등 다양한 패션 브랜드들이 등장했다. 미란다(메릴 스트립)는 프라다의 검은색 브이넥의 드레스를 통해 우아하고 여유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잘 나타냈다. 미란다의 웃음과 프라다의 결합을 통

    2022.03.15 17:30:06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 [명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