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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순한 이미지 오드리 헵번과 콤비로 날개 달아[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지방시 ①위베르 드 지방시는 1927년 프랑스 보베 지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는 ‘고블랭 직물’ 공장의 감독이었다. ‘고블랭 직물’은 유명 화가의 밑그림을 기초로 무늬를 자유로이 짜 넣은 수공예적 방식을 일컫는다. 루이 14세 때 이런 방식의 호화로운 벽걸이 직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지방시는 어릴 적부터 예술과 패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시는 열 살이 되던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패션관을 방문한 후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44년 그는 열일곱 살 때 파리 예술학교에 입학해 순수 미술을 공부했다. 이듬해 그는 젊은 디자이너인 자크 파스의 하우스에서 1년간 수습 생활을 거쳐 1946년 로베르 피케에서, 1947년 루시엥 르롱에서 각각 6개월 동안 일했다.이후 전위적인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부티크에서 4년간 일을 배웠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그의 창업에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스키아파렐리 부티크에서 유명한 고객들과의 친분은 지방시가 자기만의 부티크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직물 공장 운영한 외할아버지의 영향 받아지방시는 1952년 파리의 알프레드 드비니가 8번지에 자신의 부티크 하우스를 열었고 그해 2월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의 첫 컬렉션은 지방시를 전 세계 패션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와 일반인에까지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스타가 탄생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는 “위베르 드 지방시가 하루 사이에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 어

    2022.09.19 08:05:20

    청순한 이미지 오드리 헵번과 콤비로 날개 달아[명품 이야기]
  • 발렌티노를 빛나게 한 번천 에반젤리스타 캠벨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발렌티노 ③발렌티노 가라바니는 “내가 생각하는 패션이란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평범한 말 같지만 그의 패션 스타일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그가 성공한 원인은 이탈리아의 실용적인 장인 정신에 더해 화려하고 장식적인 프랑스의 쿠튀르 정신을 잘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단에 프랑스 자수를 사용했고 대조와 과장의 테크닉을 통해 여성의 ‘우아함’을 표현했다. 특히 꽃을 모티브로 한 드레스와 빨강 색상으로 이뤄진 드레스 ‘레 루주 발렌티노(le rouge Valentino)’ 등은 시대를 넘어선 발렌티노의 창조성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발렌티노의 화려함의 극치는 빨간색뿐만 아니라 장식과 원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섬세한 비즈 장식(beading : 작은 구슬을 수놓음)과 화려한 레이스, 최고급 장인이 화려하게 놓은 자수, 펄럭이는 러플, 화려한 프린트 원단들은 발렌티노의 뛰어난 재단 기술을 통해 더욱 화려하고 우아하게 표현됐다. 의상들을 들여다보면 섬세하고 한없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눈에 봤을 때 시각적 효과가 크고 통일된 이미지를 만드는 독특한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발렌티노는 여성스러우면서도 당당한, 그러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는 여성의 우아함을 잘 표현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깜짝 출연지젤 번천, 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등 슈퍼 모델들과 ‘오스카 드레스’로 유명한 샤론 스톤이 발렌티노를 떠받쳐 줬다. 그는 유명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에도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브라질 출신의 1980

    2022.09.05 13:37:49

    발렌티노를 빛나게 한 번천 에반젤리스타 캠벨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오페라 공연 빨간 드레스에서 영감, ‘발렌티노 레드’ 탄생[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발렌티노①발렌티노의 창립자인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1932년 5월 11일 이탈리아 보게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솔리니의 독재 정권과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패션 디자이너인 이모 밑에서 일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17세가 되던 해 대학 진학보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 발렌티노는 파리에서 패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6개월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패션 디자인과 프랑스어를 배운 뒤 18세에 파리로 향했다. 1950년 파리 의상조합학교에 입학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년 뒤 파리 의상조합학교를 졸업했고 장 데세 밑에서 수습생으로 5년 동안 일했다. 1937년 조지 5세 거리에 패션하우스를 연 이집트 출신 장 데세는 장인 정신이 깃든 아주 섬세한 옷들을 만들었다.그의 주 고객은 그리스 왕실, 이집트 왕실, 영국 윈저 공작 부인 등 상류층이 주를 이뤘다. 발렌티노는 장 데세에서 일하는 동안 부유한 왕족 고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상류 사회의 생활 방식과 그들의 엄격한 에티켓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또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파리 쿠튀르 드레스의 섬세한 장식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발렌티노는 수습 기간 동안 취미로 오페라를 즐겨 봤다. 어느 날 무대 위 여배우가 레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에 반했다. 이 레드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아 훗날 그의 디자인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발렌티노 레드(사진 ①. 강렬한 홍색에 주홍색의 기운이 살짝 감도는 발렌티노의 사치스

    2022.08.01 13:18:56

    오페라 공연 빨간 드레스에서 영감, ‘발렌티노 레드’ 탄생[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명품이야기] 베르사체, 슈퍼모델·배우·팝스타 등장시켜 인지도 높여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베르사체 ③6월 27일 서울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장녀 결혼식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딸 원주 씨가 입은 하객 룩이 화제가 됐다. 원주 씨는 베르사체의 2022년 봄여름 컬렉션 제품 중 하나인 ‘바로크 여신 슬래시 드레스(Barocco Goddess Slash Dress)’를 입어 이목을 끌었다. 이 제품은 베르사체 공식 홈페이지에서 287만원에 판매됐고 품절됐다.블랙 색상의 미니 드레스는 A라인의 실루엣으로 바로크 여신의 프린트가 옆선을 따라 배색으로 부착됐고 컬러풀한 안전핀과 메두사 문양의 단추가 절개선을 따라 부착된 스타일이다(사진①). 베르사체로선 의도하지 않은 톡톡한 홍보 효과를 거둔 셈이다.이번 원주 씨의 하객 룩은 우연의 결과이지만 유명 인사들을 통한 브랜드 인지도 높이기는 베르사체의 전통적 전략이었다. 1978년 밀라노 컬렉션에 데뷔한 베르사체는 패션의 중심지이자 유서 깊은 파리에서는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베르사체는 패션쇼에 슈퍼모델들을 대거 세웠다. 슈퍼모델은 패션쇼뿐만 아니라 패션 사진, 화장품을 비롯한 각종 광고 등 다방면에서 활약을 보이며 고수익을 올리는 모델을 일컫는다. 패션업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중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모델들이다.독일 출신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쉬퍼는 “슈퍼모델이 되려면 동시에 전 세계의 모든 패션 매거진 표지에 등장해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슈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크리스티 털링턴과 나는 일당 1만 달러 이하의 일을 위해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2022.07.18 07:49:47

    [명품이야기] 베르사체, 슈퍼모델·배우·팝스타 등장시켜 인지도 높여
  • 베르사체, '관능, 섹시, 모던'의 아이콘으로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베르사체 ①지아니 베르사체는 1946년 12월 이탈리아 레조디컬러브리아에서 재봉사였던 어머니와 세일즈맨인 아버지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누나는 열두 살에 사망했고 형 산토는 훗날 베르사체 브랜드를 만들고 경영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여동생 도나텔라는 지아니가 ‘완벽한 여성’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섹시했다. 지아니는 파티 걸인 여동생을 뮤즈(muse)로 삼아 디자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지아니 베르사체가 죽은 뒤 동생 도나텔라는 지금까지 브랜드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다. 재봉사였던 어머니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고 있던 크리스찬 디올의 드레스를 복제해 판매했다. 지아니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드레스를 만들고 나면 남은 천들로 인형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패션 디자인과 가까워졌다. 어머니 아틀리에에서 견습생으로 시작일설에 따르면 지아니가 아홉 살 때 첫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지아니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그가 훗날 뛰어난 재단 실력을 발휘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지아니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아틀리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는 게 더 적성이 맞았다. 어머니가 그의 패션 첫 스승인 셈이다. 작업실에서는 원단과 장식에 쓰이는 부자재를 만지면서 재단 기법을 배웠다. 그는 매장에서 손님들과 상담하면서 판매에 대한 노하우를 하나하나 쌓아 나갔다. 그가 26세 되던 1972년은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패션의 본고장인 밀라노로 이주했고 플로렌틴 플라워즈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이어 제니·컴플리체·컬러강과

    2022.06.17 09:46:17

    베르사체, '관능, 섹시, 모던'의 아이콘으로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크리스찬 디올의 뒤를 이은 수석 디자이너는 누구?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④크리스찬 디올은 1957년 9월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물려받았다. 그는 19세에 크리스찬 디올의 어시스턴트에 임명된 지 불과 2년이 지나 수석의 자리에 앉았다. 1958년 1월 로랑의 첫째 컬렉션인 트라페즈 라인(사다리꼴 라인)은 시작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몸을 자유롭게 하는 실루엣으로, 쇼가 끝난 후 파리 시민들은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환호했다.1960년 봄·여름 컬렉션은 1960년대의 젊음을 압축해 잘 표현한 것으로, 디올 하우스의 컬렉션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거리의 청소년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담한 비트룩과 디올이 가장 좋아하는 색상 중 하나인 블랙 색상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 컬렉션은 우아한 디올 라인을 선호하는 고객들에게 외면당했고 결국 디올의 경영진은 로랑을 해고했다. 마크 보앙, 디올 최장수 수석 디자이너 기록마크 보앙이 1961년 이브 생 로랑의 뒤를 이어 디올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장 파투의 디자이너이자 로버트 피아제의 보조 디자이너였던 보앙은 1958년 런던 자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디올 하우스에 합류했다. 보앙은 1953년 자신의 이름을 건 부티크를 열었지만 매출이 저조해 단 한 번의 컬렉션을 발표하고 폐점했다. 그는 1961년 파리 쿠튀르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그는 그곳에서 여성성에 대한 현대적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슬림룩을 만들었다. 에술의 세계, 특히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된 보앙은 거의 30년 동안 많은 할리우드

    2022.05.23 14:16:03

    크리스찬 디올의 뒤를 이은 수석 디자이너는 누구?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1990년대 패션에 나타난 스포츠 룩의 물결[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프라다 ③바쁘게 살아가는 20~30대 비즈니스 우먼을 겨냥한 1990년대 초반의 프라다 패션들은 클래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패션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 여성 의류에 진출한 미우치아 프라다는 저택의 색바랜 가구와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가방, 어머니가 쓰던 낡은 옷장 등 자신에게 친숙한 환경에서 디자인 콘셉트를 찾았다. 프라다의 디자인은 클래식하고 전반적으로 선이 날카롭고 경직된 느낌을 줬다. 또 프라다 패션에서 반복돼 나타나는 패턴인 제복의 느낌을 연출하는 밀리터리 룩의 경향도 엿보였다. 프라다는 1996년 패션 콘셉트의 새로운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중성적 이미지와 제복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버튼이나 장식을 제거하고 간결하며 모던한 세련미로 브랜드 이미지를 다시 구축해 나간 것이다.  프라다의 미적 특징은 명품 브랜드들이 고가의 사치스러운 제품을 생산해 소수만을 위한 옷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선입견을 깬 것이다.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진정한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튀지 않는 평범한 옷, 그러면서도 어딘가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 평범한 ‘보통 여자들’을 위한 옷이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 세계였다. 1993년대 중반 프라다의 콘셉트가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으로 전환되면서 프라다는 스포티한 감성이 묻어 나는 스포츠 룩을 출현시켰다. 그것이 스포티함과 캐주얼한 디자인의 프라다 스포츠다. 운동을 좋아했던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 파트리치오는 프라다의 요트인 루나로사로 국제 요트 대회에 참가해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기도

    2022.03.27 06:00:08

    1990년대 패션에 나타난 스포츠 룩의 물결[명품 이야기]
  •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프라다②‘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 또한 프라다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영화 예술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인 의상은 화면 언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화 의상은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를 형성하고 특징을 표현하며 인물의 심리 변화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로렌 아이스버거가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쓴 유명한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에블리 블런트가 함께 출연했다. 영화 상영 후 이 소설은 30주 연속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로렌 아이스버거가 학교 졸업 후 미국의 유명한 잡지 편집장의 비서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담은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 극복, 패션 달인으로 성장처음 직장에 들어가 방황하다가 자신의 문제점을 찾고 극복하면서 훌륭한 패션 달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패션 브랜드와 영화의 합작으로 완성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때문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잡지사의 편집장 미란다는 프라다를 좋아했고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직장 신인 앤디는 샤넬을 많이 입었다.이 영화에는 프라다와 샤넬 외에도 캘빈 클라인·구찌·디오르·지미추·발렌티노·베르사체·펜디 등 다양한 패션 브랜드들이 등장했다. 미란다(메릴 스트립)는 프라다의 검은색 브이넥의 드레스를 통해 우아하고 여유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잘 나타냈다. 미란다의 웃음과 프라다의 결합을 통

    2022.03.15 17:30:06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천사는 샤넬을 입는다? [명품 이야기]
  • 1913년 밀라노에 가죽 매장 내면서 역사 시작[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프라다①프라다의 역사는 1913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마리오 프라다가 동생 마티노 프라다와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쇼핑센터 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아케이드에 가죽 제품 전문 매장인 ‘프라텔리 프라다(프라다의 형제라는 의미)’를 열면서 시작됐다.그는 부유한 공무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유럽과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패션 디자이너였던 마리오 프라다는 여행을 통해 패션과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여행 중 상류 사회의 화려한 생활을 누린 경험을 바탕으로 고급 가죽 가방 브랜드를 론칭하고 판매를 시작했다.그는 거북 껍데기와 바다 동물의 껍질 등 희귀한 소재를 들여와 고급스러운 가죽 상품을 만들었고 프라다는 곧 유명해졌다. 프라다는 1919년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에 가방을 납품하는 공식 업체로 지정돼 왕가의 로고를 받았다. 이때 받은 왕가의 로고는 프라다 역삼각형의 로고 안에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공황·2차 세계대전으로 쇠퇴기 맞아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에 있는 프라다 매장 입구에는 창업 당시의 간판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오제티디 루소(명품)’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프라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마리오 프라다는 아들인 알베르토 프라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아들은 관심이 없었고 1958년 마리오 프라다는 사망했다.결국 가업은 마리오 프라다의 딸인 루이자 프라다가 물려받았다. 1977년 창업자의 손녀이자 루이자 프라다의 딸인 미우치아 프라다가 업을 3대째 이어받았고 쓰러져 가는 회사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1949년에 태어난

    2022.03.01 17:30:18

    1913년 밀라노에 가죽 매장 내면서 역사 시작[명품 이야기]
  • 버버리, 베일리의 젊고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히트’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버버리 ②샤넬에 칼 라거펠트, 루이비통에 마크 제이콥스, 구찌에 톰 포드가 있었다면 버버리에는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해석으로 다양한 제품을 히트시켰고 제이콥스는 루이비통을 재해석하고 유명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150년 전통에 젊음을 불어넣었다. 구찌의 톰 포드는 지루한 구찌 제품에 현대적 감각의 섹시함을 제품에 녹여 냈고 버버리의 베일리는 캐주얼하면서도 영국적인 아이덴티티에 모던함을 더해 젊고 트렌디한 버버리를 탄생시켰다. 이런 결과는 엄청난 매출 신장으로 이어졌다.베일리가 버버리에 합류하기 이전 버버리는 위기를 맞았다. 영국 왕실로부터 6번에 걸쳐 수출상을 수상하고 왕실의 지정 상인이었던 버버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존의 변화없는 스타일, 비슷한 체크무늬 패턴의 전개, 트렌치코트·재킷 등의 단조로운 상품군은 나이든 사람들이 입는 중후한 이미지의 옷으로 굳어지면서 젊은층들이 외면했다.또한 브랜드의 대중화 전략으로 소규모 상점 판매를 허용한 결과 명품 이미지 하락과 모조품 양산 등으로 인해 영국의 유명 백화점인 셀프리지(Selfridiges)·하비 니콜스(Harvey Nichols)·해롯(Harrods)에서도 버버리를 취급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버버리=체크무늬, 트렌치코트’ 등식 과감히 깨위기의식을 느낀 버버리는 1997년 미국 삭스 피프스 백화점의 최고경영자(CEO)였던 로즈마리 브라보를 영입해 브랜드 이미지 개혁을 시도했다. 그녀는 먼저 ‘버버리=체크무늬, 트렌치코트’로 통하는 등식을 과감히 깨

    2021.10.31 06:00:54

    버버리, 베일리의 젊고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히트’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통기성·방수 겸비 버버리 ‘개버딘 레인코트’, 혁신 불러[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버버리①토마스 버버리는 1856년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 주의 양털 무역 중심지로 유명한 도시인 윈체스터의 베이싱스토크가에 조그만 포목상을 열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그의 가게에서는 낚시와 사냥 등 야외 활동에 적합한 천연 소재의 튼튼하고 질긴 면과 마 소재를 주로 팔았다. 버버리 역사에서 주목되는 소재는 개버딘이다. 중세 승려들이 순례용 망토를 만들 때 양털과 면 등을 촘촘하게 엮은 능직(날실 또는 씨실이 두 올이나 그 이상 건너뛰어 교차돼 비스듬한 방향으로 무늬가 나타나게 짜는 방법)을 사용했고 이 능직을 개버딘이라고 한다. 개버딘은 프랑스어로 망토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투박한 개버딘 소재로 만든 망토는 영국의 농부와 양치기들이 입는 스목(smock : 의류 위에 덧입는 작업복)으로 변형됐다. 버버리는 이 양치기들이 입은 스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궂은 영국 날씨에서 신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기능성에 주목해 새로운 소재를 개발했다. 버버리는 면사에 한 번 방수 가공을 하고 그 실로 짠 원단에 특별히 개발한 방수 코팅 기술을 입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수한 통기성과 방수 기능을 갖춘 견고하고도 내구성이 뛰어난 소재인 개버딘을 만들어 당시 무겁고 불편한 레인코트를 대신해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에드워드 7세 “내 버버리 가져오게”…일반인에게도 큰 인기개버딘을 트레이드마크로 등록한 버버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활발하게 영업해 개버딘 원단을 수출했다. 1880년대 말 ‘토마스 버버리 앤드 선즈(Thomas Burberry & Sons)’라는 회사가 설립됐다. 이 이름은 버버리의 두 아들인 토마스 뉴

    2021.10.17 06:01:55

    통기성·방수 겸비 버버리 ‘개버딘 레인코트’, 혁신 불러[명품 이야기]
  • 신예 디자이너 톰 포드, 구찌 패션 명가로 만들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⑦구찌 창업자의 손자인 마우리치오 구치는 다시 한번 구찌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에르메스나 샤넬과 같은 고가의 명품 브랜드로 포지셔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구찌는 적자를 면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투자은행 인베스트코프는 1987년 이후 구찌에 수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돌려주지 못해 매각을 고민하기도 했다. 마우리치오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하버드 법대 출신의 전문 경영인 도메니코 드 솔레와 버그도프 굿맨(미국의 고급 백화점) 출신의 던 멜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고용했다.미국 뉴욕 파슨스 스쿨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톰 포드는 패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패션업계에 몸담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열정적으로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유명 디자이너 캐시 하드윅에게 한 달 동안 매일 전화를 걸어 인터뷰 약속을 받아냈다. 포드는 하드윅 아래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2년간 일했다. 포드는 1988년 마크 제이콥스가 디자이너로 일하는 페리 엘리스에 취업해 2년간 근무했다.톰 포드, 1990년 구찌 여성복 디자이너로 근무 시작뉴욕에서 패션에 대한 자신의 재능에 눈뜨게 된 톰 포드는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포드는 자신의 패션 스타일이 유러피언 스타일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때 이탈리아에서 일할 미국 디자이너를 물색하던 던 멜로의 눈에 띄게 됐다. 멜로의 제안으로 1990년 포드는 구찌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의 나이는 29세였다.포드를 채용한 멜로의 날카로운 안목은 적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구찌는 가방이나 신발 등 가죽 제품 브랜

    2021.10.03 06:00:10

    신예 디자이너 톰 포드, 구찌 패션 명가로 만들다
  • 영화배우로 성공한 창업자 아들 로돌프, 구찌로 돌아와 여성 고객에게 큰 인기 얻어[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②구찌의 창립자인 구치오 구치는 1929년 어느날 열일곱 살이던 막내아들 로돌프 구치를 로마로 보냈다. 중요한 고객에게 물건을 전하라고 심부름시킨 것이다. 그런데 로마 플라자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영화감독 마리오 카메리니 감독이 미남인 로돌프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받으라고 제안했다. 로돌프는 이에 응했고 영화배우가 됐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 단코라라는 예명으로 카메리니 감독의 ‘철로’ 작품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초기 이탈리아 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하지만 이후 찍은 영화들은 ‘철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로돌프는 같은 영화에 출연한 신인 배우와 1944년 베네치아에서 낭만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1948년 9월 26일 로돌프의 아들 마우리치오 구치가 태어났다. 마우리치오는 훗날 전 부인 파트리아지아 레지아니에게 살해되는 비극적인 일화를 낳기도 했고 가족 기업인 구찌를 바레인 소재 투자펀드인 인베스트코프에 매각해 가족의 그룹 관여를 종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로돌프는 당초 가업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그가 영화계에서 경력을 쌓아 가던 1935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사건으로 구찌는 큰 타격을 입었다.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다.1950년대 구찌 핸드백, ‘세련된 스타일’ 대명사로 떠올라52개국이 이탈리아 제품 판매와 소재 공급을 거부하면서 창립자 구치오는 고가의 여행 가방 제작에 필요한 고급 가죽과 소재들을 구할 수 없었다. 구치오는 자신이 일으킨 사업체가 몇 년 전 도산한 아버지의 밀

    2021.07.08 06:52:02

    영화배우로 성공한 창업자 아들 로돌프, 구찌로 돌아와 여성 고객에게 큰 인기 얻어[명품이야기]
  • 구찌의 성공 비결 ... 영국 귀족문화 접한 뒤 가죽 제품으로 성공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구찌①구찌의 창립자 구치오 구치는 1881년 밀짚모자 생산을 가업으로 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밀짚모자는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897년 영국으로 가는 모험을 단행했다. 그가 선택한 첫 직장은 런던 사보이 호텔의 벨보이였다.그의 비전은 원대했다. 사보이 호텔에서 일하면서 익힌 영국 귀족과 상류층의 격조 높은 취향과 문화를 고국인 이탈리아 고유의 기술에 접목해 명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02년 피렌체 고향에 돌아와 가죽 제조 업체인 프란지에서 가죽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그는 1921년 마흔 살이 되던 해 마침내 피렌체의 비냐 누오바 거리에 구찌라는 상호로 가죽 피혁 제품을 전문으로 하는 첫 매장을 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교통이 발달해 여행과 휴양 문화가 유행했다. 이에 발맞춰 구찌는 여행용 가방 생산을 전문 주력 사업으로 삼아 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자 핸드백·트렁크·장갑·신발·벨트 등의 컬렉션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여행용 가방에서 핸드백·장갑·신발·벨트로 영역 확대구찌 제품들은 특히 승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40~1950년대 구찌가 선보인 홀스빗 장식(사진 ①)은 승마 시 말에게 물리는 재갈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홀스빗 장식과 함께 등자(발 안장) 장식, 전통 안장 끈에서 착안한 그린-레드-그린 웹(Web·사진 ②) 줄무늬 등은 구찌 고유 브랜드의 상징이 됐다. 웹은 구치오 구치가 말의 안장을 고정하는 데 사용하는 끈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 만들어졌다.

    2021.06.25 06:24:01

    구찌의 성공 비결 ... 영국 귀족문화 접한 뒤 가죽 제품으로 성공 [명품 이야기]
  • 미국 MGM과 동업, 할리우드 배우들에 샤넬 입혀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샤넬⑥ 샤넬은 모나코 북부에 있는 몬테카를로에서 옛 연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러시아 대공을 다시 만났다. ‘샤넬④’에서 소개한 바 있듯 파블로비치 대공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로, 러시아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전횡을 일삼던 그리고리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하기도 한 그는 프랑스 망명 이후 향수 제조 전문가인 에르네스트 보를 샤넬에게 소개해 줬고 ‘샤넬 넘버 파이...

    2021.04.09 0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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