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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송·배신 난무…구찌家 10년 간 가족 분쟁에 휘말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⑤구찌 창립자의 둘째 아들 로돌프는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생 모리츠의 부동산, 밀라노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2000만 달러, 막대한 수익을 내는 구찌 제국의 지분 50%를 포함한 수천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아버지의 죽음은 서른다섯 살의 마우리치오에게 절망을 안겨 줬지만 해방을 뜻하기도 했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에게 집요하게 사랑을 쏟아부으면서도 엄격했다. 마우리치오는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로돌프의 운전사나 비서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로돌프의 비서 카솔의 회고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에게 성채를 주었지만 그 성채를 관리할 돈은 주지 않았습니다. 마우리치오는 아버지에게 부탁할 용기가 없어 저에게 용돈을 빌리곤 했어요.” 마우리치오는 성인이 돼서도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유일한 반항은 파트리치아와 결혼한 것이었다. 로돌프는 마지못해 받아들인 며느리와 결코 가까워지지 못했지만 화해는 했다.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잘 키우고 있는 것이 로돌프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죽음으로 독자 결정할 자유 얻었으나 ‘주눅’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우리치오는 난생처음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자유를 얻었다. 재정을 책임지려면 의사 결정을 해야 했지만 그때까지 모든 일을 아버지가 챙겨 줬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했다. 뉴욕에 있을 때 창립자의 장남이자 큰아버지 알도에게 얻은 교훈도 시대가 바뀌면서 통하지 않게 됐다.명품업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구찌 가족 간의 갈등은 한층 더 심화되고 첨

    2021.08.29 06:00:11

    소송·배신 난무…구찌家 10년 간 가족 분쟁에 휘말려
  • 로퍼, 모조품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미국 중상류층에 ‘신분 상승’ 브랜드로 유명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④구찌가 로퍼 신발 제작을 시작한 것은 가족 중 제화업계 종사자가 있는 공장 직원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이 로퍼는 1950년대 초반에는 이탈리아에서 14달러 정도에 팔렸다. 미국 뉴욕에선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선 칼날처럼 뾰족한 스틸레토 굽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를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련된 여성들이 가격대가 적당하고 굽이 낮은 모카신의 멋과 편안함에 눈뜨게 되면서다. ‘모델 360’으로 불렸던 구찌 최초의 여성용 로퍼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가죽을 바탕으로 홀스빗 장식이 추가됐다. 그중 솔기를 두드러지게 바느질한 윗부분은 코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다시 넓어지는 형태를 보였다. 1968년 첫 모델에서 다소 수정된 ‘모델 350’이 탄생했다. 이 구두가 인기를 얻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조품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소위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장용에 더 적당한 모델 350은 얇은 금색 사슬이 들어간 스택 힐(가죽 원피를 쌓아 올려 굽 모양으로 다듬은 것)과 발등 부분에 금색 장식이 된 것이 특징이었다. 송아지가죽·도마뱀가죽·타조가죽·악어가죽·돼지가죽·뒤집은 송아지 가죽·에나멜 처리된 가죽 등 7가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구두는 독특한 분홍 베이지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매장에 나왔다. 패션 평론가 히비 도시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구찌가 새로 출시한 모카신 로퍼를 구입하기 위해서라도 로마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라고 쓸 정도로 유행했다. 1969년까지 미국 내 10개 매장에서 ‘모델 350’ 구찌 로퍼 신발은 약 8만40

    2021.08.05 06:00:08

    로퍼, 모조품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미국 중상류층에 ‘신분 상승’ 브랜드로 유명
  • 창립자 구치오, 아들들 간 싸움 붙여…구찌 왕조 쓰라린 가족 분쟁 단초 제공[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구찌③구찌의 창업자인 구치오 구치의 첫째 아들 알도는 미국 뉴욕에 구찌 매장을 열기로 결심했다. 미국인들이 이탈리아 패션에 관심이 높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구찌의 최대 고객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인들은 구찌의 수제 가죽 가방과 신발 액세서리 스타일을 특히 좋아했다.알도는 아버지 구치오에게 뉴욕 매장을 열자고 재촉했다. 구치오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은행에서 대출해 돈을 대줬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뉴욕에 가려면 로마, 파리, 보스턴을 거쳐 가야 해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알도는 뉴욕에서 프랭크 듀건 변호사를 만나 초기 자본금 6000달러를 들여 미국 최초의 구찌 법인 구찌숍스 주식회사를 세웠다.미국 법인은 구찌 상표를 이탈리아 바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됐다. 그 후 설립된 구찌의 해외영업 법인은 모두 프랜차이즈였다. 알도는 피렌체에 있는 아버지 구치오에게 새로 만든 미국법인의 명예 대표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에 매장을 내는 것 자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는 격분했다. “이 정신 나간 것들, 당장 집으로 돌아와”라고 답신을 보냈다. 그는 아들들이 어리석고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다며 질타했다.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며 무모한 계획을 계속 추진하면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알도는 아버지의 걱정과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오히려 연로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뉴욕으로 모셔와 매장을 보여줬다. 매장을 둘러본 구치오는 오히려 기뻐했다. 흥분해 그곳이 마치 자신의 계획

    2021.07.18 06:18:02

    창립자 구치오, 아들들 간 싸움 붙여…구찌 왕조 쓰라린 가족 분쟁 단초 제공[명품 이야기]
  • 48가지 색상 실크 스카프 대성공…80년 넘게 이어져[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에르메스②3대 에밀 에르메스는 과거에 애착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에 대한 열정도 강했다. 따라서 그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장인들을 영입했고 1925년 처음으로 남성용 의류와 골프 재킷을 만들었다. 에르메스는 1927년 주얼리를 선보였고 이듬해 시계와 샌들을 출시했다. 그에게는 딸 4명이 있었고 사위들에게 사업을 물려줬다.이들 중 로베르 뒤마(사진)가 에밀 에르메스의 뒤를 이어 4대 에르메스 가업을 이어 받았다. 활동적인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던 에르메스는 군인들이 지령이나 지도를 프린트해 사용하는 제품을 1920년대부터 여성복 라인에 선보였다. 1937년 로베르 뒤마는 마들린~바스티유 간 파리 버스 노선 개통을 기념해 파리 버스와 노선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가로세로 90cm 정사각형의 ‘주 데 옴니버스 에 담 블랑쉬(사진)’라고 불리는 실크 스카프를 최초로 만들었다.뒤마는 당시 유명했던 실크 기술공들이 많은 리옹 지역에서 여성들을 위한 90cm 정사각형의 실크 스카프를 만들었다. 정사각형을 프랑스어로 까레(carre)라고 하며 에르메스 스카프는 정사각형을 기반으로 제작돼 80년 넘게 이어져 에르메스 까레라고 불린다. 기본 스타일의 스카프는 90×90cm, 가브로쉬는 50×50cm, 숄은 140×140cm로 만들어졌고 까레 출시 70주년을 맞아 70×70cm 크기도 출시됐다. 에르메스 스카프는 1년에 두 번의 새로운 디자인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에르메스 스카프는 일반 스카프보다 두께감이 두터운 특징이 있다. 최초의 목각판 인쇄 방식에서 1947년부터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변경해 사용하고 있다.마차·경마·달 탐험 등 그 시대상

    2021.06.01 15:18:15

    48가지 색상 실크 스카프 대성공…80년 넘게 이어져[명품 이야기]
  • ‘새들 스티치’ 기법, ‘명품 에르메스’ 탄생 원동력[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에르메스①명품에도 등급이 있다. 에르메스는 명품 중 최고 상위에 올라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르메스는 루이비통과 샤넬 등 다른 명품들과 같이 19세기에 탄생했다는 점은 비슷하다. 루이비통이나 샤넬과 다른 점은 창업자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에르메스를 지켜 왔다는 것이다. 에르메스의 창업자는 티에리 에르메스다.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1801년 프로이센 왕국의 크레펠트 지역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은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의 주축이 된다. 하지만 에르메스가 태어날 시기엔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에르메스의 부모는 숙박업을 했다. 에르메스는 15세 때 전쟁과 병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설과 부모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갔다는 설이 있다. 파리로 간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시점도 21세 때인지, 28세 때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패션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가 된 에르메스는 말 안장 등 마구 용품을 만드는 데서 출발했다. 가죽 용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섬세하고 튼튼한 박음질이다. 이 박음질이 마구 용품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안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전통 수공 박음질 기술을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라고 한다(사진 참조). 또 가죽 제품에선 잘라진 단면을 광택으로 처리하는 기술도 매우 중요한데 이 또한 마구 용품을 만드는 기술에서 비롯됐다. ‘새들 스티치’, 말안장 만드는 전통 수공 박음질 ‘튼튼’새들 스티치는 밀랍을 입힌 하나의 실로 시작한다. 실 양쪽 끝을 바늘에 꿰어 두 개의 바늘을 이용해 겹쳐진 두 장의 가죽을 손으로 꿰매는 박음질로,

    2021.05.02 06:17:01

    ‘새들 스티치’ 기법, ‘명품 에르메스’ 탄생 원동력[명품 이야기]
  • 망명 뒤 복귀 패션쇼, ‘대반전’…코코 샤넬, 마지막 불꽃 태우다

    [명품 이야기] 샤넬⑦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한 뒤 코코 샤넬은 1944년 9월부터 독일인 연인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함께 스위스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생활비는 넉넉했다. 샤넬 넘버 파이브(N°5) 판매로 얻은 수익금을 스위스 은행에 예탁해 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스위스의 호화 호텔을 전전했다.  당시 세계 패션계에 등장한 새로운 사조는 ‘뉴룩(New Look)’이었다. 샤넬도 스위스 신문에 새로 등장한 이 단어를 접했다. 뉴룩은 세계 패션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재킷은 가는 허리선을 강조했고 스커트는 폭 넓은 플레어 스타일이 뉴룩의 특징이었다. 이런 스타일이 뉴룩이 된 것은 미국 패션 전문지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 크리스티안 디오르의 패션쇼를 보고 “이츠 어 뉴룩(It’s a New Look)”이라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파리의 패션이 유능한 한 디자이너 덕분에 전쟁의 상흔을 딛고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뉴룩 스타일은 시대가 요구하는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당시 크리스티안 디오르는 마흔두 살이었다. 그가 만든 뉴룩은 참혹한 전쟁을 거친 유럽에 낙천주의라는 새 사조를 열었다. 여성들은 중성적이고 단순한 스타일의 패션에서 벗어나 다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폭이 15m나 되는 플레어 스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옷감이 소요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패션 여왕 귀환, “샤넬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겠다” 샤넬은 약 9년간의 스위스 망명을 끝내고 1953년 파리로 돌아왔다. 일흔 살의 패션 여왕의 귀환은 당연히 화제가 됐다. 샤넬이 파리로 돌아오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샤넬 향수 회사를 함께

    2021.04.23 06:56:02

    망명 뒤 복귀 패션쇼, ‘대반전’…코코 샤넬, 마지막 불꽃 태우다
  •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한 샤넬…1차 대전 터지면서 간편 여성 유니폼 인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샤넬③1913년 유럽엔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4년간 지속된 1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에 터를 잡기 시작한 샤넬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다. 샤넬은 당시 유럽과 러시아에 퍼진 계급 투쟁도 안중에 없었다. 사넬은 의지와 뜻이 있으면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더라도 누구나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치부했다.전쟁의 기운과 계급 투쟁 분위기의 확산 등으로 인해 사회가 뒤숭숭해지자 샤넬의 연인 보이 카펠은 당분간 안전한 장소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샤넬에게 권했다. 샤넬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칼바도스 해안에 있는 도시 도빌로 갔다. 도빌은 영국과 마주하고 있다. 급박해지면 영국으로 건너가기 좋은 곳이다. 샤넬과 카펠은 1913년 초여름 도빌의 초호화 호텔인 ‘노르망디’의 특실에 짐을 풀었다. 도빌은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이 도시는 19세기 중반에 조성됐다. 농토·목초지·모래 언덕이었던 곳에 온천 단지가 들어섰다. 사우나·해수탕·담수탕을 구비한 휴양 시설이 건설됐다. 경마장·폴로경기장·비행장·카지노도 건설되면서 프랑스 상류층을 끌어들였다. 파리에서 200km밖에 떨어지지 않아 ‘파리의 해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샤넬과 카펠은 도빌에서 여름휴가만을 즐기지 않았다. 1910년 파리 캉봉가에 ‘샤넬 모드(CHANEL MODE)’를 열어 큰 성공

    2021.02.26 06:12:01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한 샤넬…1차 대전 터지면서 간편 여성 유니폼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