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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라가모, 신발 디자인에 인체 해부학 처음으로 접목[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살바토레 페라가모①“이탈리아 남부의 항구 도시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차를 몰고 가면 들어가는 길 말고는 나오는 길이 따로 없는 한 외딴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보니토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자서전 ‘꿈을 꾸는 구두장이’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페라가모는 1898년 14남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학교는 아홉 살까지만 다닐 수 있었고 집 근처의 구두 가게는 그에게 늘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구두장이가 작업하는 모습을 즐겨 봤던 페라가모는 아홉 살이 되던 해 성찬식에서 신을 신발이 없는 여동생을 위해 처음으로 하얀 구두를 만들었다. 열한 살이 되던 1909년 페라가모는 나폴리의 한 구두 가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게 됐다. 2년 후 열세 살이 되던 해 페라가모는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집 한쪽에 여성용 맞춤 구두 가게를 열었다. 가난한 집안 일으키기 위해 형제들과 미국행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일하던 형의 권유로 1914년 열여섯 살 때 페라가모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형제들과 함께 미국 보스턴으로 가는 배를 탔다. 미국에 간 페라가모는 큰 신발 공장에 취업했고 거대한 기계들이 있는 미국 공장은 나폴리의 구두 공장과 많이 달랐다.하지만 그는 곧 기계로 생산하는 신발의 품질에 한계를 느꼈다. 페라가모는 형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구두 제조 및 수선점을 열었다. 아메리칸필름컴퍼니라는 영화 스튜디오 바로 옆이었다. 페라가모는 아메리칸필름컴퍼니에 카우보이 부츠를 납품하게 된 것을 계기로 영화 소품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구두를 제작해 납품하기 시작했다.

    2023.05.23 10:15:36

    페라가모, 신발 디자인에 인체 해부학 처음으로 접목[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단 네 명만 차봤던 티파니의 128캐럿 다이아몬드 목걸이[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티파니③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착용했던 리본 로제트 노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128.54캐럿짜리다. 지금까지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사람은 네 명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포스터에서 헵번이 이 노란 다이아몬드를 선보였고 다른 한 명은 미국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린 마리 화이트하우스 부인이다. 그녀는 1957년 미국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에서 열린 티파니 무도회에서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했다. 가수 비욘세와 레이디 가가도 이 목걸이를 착용했다. 레이디 가가는 2019년 오스카 시상식 행사 때 이 목걸이를 하고 나와 주목 받았다. 1878년 남아프리카의 킴벌리 광산에서 발견된 287.42캐럿의 이 노란 다이아몬드는 티파니 창업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매입한 것이다. 당시 남아프리카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킴벌리 광산의 흑인 노동자들은 끔찍한 노동 조건과 열악한 임금을 견뎌야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티파니가 사들인 다이아몬드는 티파니의 수석 보석학자인 조지 프레드릭 쿤츠 박사가 1년간 연구한 끝에 128.54캐럿의 쿠션 브릴리언트 컷으로 탄생했다.쿤츠 박사는 노란 다이아몬드 본연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사이즈가 절반 이상이 줄어드는 손실을 감수하고 총 82면으로 커팅했다. 마치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고 표현될 정도로 최고의 광채를 만들어 냈다. 1955년 뉴욕 5번가에 있는 티파니 플래그 스토어의 윈도에 전시됐을 때는 길 건너편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것이 보일 정도의 광택이 나 지나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최고의 시설·전문가로

    2023.03.24 10:39:03

    단 네 명만 차봤던 티파니의 128캐럿 다이아몬드 목걸이[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비트코인이 돈인가요?” 돈에 대한 잡다한 지식 [이정흔의 쉬운 경제]

    [이정흔의 쉬운 경제][편집자 주 = 매일 수많은 경제 기사가 쏟아집니다. 수많은 기사를 읽고 나면 경제 이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더’ 들어가면 잘 모르는 경제 지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고백하자면, 기자 또한 늘 경제 뉴스를 작성하고 접하고 살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반성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 대부분은 학교에서 기초적인 경제 지식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실제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경제’를 읽어 내려면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진짜 경제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시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복잡한 경제 이슈와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경제 지식부터 공부해 보기로 말입니다. 어렵게만 보이는 경제를 가장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찾은 답은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경제학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한 대목을, 때로는 경제학에 큰 획을 그은 경제학자들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로 ‘오늘의 경제’를 알아가 보고자 합니다. 하루 딱 10분, 경제 공부를 함께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애초에 저는 비트코인이 어떻게 돈이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2010년 한 사람이 비트코인으로 피자를 사는 데 성공해요.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인데, 처음으로 비트코인을 ‘실제 물건’과 거래한 거죠.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도 비트코인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요.”지난해 독서 모임 ‘트레바리’에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가

    2023.01.24 06:00:09

    “비트코인이 돈인가요?” 돈에 대한 잡다한 지식 [이정흔의 쉬운 경제]
  • 루피니, 유명 브랜드와 협업 몽클레르 재해석[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몽클레르 ③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가 2022년 12월 12일 세계 갑부 순위에서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회장이 1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이전까지 세계 1위인 엘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제친 것이다. 아르노 회장은 1708억 달러(약 223조5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해 1640억 달러(약 214조5700억원)인 머스크 CEO보다 약 70억 달러 많았다.  테크(기술) 기업이 아닌 명품 브랜드의 CEO가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됐다는 사실은 패션업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필자로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세계 최고의 부자로 인식하고 자란 필자로서는 명품 브랜드의 수장이 최고 부자에 등극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유수의 브랜드를 차곡차곡 모아 명품 제국을 형성한 아르노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때론 거센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브랜드 인수 후 파격적인 혁신을 꾀하는 그의 경영 방식은 높이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패딩계의 명품이라고 불리는 몽클레르 또한 머지않아 LVMH에 인수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르노 회장은 명품 브랜드를 인수한 후 브랜드 리뉴얼 작업을 단행한다. 그런 방식을 통해 해마다 가격을 조금씩 올린다. 그런 그의 경영 스타일을 보면 소비자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명품업계는 이렇게 다른 어떤 분야보다 M&A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시장을 뒤흔들곤 한다. 몽클레르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레모 루피니는 2003년 몽클레르를 인수한 뒤 CEO와

    2022.12.23 10:49:37

    루피니, 유명 브랜드와 협업 몽클레르 재해석[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프랑스식 우아함·순수함·심플함으로 명성 얻어[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지방시 ②지방시는 1952년 첫 컬렉션의 성공으로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인 샤넬·에르메스·루이뷔통 등과 같은 반열에 오르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1954년 패션계의 최대 뉴스는 샤넬의 컴백이었다. 하지만 샤넬은 크리스찬 디올의 명성에 가려져 디올이 사망(1957년)하고서야 정상에 오르게 된다. 샤넬의 패션 철학이 편안함과 실용성에 바탕을 둔 기능주의를 표현하고 있었다면 지방시의 스타일은 깨끗한 라인으로 표현되는 최고급 원단을 사용해 지극히 매혹적인 프랑스식 우아함과 순수함·심플함으로 명성을 얻었다.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발렌시아가는 지방시에게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1953년 미국 뉴욕의 한 파티에서 만났을 때 지방시는 젊은 디자이너에 불과했고 발렌시아가는 지방시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디자인을 연구하기도 했고 발렌시아가의 컬렉션 피팅에 조수로 참여해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 출신의 발렌시아가는 당시 이미 오트 쿠튀르의 유능한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렸다. 발렌시아가는 커팅 기술과 색채 감각이 뛰어났고 그의 패션 작품에는 늘 창의성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디올이 장식을 배제한 소재의 특성을 살려 다트·턱·주름으로 신체의 자연미를 살린 기능적인 조형미와 낭만에 대한 여성의 도피적 갈망을 표현했다면 발렌시아가의 의상은 모던한 매력을 풍겼다. 발렌시아가는 자신이 추구한 심플한 라인의 의복으로 장인으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그

    2022.10.04 14:14:23

    프랑스식 우아함·순수함·심플함으로 명성 얻어[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디올 매출 4배 키운 ‘패션의 혁명가’ 존 갈리아노[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크리스찬 디올 ⑤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난 뒤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수석 자리를 물려받아 트라페즈 라인을 발표했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이 파리를 구했다”는 칭송을 받았고 1960년 봄여름 컬렉션은 디올 하우스의 컬렉션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960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거리의 청소년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담한 비트룩은 우아한 디올 라인을 선호하는 고객들에게 외면당했다. 결국 디올의 경영진은 로랑을 해고했다.이후 로랑은 평생의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자신의 브랜드인 이브 생 로랑을 론칭했다. 로랑에 이어 마크 보앙이 28년간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남성 향수, 아동복, 남성복 라인을 발표해 최장수 디올의 수석 자리를 지켰다. 이어 이탈리아 출신의 지안프랑코 페레는 디올이 LVMH그룹에 인수된 후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직접 선정한 수석 디자이너다.지방시 이어 디올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페레는 슈트의 건축학적 우아함과 웅장한 이브닝 드레스의 화려함을 통해 오트 쿠튀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고 ‘남성 모티브’를 디올 여성 옷에 재도입했다. 페레는 “과장된 칼라, 소매 및 리본은 단순한 의상을 완전하고 독특하며 뛰어난 앙상블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페레에 이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영국 출신의 ‘패션계의 악동’, ‘로맨틱의 영웅’, ‘패션계의 천재’라는 수식어로 유명한 존 갈리아노가 차지했다. 1984년 갈리아노는 런던의 패션스쿨 세인트 마틴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 패션쇼에서 8벌의 유니섹스 룩으

    2022.06.04 06:00:03

    디올 매출 4배 키운 ‘패션의 혁명가’ 존 갈리아노[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디올 장례식에서 평생의 동성 연인 베르제 만나[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이브 생 로랑②이브 생 로랑은 1957년 10월 30일 크리스찬 디올의 장례식에서 평생의 파트너이자 동성 연인 피에르 베르제 서점 중개인을 만났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이 군 병원에서 약물에 취해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크리스찬 디올이 수석 디자이너를 이브 생 로랑에서 마크 보앙으로 교체했을 때 디올 하우스를 상대로 1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다지이너에서 해고됐을 때 베르제에게 “그렇다면 우리 함께 회사를 만들자. 경영은 당신이 맡는 거야”라고 말했다. 베르제는 자금을 모으느라 동분서주한 끝에 미국인 투자자 제스 마크 로빈슨에게 투자를 받았다. 이브 생 로랑과 베르제는 1961년 12월 ‘이브 생 로랑 퀴트르 하우스’를 설립했다.1962년 1월 29일 이브 생 로랑은 베르제의 도움으로 스폰티니 거리의 어느 저택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피 재킷( 엉덩이 길이의 직선적인 코트로 더블 여밈이 특징)’과 바지, ‘튜닉(그리스·로마 시대에 착용된 통자 스타일의 무릎 정도 길이에 장식이 거의 없는 느슨한 의복)’이 대성공을 거뒀다.미국 잡지 라이프는 “이브 생 로랑은 샤넬 이후 최고의 슈트 메이커”라고 평가했다. 1963년 아티스트 카산드라는 이브 생 로랑의 이니셜을 사용해 로고를 만들었다. 이 로고는 오늘날 향수·코스메틱·액세서리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이브 생 로랑의 핵심적 이미지가 됐다. 브랜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이브 생 로랑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다.턱시도 ‘르 스모킹’, 트레이드마크 돼이브 생 로랑

    2022.01.09 06:00:32

    디올 장례식에서 평생의 동성 연인 베르제 만나[명품 이야기]
  • 기계식 시계 덕후의 오리스 예찬

    최순(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기계식 시계를 좋아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정확한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전자시계의 그러한 면을 존중해왔다. 어쩌면 전자시계 이외의 대안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시계는 시간을 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전자시계를 차면 될 일이며, 하물며 내겐 스마트폰까지 있지 않은가.그랬던 내가 우연히 접하게 된 기계식 시계의 세계는 일종의 ‘낭만’이었다. 호캉스와 캠핑의 차이라고나 할까? 편리함과 익숙함을 뒤로 한 채 존재의 근원에 다가간 느낌, 불편함을 감수해도 좋을 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그 무엇. 나는 그것을 ‘기계식 시계의 낭만’이라 칭하며 나의 삶 속으로 기꺼이 초대했다.기계식 시계를 차면 일단 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좋다. 진료를 하거나 연구할 때도 손목을 누르는 그 묵직한 존재감은 늘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누군가’는 비록 홀로 서랍에 며칠 놔두면 멈춰버리기도 하는 예민한 성정을 지녔지만, 그것마저 생명이 있는 존재인 양 느껴져 좋았다. 특유의 시계 소리도 좋고, 내가 열심히 움직이며 일하는 동안 이 친구도 보다 완벽한 시계로서의 역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긴긴 밤 연구에 몰두할 때마다 위안이 되기도 한다.기계식 시계의 낭만에 젖어 들며 ‘오리스’라는 브랜드를 알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 분야에 정통한 한 지인은 나의 첫 기계식 시계를 오리스에서 골라보라 조언했고, 나 역시 기계식 시계만 생산하는 독립 브랜드인 데다 입문용으로 적당한 가격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가 가

    2021.07.30 17:03:57

    기계식 시계 덕후의 오리스 예찬
  •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한 샤넬…1차 대전 터지면서 간편 여성 유니폼 인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샤넬③1913년 유럽엔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4년간 지속된 1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에 터를 잡기 시작한 샤넬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다. 샤넬은 당시 유럽과 러시아에 퍼진 계급 투쟁도 안중에 없었다. 사넬은 의지와 뜻이 있으면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더라도 누구나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치부했다.전쟁의 기운과 계급 투쟁 분위기의 확산 등으로 인해 사회가 뒤숭숭해지자 샤넬의 연인 보이 카펠은 당분간 안전한 장소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샤넬에게 권했다. 샤넬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칼바도스 해안에 있는 도시 도빌로 갔다. 도빌은 영국과 마주하고 있다. 급박해지면 영국으로 건너가기 좋은 곳이다. 샤넬과 카펠은 1913년 초여름 도빌의 초호화 호텔인 ‘노르망디’의 특실에 짐을 풀었다. 도빌은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이 도시는 19세기 중반에 조성됐다. 농토·목초지·모래 언덕이었던 곳에 온천 단지가 들어섰다. 사우나·해수탕·담수탕을 구비한 휴양 시설이 건설됐다. 경마장·폴로경기장·비행장·카지노도 건설되면서 프랑스 상류층을 끌어들였다. 파리에서 200km밖에 떨어지지 않아 ‘파리의 해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샤넬과 카펠은 도빌에서 여름휴가만을 즐기지 않았다. 1910년 파리 캉봉가에 ‘샤넬 모드(CHANEL MODE)’를 열어 큰 성공

    2021.02.26 06:12:01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한 샤넬…1차 대전 터지면서 간편 여성 유니폼 인기
  • [명품 이야기]샤넬, 바느질하며 꿈꿨던 가수의 길 접고 패션의 길 열다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샤넬②코코 샤넬은 1905년 스물두 살 때 좀 더 큰 도시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물랭을 떠나 약 50km 떨어진 비시로 갔다. 물랭은 군사 도시였고 비시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휴양 도시였다. 예술가들의 도시이자 휴양 도시에서 샤넬은 외국어를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작은 방을 얻어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교습비를 내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바느질을 했다.잠을 아끼고 이를 악물고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선생님에게서 받은 평가는 절망적이었다. 선생님은 “새처럼 목소리가 가는 데다 표정이란 게 전혀 없다”며 “게다가 너무 말라 뼈밖에 보이지 않아 차라리 바느질이나 하는 편이 낫겠다”고 혹평했다. 샤넬에게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가수의 꿈을 접었다.샤넬은 비시의 온천 휴양지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하얀 복장을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온천에서 나는 약수를 길어 유리잔에 부은 뒤 휴양객들에게 건네는 일을 했다.그는 그 무렵 그의 인생에서 첫 연인 에티엔 발장과 사귀고 있었다. 샤넬은 발장과 경마장에 자주 들렀고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 있다니…”라며 감탄했다. 발장은 그런 샤넬의 요구를 채워 줄 재력이 됐다. 그는 샤넬에게 콩피에뉴에 말 사육장을 갖고 있다며 원한다면 그곳에 함께 가자고 샤넬에게 제안했다. 샤넬은 발장을 따라 프랑스 북부 도시 콩피에뉴로 갔다.도빌 샤넬 매장 앞에서 샤넬(가운데 서 있는 여성)과 연인 아서 카펠(샤넬 왼쪽).첫 연인 갑부 발장 따라 경마장 딸린 성으로발장의 부모는 직조 산업으로 유명한 생에티엔 출신으로, 대대로 운영해 온 섬유 공장을

    2021.02.06 08:50:03

    [명품 이야기]샤넬, 바느질하며 꿈꿨던 가수의 길 접고 패션의 길 열다
  • 마스크 쓰면 더 느껴지는 입냄새, 어떻게 치료할까

    [김현종의 건치 이야기]예전에는 봄에 황사가 와도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함께하는 지금 마스크 없이는 집 밖에 나올 수도 없는 필수품이 됐다.마스크를 매일 쓰면서 보통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입냄새가 많이 느껴져서인지 최근에는 입냄새, 즉 구취가 난다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본 제품 중 신기한 것은 마스크에 붙이는 향기 나는 방향제다. 마스크 윗면에 붙이면 쿨한 민트 향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느껴질 것 같은 제품이다. 아마도 마스크를 쓰면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만큼 크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예전에는 구취를 줄여 주는 스프레이 제품도 많이 사용됐다. 스스로 입냄새가 느껴져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까봐 걱정돼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은 목욕을 하지 않고 향수만 쓰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켜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다.구강 내에 뿌리는 스프레이 제품은 알코올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너무 자주 사용하면 입안이 상쾌해지기는 하지만 구강 내에 소타액선의 위축으로 오히려 침이 잘 나오지 않거나 구강 내에 세균이 줄어들면서 반대로 곰팡이류인 진균이 늘어나 혀가 검게 변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먼저 비정상적인 입냄새인지 알아봐야구취가 느껴진다면 일차적으로는 병원을 찾아가 구취를 측정하는 장비로 입냄새에 대한 검사를 진행하는 것이 방법이다. 구취 측정기라는 장비는 숨을 쉴 때 그리고 입안의 공기 중에 좋지 않은 향을 가지는 황화합물이나 암모니아 성분을 측정해 실제로 입안에서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2021.02.04 08:40:50

    마스크 쓰면 더 느껴지는 입냄새, 어떻게 치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