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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드밀라 코트, 전 세계 여성들 사랑 받아[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막스마라② 미국의 사진작가 윌리엄 웨그먼은 반려견을 의인화해 사진을 찍어 1970년대 미국 서부의 개념 미술을 이끈 인물이다. 그의 반려견 만 레이는 독일에서 개량된 와이머라너 개의 한 품종이고 회색의 짧고 매끈한 털이 전신을 덮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만 레이라는 강아지 이름은 웨그먼이 가장 존경하는 사진작가 만 레이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한다. 웨그먼은 반려견 만 레이에게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교감 훈련을 오랫동안 했다. 그 결과 반려견 만 레이는 사람처럼 슬픔·기쁨·우울함 등 많은 표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반려견 만 레이는 인간처럼 표정을 짓고 몸은 인간이 옷을 입은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필자가 사진 공부를 할 때 본 웨그먼의 사진에서 만 레이는 사람처럼 공허한 눈빛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웨그먼의 작품 세계에 감동한 적이 있다. 웨그먼은 아크네·샤넬·이브생로랑 등 많은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했다. 그중에서도 2001년 막스막라의 코트를 입은 만 레이 사진이 인상적이다(사진①). 깔끔한 스타일에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한 막스마라의 코트는 현대적 감성을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커리어 우먼에게 잘 어울린다. 막스마라 코트는 크게 4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01801 코트는 프랑스 출신의 디자이너 앤 마리 베레타가 1981년 트렌치코트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고 출시 직후부터 전 세계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 받았다. 101801 코트(사진②)는 일명 마담 코트라고도 하며 허리를 죄는 벨트가 없는 오버사이즈 핏, 톱니바퀴의 라펠로 다소 남성적인 느낌이 나는 더블 버튼 여밈의 코트다. 기모노 스타일의 소매에 막스

    2023.09.26 12:14:14

    루드밀라 코트, 전 세계 여성들 사랑 받아[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슬로건, ‘도시 여성의 지적 삶의 표현’ 내걸어[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막스마라① 최근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라는 조용한 럭셔리, 즉 가치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럭셔리가 인기다. 올드머니룩(old money look)도 같은 맥락이다. 올드 머니는 집안 대대로 상속으로 물려받은 재산을 뜻한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심플한 디자인으로 부를 과시하지 않으면서 상류층의 럭셔리한 스타일을 표현하는 것을 ‘올드머니룩’이라고 한다.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시절 패션 리더들은 과감한 노출 패션, 로고와 모노그램으로 장식된 옷과 가방으로 과시형 소비 형태를 보였다면 팬데믹 이후 패션 리더들은 조용한 럭셔리 스타일을 표방하고 있다. 그들은 로고를 최소화하고 고급스러운 소재와 무채색에 가까운 모노톤의 색상을 사용해 럭셔리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고급스러운 캐시미어·캐멀·알파카 소재의 막스마라 코트는 올드머니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제품 중 하나다. 막스마라는 1951년 아킬레 마라모티가 ‘도시 여성의 지적인 삶의 표현’이라는 슬로건으로 창업했다. 아킬레 마라모티는 이탈리아에서 대대로 옷을 만드는 가정에서 1927년 1월 태어났다. 그의 증조모는 1850년 레지오 에밀리아 시내 중심에서 의류 매장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패턴 제작을 가르치는 양재학원을 운영했으며 ‘재단의 기술’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고급 소재·편안한 재단, 이탈리아 감성 표현의류 제작 과정을 보면서 자란 그는 로마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파르마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스위스에 있는 레인코트를 만드는 회사에 취업했지만 어려서부터의 꿈인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24세

    2023.09.13 12:27:59

    슬로건, ‘도시 여성의 지적 삶의 표현’ 내걸어[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장인정신, 펜디 지탱하는 또 하나의 힘[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펜디② 1925년 창업한 펜디는 올해로 98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 역사에서 칼 라거펠트는 펜디와 54년을 함께했다. 펜디는 라거펠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65년 펜디의 다섯 자매가 라거펠트를 모피 디자이너로 임명하면서부터 펜디의 모피 제품은 기존의 고정 관념을 바꿨고 가볍고 패셔너블한 제품으로 독특한 차별성을 가지게 됐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은 그들만의 헤리티지로 소비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 오고 있다. 20세기 중반 기성복 패션이 활성화되면서 ‘오트 쿠튀르(상류층인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고급 옷을 만드는 의상실)’ 중심의 기존 패션 하우스들의 활동이 주춤해지고 디자이너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창업자가 아닌 디자이너가 패션 하우스를 책임지게 되면서 외부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시도가 이뤄진 것이다.패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브랜드와 디자이너 수도 증가하고 다양화되고 있다. 수많은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은 선의의 경쟁을 하며 현대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그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고 만족감을 높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핵심 고민을 하는 주체로서 패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량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칼 라거펠트, 가장 성공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민감한 소비자의 감성이 패션 시장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오래된 전통성을 가지고 명성을 유지해 오던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들은 그들만의 헤리티지를 발전시켜 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게 됐다. 이러한 패션 시장의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최고

    2023.09.01 14:11:49

    장인정신, 펜디 지탱하는 또 하나의 힘[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칼 라거펠트 합류, 눈부신 발전·성공 거둬[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펜디①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품 패션 브랜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불리는 후임 디자이너를 발탁해 각 브랜드만의 독특한 차별성과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패션 하우스는 창업 디자이너의 활동 마감 이후 새로운 디자이너를 영입하게 되는데 이는 ‘수석 디자이너’, ‘헤드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로 불리다가 20세기 후반 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디자이너 샤넬 사망 후 칼 라거펠트가 오랫동안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고 크리스찬 디올 타계 이후 디올 하우스를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펜디 또한 라거펠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고 나서 눈부신 발전과 성공을 거뒀다.   1925년 핸드백·모피로 창업, 날로 번창1925년 에르아르도 펜디와 아델 펜디 부부가 로마에서 핸드백과 모피로 펜디를 창업했다. 아델 펜디 부인은 결혼 전 모피와 가죽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를 운영했었다. 펜디 부부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기도 했고 행운도 함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신흥 중산층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핸드 메이드의 고급 제품들을 원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아델 펜디는 마구의 최고 용품을 만드는 장인을 찾아가 펜디를 위해 일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백이 셀러리아백이다. 1925년에 탄생한 셀러리아백은 이탈리아어로 말안장을 제작하는 워크숍을 의미한다. 펜디 부부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펜디의 명성은 1930년대와 1940년대를 거

    2023.08.17 15:29:15

    칼 라거펠트 합류, 눈부신 발전·성공 거둬[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경제학 전공한 배우 지망생 톰 브라운, 디자이너가 되다[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톰 브라운①패션의 아이콘(패션으로 관심을 끌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인 지드래곤(권지용 빅뱅의 멤버 가수)이 한때 톰브라운의 거의 모든 제품을 입어 화제가 됐다. 아마도 패션에 관심이 있는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톰브라운의 회색 4줄 카디건과 엉덩이를 가리지 않는 짧은 길의의 재킷에 짧은 소매, 복사뼈가 보이면서 7cm 정도 접어 올린 짧은 바지의 톰브라운식 슈트 코디네이트 방법을 선호할 것이다. 드라마 ‘펜트 하우스’에서 철없는 부잣집 아들 역의 배우 봉태규 또한 톰브라운 제품을 대거 입고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톰 브라운은 1965년 9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엘렌타운에서 태어났다. 인디애나 주 노터데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988년 배우가 되기 위해 영화의 본고장인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지만 결국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1997년 뉴욕으로 이주해 조르지오 아르마니 쇼룸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게 됐다.  패션 전공하지 않고 디자인 교육도 안 받아정치학을 전공한 미우치아 프라다, 의대를 중태한 조르지오 아르마니처럼 톰 브라운 역시 패션을 전공하지 않고 정식으로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은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디자이너로서의 정식 경력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나와 클럽 모나코로 직장을 옮겨 보조 디자이너로 일한 것이 톰브라운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의 경력의 전부다. 2003년 톰 브라운은 뉴욕시 웨스트빌리지에서 메이드 투 메저(맞춤복)로 운영되는 매장에서 회색 슈트 5벌을 제작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각 재킷과 바지와 함께 회색 카디건과 흰색 옥스퍼드셔츠(약간 도

    2023.08.01 09:37:00

    경제학 전공한 배우 지망생 톰 브라운, 디자이너가 되다[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페라가모, 700년 된 고성(古城)을 할부로 사다[류서영의 명품이야기]

    서영의 명품이야기/살바토레 페라가모②이탈리아 피렌체의 토르나부오니 거리에는 명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아주 멋진 건물이 있는데 바로 페라가모 매장이다. 건물 지하에는 페라가모 박물관이 있고 1층에는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페라가모 건물 ‘팔라초 페로니 스피니(사진 ①)’는 13세기에 지어진 성이다. 이 성을 얻기 위해 창업자 페라가모는 큰 모험을 했다. 페라가모는 자서전에서 팔라초 페로니 스피니를 피렌체에서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팔라초는 ‘행복한 귀한’이라는 뜻의 토르나부오니 거리 한구석, 잔잔히 흐르는 아르노 강변을 보고 서 있다. 이 성은 페로니 가문과 스피니 가문이 각각 소유한 두 개로 돼 있다. 완공된 것은 1289년으로, 지금으로부터 734년 전이다. 성 아래쪽에는 아직도 단테의 연인 베아트리체의 우물이 남아 있다. 헨리 홀리데이가 그린 유명한 그림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나다’라는 작품은 시인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 교각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우물로 가는 길에 친구들과 함께 룽가르노 거리를 지나가는 베아트리체를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 바로 너머 룽가르노 거리 왼쪽에 있는 것이 바로 페로니 스피니 성이다. 미국에서 파산한 페라가모는 페로니 스피니성을 살 처지가 못 됐지만 그 건물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누를 수 없었다. 건물 주인은 페라가모가 파산자였기 때문에 건물의 임대 조건으로 3개월 치 선불과 그것도 모자라 사용하지도 않은 지난 한 달 치의 건물 임대비까지 추가로 요구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조건이었지만 페라가모는 흥정하지 않고 임대 계약서에 사인

    2023.06.04 10:28:58

    페라가모, 700년 된 고성(古城)을 할부로 사다[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종이접기 주름 응용, 패션史에 신선한 혁명[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이세이미야케 ③이세이 미야케는 1993년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를 출시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세계적인 디자이너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일본 전통의 종이접기(오리가미)를 이용한 플리츠(주름)를 패션 디자인에 응용했고 이는 실험적이었다.현재까지 플리츠 플리즈는 패션 역사에 신선한 혁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세이 미야케는 ‘옷을 입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자 했고 인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방법을 찾고자 했으며 그 방법은 최소한의 재단으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을 패션 철학으로 생각했다. ‘플리츠 플리즈’는 폴리에스터 원단을 사용해 섬세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을 30톤의 압력과 열처리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MDS)를 함께 열었던 소재 감독인 마키코 미나가와와 일본 텍스타일 공장과의 오랜 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르고, 열을 가하고, 누르고, 태우고, 용액에 담그는 등 30년 동안이나 옷과 소재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다. 이런 이세이 미야케의 행보는 아티스트로서의 한 특징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플리츠 플리즈로 아방가르드 반열 올라‘플리츠 플리즈’ 라인은 구김이 없이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고 대부분의 의상들은 단추·지퍼·스냅 등이 없이 디자인됐고 가볍고 세탁이 편리하며 활동성이 좋은 특징이 있다. 또한 가벼우면서 구김이 없어 여행할 때 돌돌 말아 가방에 구겨 넣고 다녀도 불편함이 없고(사진①)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몸판에 절개가 있거나 소매가 조이거나 허리선이 잘룩하게 들어가는 스타일

    2023.05.11 09:39:13

    종이접기 주름 응용, 패션史에 신선한 혁명[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이세이 미야케, 일본과 서양 전통 결합 새 조형미 창조[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이세이미야케②조형(造形)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구체적인 형태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패션에서 조형은 무엇일까. 패션에서 형태와 형상은 어떻게 표현할까. 패션에서 형(形)은 단순히 형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의미와 상징이고 인간의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복식 디자인에서는 선·형태·색채·소재·문양 등이 조형 요소가 된다. 복식에서 조형 요소들은 우리의 신체에 밀접하게 관련된 환경이고 일상생활과도 관련돼 있다. 그런 점에서 생활 조형으로 분류되며 복식이 조형 예술의 한 분야로 취급되기도 한다.이세이 미야케 작품의 조형성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복식에 나타나고 있는 조형 요소를 토대로 하는 평면 재단과 직선적인 라인, 레이어드(layered)에 의한 착장법, 빅 룩(big look), 무채색 컬러, 소재 등이다. 이렇듯 일본 전통 복식의 조형적 특징들이 이세이 미야케 작품에서 단순히 활용된다는 측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의 창조와 함께 일본 전통 복식의 조형성과 서양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조형미를 만들어 현대 패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일본의 사상가인 야나기 무네요시(일본의 민예 연구가이면서 미술 평론가)는 중국을 형(形)의 예술, 한국을 선(線)의 예술, 일본을 색(色)의 예술이라며 일본 예술에서 색의 미적 특징을 강조했다. 일본 전통 복식에서의 가장 특색 있는 미적 감각은 바로 색을 겹쳐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레이어드에 의한 배색미’라고 했다.일반적으로 동양의 복식은 여러 겹의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드 착장 방식이 보편화돼 있

    2023.04.25 13:59:13

    이세이 미야케, 일본과 서양 전통 결합 새 조형미 창조[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이세이미야케 검은색 티셔츠 평생 입은 잡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이세이미야케①2023년 3월 17일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동행했던 김건희 여사는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만났다. 안도 다다오 건축가는 제주도 휘닉스 아일랜드 내에 있는 글라스 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 건축물, 제주도 본테 미술관, 원주 한솔 뮤지엄 산을 건축한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일본 건축가다.그는 이날 김 여사에게 이세이미야케 옷을 선물했다(사진①). 이에 김 여사는 “패션도 건축이다”라고 말했다. 안도 건축가는 “이세이미야케의 옷은 정말 건축적”이라며 “이세이 미야케는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안도 건축가는 이세이 미야케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이고 자신의 50년 친구라고 소개했다. 이세이미야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세상을 뒤바꾼 테크놀로지의 선두자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발표회 때 입은 검은색 반목넥 티셔츠 때문이다. 잡스는 이세이미야케의 검은색 반목넥 티셔츠와 리바이스 501 청바지, 뉴발란스 992 운동화로 자신만의 아이텐티티를 만들었다.1968년 파리 혁명과 실험 예술·히피 영향 받아 잡스 창업자는 1980년 초 일본을 방문했을 때 소니 직원들의 유니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잡스 창업자는 모리타 아키오 전 소니 회장이 “유니폼이 회사 직원들을 단결해 주는 수단”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애플 직원들에게도 유니폼을 입힐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소니 유니폼을 만들었던 이세이미야케에 연락해 유니폼 제작을 의뢰했다.하지만 애플 직원들은 유니폼 입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때문에 잡스 창업자는 혼자만이라도

    2023.04.12 17:18:47

    이세이미야케 검은색 티셔츠 평생 입은 잡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티파니 ‘스테인드글라스’ 사랑한 스티브 잡스[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티파니②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거실에는 2개의 예술 작품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의 ‘시에라 네바다의 겨울 일출’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 스탠드’다. ‘시에라 네바다의 겨울 일출’은 눈 덮인 시에라 산맥 위로 여명이 밝아오는 모습 속에 동물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고개를 숙인 장면을 찍은 것이다. 흑백 사진 속에 밝고 어두움, 웅장함,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이 사진은 미국의 대표적 풍경 사진 작가인 애덤스가 그의 딸을 위해 선물한 거대한 사이즈의 사진이다. 후에 애덤스의 딸은 이 사진을 잡스에게 판매했다. 잡스가 이 사진을 얼마나 애착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잡스의 가사 도우미가 이 사진을 물걸레로 닦자 잡스는 사진의 레이어를 벗겨 내고 애덤스와 프린트 작업을 했던 사람을 수소문해 사진 복원을 맡길 정도였다. 잡스의 티파니 유리 제품에 대한 애착도 유별났다. 잡스는 어느 날 자신과 함께 일하는 팀을 데리고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의 유리 제품 전시회를 보러 미국 뉴욕 맨해튼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을 정도였다. ◆실내 장식·유리 작품 디자이너로 명성 날려티파니는 창업자 찰스 루이스가 1902년 사망한 뒤 둘째 아들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가 회사를 이어 받으면서 많은 변화들을 겪게 된다. 루이스 티파니는 1848년 2월 태어났다. 그가 출생하던 해에 아버지의 회사인 티파니앤드컴퍼니는 보석 장신구를 제작하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사업은 찰스 티파니에게 국제적 명성과 막대한 부를 가져다줬다. 찰스 티파니는 그

    2023.03.10 14:48:53

    티파니 ‘스테인드글라스’ 사랑한 스티브 잡스[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1848년 프랑스 혁명으로 쏟아져 나온 귀족들의 보석을 사들인 그는?[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티파니①1961년 상영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인 홀리 고라이틀리(오드리 헵번 분)가 선글라스를 끼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든 채 뉴욕 5번가 티파니 쇼윈도를 바라보는 모습은 지금도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티파니는 모든 여성이 꿈꾸는 행복과 부의 상징적인 장소가 됐고 인지도가 더 높아지게 됐다. 이 영화 포스터에서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와 티파니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오리드 헵번은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영화가 상영된 이후 티파니는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브랜드가 됐고 티파니라는 브랜드는 영화 제목에 브랜드 이름을 넣은 최초의 PPL(Product Placement Advertisment : 특정 기업의 협찬을 대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해당 기업의 상품이나 브랜드 이름을 소도구로 끼워 넣어 광고하는 기법)이 됐다. 영화 속에서 티파니는 상류 사회를 대표하는 브랜드이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소설가 폴 바젝에게 티파니에서 구매하지도 않은 반지에 이니셜을 새겨 주는 서비스를 제공해 티파니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업그레이드해 줬다.    유럽과 차별되는 모던한 디자인으로 인기1812년 2월 15일 티파니의 설립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사진①)는 미국 코네티컷 킬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면직 공장을 운영했다. 티파니는 15세부터 아버지의 면직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1837년 9월 아버지에게 1000달러를 투자받아 독립했다. 그는 그 돈으로 뉴욕 맨해튼 259 브로드웨이에 문구류와 팬시 용품을 판매하는 작은 매장을 열었다. 또 일본과 중국에서

    2023.03.01 09:36:05

    1848년 프랑스 혁명으로 쏟아져 나온 귀족들의 보석을 사들인 그는?[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몽클레르, 겨울 스포츠 패딩 위주에서 캐주얼로 확장[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몽클레르 ② 1952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몽클레르는 초기에는 산악용 텐트와 침낭류 등 캠핑 관련 제품을 주로 만들다가 1954년 첫 퀼팅 다운 재킷을 내놓았다. 노동자들이 작업복 위에 방한 목적으로 개발됐던 퀼팅 다운 재킷은 점차 발전해 세계 둘째로 높은 K2 정상을 탐험할 수 있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몽클레르는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역사적인 금메달을 획득한 프랑스 스키 국가 대표팀의 공식 후원사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사용한 로고의 형태가 프랑스의 국조인 수탉 형태를 변경해 만든 것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1972년 스키 강사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그들에게 적절한 옷과 장비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때 개발된 퀼팅 다운 재킷은 세계 최고의 스키 강사를 따뜻하고 상쾌하게 유지하고 얼어 붙을 정도의 극한 환경에서도 장시간 그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몽클레르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고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1986년 브루노 루카우어 감독이 연출한 가수 듀란 듀란에 관한 영화 ‘위 러브 사이먼 르 본(We Love Simon le Bon)’에 출연한 여배우들은 다양한 색상의 몽클레르 재킷을 입었다(사진①). 디자인 요소에서 다양한 변화를 준 몽클레르의 다운 재킷은 밀라노의 젊은 파니나니(1980년대 이탈리아 청소년을 지칭)라면 꼭 입어야 할 필수 아이템이 됐다. 스키장뿐만 아니라 도심에서도 몽클레르 퀼팅 재킷이 유행했다. 1988년 패션 잡지 마담 피가로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편집국 기자들이 몽클레르 다운 재킷을 입고 촬영한 사

    2022.12.12 14:17:20

    몽클레르, 겨울 스포츠 패딩 위주에서 캐주얼로 확장[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몽끌레르, 산악용 텐트·침낭에서 출발해 패딩 대명사로[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몽끌레르 ①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방송 TV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인 송중기 씨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학생으로 환생해 입은 모직 더플코트가 향수를 느끼게 했다. 1990년대에는 교복 위에 혹은 캐주얼 웨어로 모직 코트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직 코트는 점차 줄어들고 패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2010년대를 뜨겁게 달군 노스페이스의 패딩은 중·고등학생들에겐 교복처럼 여겨졌다. 부모들은 주머니 사정상 다소 과도한 지출인 줄 알고도 자식들의 요구로 마지못해 구매했다. 패딩을 둘러싸고 학생들 간 폭행 사건과 갈취에 대한 뉴스를 종종 접하곤 씁쓸해 했던 기억이 난다.소비자들은 무거운 모직 코트보다 가볍고 보온성이 뛰어난 패딩과 경량 다운을 선호한다. 아마 이 유행은 당분간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패딩의 최고 명품브랜드 중 하나는 처음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1992년 이탈리아 회사인 페퍼 컴퍼니가 인수한 몽끌레르다.몽끌레르는 1952년 르네 라미용과 앙드레 뱅상이 함께 만들었다. 당시 33세의 라미용 창립자는 산악 장비를 고안하며 다수의 특허를 보유한 발명가이면서 산악인이었다. 26세의 뱅상 창립자는 스키 강사이자 스포츠 유통업자였다. 몽끌레르라는 브랜드 이름은 그들이 회사를 설립한 지역명 모네스티에르 드 클레르몽(Monastier de Clermont)에서 첫 세 글자와 뒤에 네 글자를 따서 합성해 지은 것이다. 모네스티에르 드 클레르몽은 프랑스 쪽 알프스에 접한 그르노블 지역에 있다.  유명 스키 선수가 애용하면서 인지도 높아져 브랜드를 만든 1952년 초기에는 산악용 텐트와 침낭류 등 캠핑 관련 제

    2022.11.26 15:57:01

    몽끌레르, 산악용 텐트·침낭에서 출발해 패딩 대명사로[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33세 다니엘 리, ‘뉴 보테가 베네타’ 시대 열어[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보테가 베네타 ③현재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이끄는 맨 앞에 두 그룹이 있다. 첫째는 베르나르 아르노가 이끄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이다. 2020년 매출이 440억 유로(약 61조8200억원)에 달한다. 둘째는 프랑수아 앙리 피노가 이끄는 케링그룹으로, 2020년 매출은 131억 유로(약 18조4000억원)였다. LVMH 그룹이 소유한 명품 브랜드는 루이비통·크리스찬 디올·펜디·에밀리오 푸치·지방시·겐조·마크 제이콥스·셀린느·태그 호이어·쇼메·불가리·로로피아나·티파니 등이다. 케링그룹은 구찌·보테가 베네타·생 로랑·알렉산더 맥퀸·발렌시아가·부쉐론·브리오니·스텔라 매카트니 등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케링그룹은 2001년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인수한 뒤 토머스 마이어를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다. 그 뒤 보테가 베네타는 명품 브랜드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지켜 나갔다. 마이어는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를 살리기 위해 미니멀한 콘셉트의 디자인 위주로 콘셉트를 바꿨다. 기존 액세서리 브랜드에서 여성복·남성복·향수 등으로 영역을 넓혀 나가면서 토털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베스트셀러 아이템은 ‘까바백(사각형의 양가죽으로 만든 조금 큰 사이즈의 토트백)’과 ‘놋백(어깨끈이나 손잡이가 없는 여자들이 손에 드는 작은 형태의 가방으로 다양한 잠금장치를 장식으로 사용)’을 손꼽을 수 있다.그는 또 라 스쿠올라 델라 펠레테리아라는 가죽 제품 장인 양성 학교를 세우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7년간 보테가 베네타에서 일한 마이어는 몇 년 동안

    2022.11.15 15:57:44

    33세 다니엘 리, ‘뉴 보테가 베네타’ 시대 열어[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 부활시킨 토마스 마이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보테가 베네타②보테가 베네타는 창립자인 미켈레 타데이의 전처 라우라 몰테도가 인수한 뒤 경영 악화에 직면했다. 고유의 절제미와 브랜드의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인 자일스 데콘을 영입했다. 그런데도 어려운 경영 상황은 좀체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구찌그룹이 2001년 2월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인수했다. 당시 구찌그룹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의 권유가 있었다. 토마스 마이어가 그해 6월 톰 포드의 추천으로 보테가 베네타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마이어는 독일 남서부 포르츠하임의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초 집안의 전통에 따라 건축을 공부했다.그러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 진로를 바꿨다. 파리 ‘샹브르 신디칼 드 라 오트쿠튀르’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마이어는 일상복 디자인의 선구자로 꼽히는 소니아 리켈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8년간 일했다. 이어 레빌론에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4년간, 에르메스에서 여성복과 가죽 소품 디자이너로 9년간 각각 몸담았다. 마이어는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 1960년대 말 보테가 베네타가 광고 문구로 사용했던 ‘당신의 이니셜만으로 충분할 때(When Your Own Initials Are Enough)’에 주목했다. 그는 이 문구를 응용해 브랜드 로고를 없애 버렸다. 미니멀한 콘셉트의 디자인을 추구한 것으로 파격적이었다.마이어는 갖은 노력 끝에 보테가 베네타를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도록 길들여졌다”며 “모든 것을 가질 수는

    2022.11.01 10:15:20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 부활시킨 토마스 마이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