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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 되는 대통령과 여당 [홍영식의 정치판]

    홍영식의 정치판역대 정권의 청와대(요즘 대통령실)와 여당 관계는 묘했다. 군사 정권 시절에야 대통령의 시퍼런 권력에 여당은 말 그대로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 역할에 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이 당 총재고 당 대표는 그 아래인 오너와 고용 사장 관계와 같았다.노태우 정권 초반까지 이런 구조를 유지하다가 1990년 1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면서 당청 관계에서 변화를 맞았다. ‘총재 노태우-대표 김영삼(YS)’으로 이전과 같은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차기 유력 대선 주자인 YS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스로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3당 합당 시 작성된 내각제 개헌 각서가 공개되자 대선 도전 의지가 강했던 YS는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노태우 대통령이 YS를 불러 화해했다. 노 대통령이 항복한 셈이 됐고 이때부터 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고 YS는 대선 주자로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YS도 대통령이 된 뒤 여당 총재를 겸임하면서 당을 지배했다. 하지만 1996년 차기 대선 주자인 이회창 전 총리가 여당에 들어오면서 힘이 당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전 총리는 YS 임기 말인 1997년 3월 당 대표가 된 뒤 9월 총재에 오르면서 당의 실권자가 됐다. 권력의 추가 ‘임기 초 청와대, 임기 말 여당’으로 쏠리는 것은 대부분의 정권에서 나타났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7명의 대통령 가운데 이명박·문재인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5명이 소속 정당을 떠났다. 하지만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는 너무 멀어져도 문

    2023.03.17 09:46:53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 되는 대통령과 여당 [홍영식의 정치판]
  • 윤석열 정부 국정 첫해 ‘여소야대 덫’에 걸리나[홍영식의 정치판]

    홍영식의 정치판2004년 3월 12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직후였다. 탄핵안 표결을 지휘한 뒤 국회 본회의장을 빠져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던 홍사덕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홍 총무는 기자에게 “점심 약속이 없으면 내 사무실에서 도시락이나 같이 먹자”고 해 따라갔다. 도시락을 사이에 마주하고 있던 홍 총무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 보였다. 기자는 “탄핵안 가결을 위한 사령탑 역할을 잘해 냈는데 표정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홍 총무의 발언 요지다. “박관용 (당시)국회의장과 탄핵안 상정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탄핵 전날 밤까지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받지 않더라. 탄핵 사유가 된 선거 중립 위반(“민주당을 뽑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 발언. 당시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소속)에 대해 유감 표명 정도라도 해주면 탄핵안을 상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꼬마 민주당 시절 노 대통령과 함께해 본 적이 있어 그를 잘 안다.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의 전화까지 받지 않은 것은 탄핵으로 유도해 정치판을 뒤집으려는 의도다. 우리가 노 대통령의 전략에 말려들었다. 탄핵으로 인해 우리 당은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수렁에 빠져들 것이다. 당장 총선이 걱정이다.”노 전 대통령은 집권 뒤 여소야대 구도 속에서 국정 운영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국회의 주인은 과반 의석을 차지한 야당 한나라당이었다. 한나라당은 노무현표 국정 과제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집권 3개월도 채 안 된 2003년 5월 21일 “대통령직 못

    2022.11.25 15:59:26

    윤석열 정부 국정 첫해 ‘여소야대 덫’에 걸리나[홍영식의 정치판]
  • [홍영식의 정치판] 결국 여권 전체에 ‘핵폭탄’ 던진 ‘윤핵관’

    [홍영식의 정치판]그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1등 공신들은 있기 마련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박정희 정권의 2인자는 김종필 전 총리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 만한 2인자를 용인하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공신들끼리 견제시키며 충성 경쟁을 유도했다. 결국 공신 반란에 정권은 무너졌다. 전두환 정권에선 ‘3허(허삼수·허화평·허문도)’ 등이, 노태우 정권 때는 사조직 월계수회를 이끈 박철언 전 장관이 각각 실세 불렸다. 김영삼 정부 때는 ‘좌동영(김동영 전 정무 제1장관)-우형우(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가, 김대중 정부 때는 동교동계 중 권노갑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실세 중 실세로 꼽혔다. 노무현 정권 탄생 1등 공신은 ‘좌희정(안희정 전 충남지사)-우광재(이광재 전 의원)’였던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핵관(핵심 관계자)’의 원조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그는 민감한 현안 브리핑 때 익명을 요청하면서 그런 별칭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출마 전후부터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이 정치권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윤핵관’ 탄생의 발단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대통령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993년 수원지검에서 마주쳤다. 당시 윤 대통령은 검사 시보로 수원지검에 연수를 왔고 사시 6기 선배인 권 원내대표는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합창하듯 “어 강릉?”이라고 외쳤다. 윤 대통령은 어릴 때 방학만 되면 강릉 외갓집에 놀러갔고 외조모의 소개로 권 대행과 동갑내기 친구로 지낸 이후 이렇

    2022.08.10 16:21:55

    [홍영식의 정치판] 결국 여권 전체에 ‘핵폭탄’ 던진 ‘윤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