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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해진 죽음, 더 귀한 삶

    [한경 머니 기고=서메리 작가] 내게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안겨준 것은 동갑내기 단짝 친구였다. 밝고 귀엽고 착한 아이였는데, 갑작스러운 암 선고를 받더니 통통하던 볼이 홀쭉해져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떠나 버렸다. 성장기에 생겨난 암세포는 환자의 키만큼이나 빨리 자란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두 번째로 겪은 죽음은 대학교 신입생 때 찾아온 친구네 할머니의 장례였다. 발이 워낙 넓던 친구였던 데다 마침 빈소가 학교에서 멀지도 않은 시내 대학병원이어서, 과 동기들이 우르르 몰려가 조문을 했다. 고인의 가족들은 그래도 편안히 가셨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히려 함께 찾아간 아이들 몇 명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친구의 상실을 동정해서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앞으로 겪게 될 자신의 상실에 이입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울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게 두 번째 경험이었다.이후로도 몇 번인가 죽음을 겪었다. 지인이 떠난 적도 있고, 친척 어른이 돌아가신 적도 있다. 규모가 큰 회사에 들어간 후로는 몇 주, 몇 달 주기로 누군가의 부고(訃告) 이메일을 받았다. 대부분은 얼굴도 모르는 다른 팀 직원의 가족상이었지만, 가끔은 나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의 이름도 보였다. 그런 날이면 회사 일을 마치고 탕비실에 비치된 부의금 봉투를 챙겨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하러 갔다.그렇게 갔던 모든 장례식을 나는 기억한다. 정확히 숫자를 댈 수 있다거나, 모든 장면이 생생히 떠오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전부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게 그토록 강렬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아마도 많은

    2023.07.31 15:10:04

    귀해진 죽음, 더 귀한 삶
  • AI 시대에 인간의 존엄은 안녕할까

    [한경 머니 기고=서메리 작가] 얼마 전에 본 TV 토크쇼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현직 약사에게 진행자가 물었다. “약사로 일한다고 하면 꼭 듣는 말이 있다면서요?” 약사는 “조금 민감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라고 운을 떼며 이렇게 말했다. “AI에 쉽게 대체될 직업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다행히 뒤이어 나온 이야기는 별로 부정적이지 않았다. 전문가의 전문성은 책임감에서 나온다고 말하며, 그녀는 약에 대해 책임지고 환자를 상담하는 일을 AI가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우리라고 내다보았다. 일의 방향성이 변할 수는 있어도, 인간 약사의 가치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그 소신 있는 발언을 들으며, 나는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있는 ‘지혜약국(가명)’을 떠올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붐비는 그곳의 영업 방침은 ‘신속 정확’과 거리가 멀다. 언제 가도 대기 줄이 있는데, 회전률 또한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 30대로 보이는 젊은 약사는 처방전대로 조제하면 그만인 알약 한 봉지도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짓는다. 약 한 알 한 알의 효능과 복용법, 부작용을 상세히 알려주고 손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준다. 단골손님의 특징을 기억하고, 특히 어린이 손님들은 이름까지 외워서 살갑게 대화를 건다.영양제 하나 사러 갔다가 5분도 넘게 기다리면서 나는 속으로 다짐한다. 지금은 기왕 왔으니 여기서 사겠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옆 건물에 있는 약국에 가겠다고. 겨우 내 차례가 오고, 나는 “마그네슘 영양제 하나 주세요”라는 간단한 주문을 넣는다. 약사는 내게 묻는다. 마그네슘을 왜 찾는 거냐고. 피로해서인지, 두통이나 근육통이 있어서인지 혹은 눈가가 떨려

    2023.06.09 15:56:11

    AI 시대에 인간의 존엄은 안녕할까
  • 죽음의 땅, 그 경계에 서다

    [한경 머니 기고=서메리 작가] ‘므레모사’는 김초엽 작가의 소설 <므레모사>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로, 일명 ‘죽음의 땅’으로 불리는 오염 지역이다. 므레모사가 오염된 것은 2003년에 일어난 화학무기 공장의 폭발사고 때문이었다. 공장이 폭발하면서 유출된 유독물질이 비에 달라붙어 수도원을 오염시키고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낸 것이다. 결국 정부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지역을 접근금지구역으로 선포했다.소설은 폭발 사고의 비극으로부터 한참이 흐른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 사이 오염물질이 정화됐다고 판단한 정부는 므레모사에 살던 원주민들의 귀환을 허가했고, 의료 봉사자들에 이어 소수의 일반 관광객까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외지인이자 일반인으로서 죽음의 땅에 입성한 첫 번째 관광 팀은 전 세계에서 추첨을 통해 선정된 6명의 남녀다.인재와 자연 재해가 합쳐서 탄생된 대규모 재난. 사람들을 통제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와 결국은 상품으로 팔리고 마는 비극의 스토리. 현실의 여러 사건들이 겹쳐 떠오르는 므레모사의 비극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인간 유형들이다.유튜버이자 영상 편집자인 주연은 므레모사 목격담을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 추첨에 응모했다. ‘썰’만 잘 풀어도 관심을 끌 수 있고, 몰래 촬영에라도 성공하면 대박이 날 거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녀는 비극에 대한 대중의 관음증을 상징한다.관광학과 대학원생인 이시카와는 재난 현장이 관광지로 변화하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는 말한다. “여행지란 그 매력을 점차 다듬어 가는 것이지, 날것 그대로의 여행지가

    2023.03.28 10:56:56

    죽음의 땅, 그 경계에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