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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계의 원칙, CEO의 자격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문득 정도전을 떠올렸습니다. 조선의 설계자, 조선의 1호 시민 정도전.역성혁명을 주도한 그는 ‘사대부의 나라, 재상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꿨습니다. 논리는 명쾌했습니다.“군주의 재능에는 어리석음도 있고 현명함도 있으며 강력함도 있고 유약함도 있어 한결같지 않다.” 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몇 대에 걸쳐 계속 능력 있는 왕이 나올지 장담하기 힘들다는 얘기였습니다.반면 재상은 선발과정이 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자가 발탁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이어 “군주의 임무는 한사람의 재상을 논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군주가 재상을 잘 뽑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100%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강력한 왕의 나라를 꿈꿨던 이방원과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맞아 죽고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올해 주총 시즌이 마무리됐습니다. 한미약품 등에서 벌어진 경영권 분쟁과 일부 무능한 오너들의 승진을 보며 왜 정도전이 생각났을까. 왕위를 상속받는 것과 기업 총수 자리를 상속받는 것이나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왕위가 잘못 세습되면 나라가 기울 듯, 후계자를 잘못 선택하거나 큰 분쟁이 나면 기업도 어려움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통계가 말해줍니다. 가족기업이 2세대까지 생존할 확률은 30%, 3세대까지 생존할 확률은 14%, 4세대로 가면 이 확률은 4%까지 떨어진다는 해외의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물론 기업환경과 높은 상속세 등의 문제도 있습니다.하지만 이 문제는 가족기업의 실패를 20%밖에 설명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후계자 준비 및 능력부족, 가족 간 갈등,

    2024.04.08 07:00:04

    승계의 원칙, CEO의 자격 [EDITOR's LETTER]
  • 배움의 시스템 고장난 한국, 중국의 추격이 두려운 이유[EDITOR's LETTER]

    이건희 삼성 회장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으로 떠납니다. “선진국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뜻이었습니다. 가혹한 양반이었지요? 고작 열두세 살짜리에게.3년 만에 돌아왔지만 배운 건 별로 없었습니다. 대학 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다시 이 회장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제대로 선진국을 배우고 오라”고 했습니다.이건희의 삶은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승계를 준비하는 17년은 아버지와 장인으로부터 거의 듣기만 하며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회장이 된 후에도 그는 세계적 기업의 CEO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습니다. 배우기 위해 일본 기술자들에게 큰돈을 주고 주말에 초청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삼성전자에 일본 고문들이 많았던 배경입니다.삼성전자는 이 배움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른 한국 기업들도 미국, 일본 기업들을 배워가며 추월했습니다.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덴마크의 농촌부흥운동을 모델로 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해외로 나갔던 1970년대, 1980년대 유학생들은 이후 국내로 돌아와 산업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은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찼던 나라였습니다.이 같은 한국의 발전 모델을 따라 배운 나라가 중국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하지 말라는 국가주도의 성장모델을 벤치마킹하며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산업 경쟁력도 높아졌습니다. ‘중국산’이라고 무시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국내에서 중국 브랜드의 TV, 와인셀러, 스피커, 헤드셋 등은 흔히 볼 수

    2024.03.25 08:18:10

    배움의 시스템 고장난 한국, 중국의 추격이 두려운 이유[EDITOR's LETTER]
  • 건설적 토론 사라진 한국의 공론장 [EDITOR's LETTER]

    프랑스 화가 프라고나르의 ‘그네’란 그림을 아십니까? 볼이 살구빛으로 물든 여인이 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젊은 청년이 숨어서 여인과 눈을 맞추고 있습니다. 뒤에서 그네를 밀고 있는 사람은 나이든 남편. 앞에 놓인 큐피드 상은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듯 입에 손을 올리고 있습니다. 막장 스토리를 아름답게 그려낸 이 그림은 18세기 세계 예술의 중심지를 파리로 옮겨놓은 로코코 양식의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곳은 다름 아닌 살롱이었습니다.17세기까지 프랑스는 이탈리아 문화를 추종했습니다. 루이14세의 절대왕정은 고전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의 미적 취향도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가 1648년 설립된 예술 아카데미입니다. 아카데미는 고전주의 대표화가로 불리는 푸생과 루벤스의 그림을 미적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푸생은 구조와 선 등을 중시하며 규격화되고 염격한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그림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당시 예술에 대한 담론을 주도한 것은 아카데미였지만 유일한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는 살롱 문화가 퍼지고 있었습니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곳곳에 모여 문화와 예술에 대한 토론을 했고, 고전주의에 대한 반론도 싹텄습니다. 비평가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결과는 ‘취향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 이후 프랑스 회화는 이탈리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익숙한 특유의 분위기를 갖게 됩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는 부세, 와토, 프라고나르 등이지요. 이 변화는 주류의 담론장인 아카데미가 아닌 또 다른 공간인 살롱에서 이뤄졌고, 재

    2024.03.18 07:42:15

    건설적 토론 사라진 한국의 공론장 [EDITOR's LETTER]
  • 2024년 42억명의 선거와 새로운 세계화의 원년 [EDITOR's LETTER]

    올 한 해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을 축으로 하나처럼 돌아가던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싸거나 잘 만들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세계 어디서나 팔리는 시대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지요. 비교우위 이론에 입각해 설계된 글로벌 공급망 파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2024년을 코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거 때문입니다. 내년을 ‘지구촌 선거의 해’라고 합니다. 1월 대만 총통 선거를 시작으로 한국 총선, 미국 대선 그리고 러시아, 영국,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등 줄줄이 선거가 예정돼 있습니다. 선거가 치러지는 나라의 인구만 42억 명에 달합니다. 이들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끝났다는데 왜 남의 나라 선거에 관심이 갈까. 폴란드 예를 들어볼까요. 지난 10월 폴란드에서 총선이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축구 외에 노동자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탄 레흐 바웬사 정도밖에 관심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 선거가 한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권이 교체되자 한국 기업들과 맺기로 한 계약이 취소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지요. 잘나가던 K방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폴란드가 이 정도면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1월 대만 선거는 한국 외교에 큰 고민을 던져줄 수 있습니다. 양안관계가 악화되면 한국은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한발을 들여놓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라이트는 11월 미국 대선입니다. 벌써 세계 곳곳에서는 트럼프 당선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이해관계는 모두 다릅니다. 트럼프는 바이든의 인플

    2023.12.11 08:23:18

    2024년 42억명의 선거와 새로운 세계화의 원년 [EDITOR's LETTER]
  • 독일의 경쟁자가 된 K-방산, 그리고 한화그룹의 미션 [EDITOR's LETTER]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고,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어디서 들어본 문구지요? ‘히든 피겨스’란 영화 포스터에 붙어 있던 문장입니다. 196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있던 흑인 여성들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입니다. 주류인 백인 남성들이 틀에 박힌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흑인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창의적 방식으로 궤도를 계산해 냅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옷 색깔이었습니다. 백인 남성들은 모두 짙은 색 바지에 와이셔츠, 마치 유니폼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흑백이었습니다. 반면 흑인 여성들은 노란색·보라색·연두색·파란색·녹색 등 다양한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감독이 이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다양성은 빛을 발하게 하고 획일성은 어둠을 드리운다.” 기업 문화를 얘기할 때 가끔 인용하는 사례입니다. 다양성과 창의성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0여 년 전 기업을 취재할 때가 생각납니다. 먼저 서초동 삼성전자 홍보실. 갈 때마다 뭔가 소란스럽고 북적거렸습니다. 수많은 대화가 오갔고 복장 자율화로 옷차림은 더 다양해졌습니다. 다음은 네이버. 여기는 대학 캠퍼스인 줄 알았습니다. 곳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웃음소리도 들리고 밝은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두 회사는 이후 급성장했습니다. 강북으로 건너오면 달랐습니다. 어느 날 시내 한복판에 있는 한화빌딩에 들렀습니다. 분위기는 축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조명은 침침했고 침묵이 흘렀습니다. 임원 뒤쪽에 ‘의리(義理)’라고 쓰인 큰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직원들의 복장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그로부터 10

    2023.09.12 13:39:09

    독일의 경쟁자가 된 K-방산, 그리고 한화그룹의 미션 [EDITOR's LETTER]
  • 기로에 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EDITOR's LETTER]

    서울대역점·서울대입구역점·관악서울대입구R점·서울대입구역8번출구점. 서울대입구역 인근에 있는 4개 스타벅스 매장의 명칭입니다. 생기고 또 생겨도 가 보면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처음엔 한국인들의 커피 사랑과 문화를 판다는 스타벅스의 마케팅이 결합된 결과라고 해석했지요. 하지만 이내 공간에 대한 욕구와 관련 있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비좁고 침침한 원룸, 꽉 막혀 있는 사무실, 온갖 가구들로 차 있고 식구들이 오가는 집구석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자리 잡은 공간이 스타벅스란 얘기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의 공간에 대한 욕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파트입니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 그 시작은 동부이촌동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 정부는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 단지를 이곳에 짓습니다. 선분양, 모델하우스도 여기에서 시작됐습니다. 한강맨션을 시작으로 아파트가 급속히 확산됩니다. 동부이촌동이 ‘주택 건설 사업의 경부고속도로’란 평가를 받는 배경이지요. 1970년대 말,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아파트가 딱 한군데 있었습니다. 친구를 따라 가본 아파트는 충격이었습니다. 온수가 나오고 연탄을 갈지 않아도 따뜻했습니다. 단지 내에 가게도 있고 놀이터도 있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1970년대 한국 사회에는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아파트는 한국의 경제 개발 모델에 따라 지어졌습니다. ‘싸고 많이 그리고 빨리 똑같이.’ 빠르게 확산된 아파트는 한국의 주거 모델이 됐습니다. 이런 사례는 세계적으로 찾기 힘듭니다. 유럽인들은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보고 군사 기지나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 주거 시설인 줄 알았다고

    2023.09.05 12:24:35

    기로에 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EDITOR's LETTER]
  • 시진핑이 쏜 휘어진 3개의 화살, 중국 경제를 위기로[EDITOR's LETTER]

    ‘청년 실업률 고공 행진, 부동산 침체로 대형 건설 업체 부도 위기, 반도체 수출 부진, 수출 증가율 마이너스 기록, 경제성장률 전망치 계속 추락 중, 급속한 고령화로 생산 가능 인구 감소, 이에 따른 성장 잠재력 훼손, 사회적 불만에 대한 정부의 통제 강화.’ 아주 익숙한 현상이지요. 어떤 나라를 생각하셨습니까? 중국 이야기입니다. 최근 중국 경제와 관련해 나오는 단어는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디플레이션, 1억 채의 빈집, 청년 실업률 21%, 부동산 개발 업체 파산, 국가 부채 비율 급등 등이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질주는 거침없어 보였습니다.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면 승패를 예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습니다. 이랬던 중국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입니다. 전문가들은 핵심 문제로 ‘3D’를 꼽습니다. 부채(Debt), 인구 변동(Demography), 디커플링(Decoupling) 등입니다. 코로나19 극복과 경기 부양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한 결과 중국의 부채는 급증했습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부채 비율(정부·가계·기업)은 282%에 달합니다. 고령화로 인구가 줄어들며 성장 여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과의 충돌에 따른 디커플링은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줬습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면 중국 자본주의와 정치 시스템의 마찰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게 보입니다. 한국과 중국 경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통 경제학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다 해가며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정부 주도의 계획 경제, 시장 개입, 대기업 중심의 불균형 발전 등이 그것입니다. 중국은 여기에 더해 건설 중심의 ‘토건 국가’란 특징까지 더

    2023.08.21 09:09:27

    시진핑이 쏜 휘어진 3개의 화살, 중국 경제를 위기로[EDITOR's LETTER]
  • 끓는 지구, 사피엔스와 공존의 가치[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간혹 시간 날 때 동영상으로 진화생물학자들의 동영상 강의를 듣곤 합니다. 듣고 있으면 잠시 악다구니 쓰듯 사는 현실에서 벗어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시간 앞에서 나는, 인간은 어떻게 지금에 다다랐는지를 생각합니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은 자신의 죽음이 종의 멸종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같은 얘기를 들으면 삶 앞에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사는 동물 중 가장 막둥이입니다. 탄생한 지는 대략 20만 년쯤이고 5만~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공존의 기술은 배우지 못한 듯합니다. 이후 사피엔스를 제외한 다른 호모 종들은 모조리 멸절시킨 후 1만여 년 전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앉습니다. 1만 년.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기간입니다. 길어 보이지만 공룡이 지배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룡은 멸종하기 전까지 1억4000만 년간 지구를 지배했습니다. 사피엔스가 지배한 기간은 점 하나도 찍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시간에는 미스 매치가 있었습니다. 공룡은 하루아침에 멸종하지 않았습니다. 수십만 년 걸렸습니다. 새로운 지배자가 될 포유류는 진화할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사자가 생태계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데도 수백만 년이 걸렸습니다. 자연이 준 이 시간 동안 영양 같은 동물들은 쉽게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도록 더 빨리 달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공진화의 과정이었습니다. 사피엔스는 달랐습니다. 순식간에 지배자가 됐고 이로 인해 다른 동물들이 진화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지배한 1만 년 사이 포유류의 85%가

    2023.08.14 10:02:10

    끓는 지구, 사피엔스와 공존의 가치[EDITOR's LETTER]
  • 상온 초전도체, 이 낯선 용어에 우리는 왜 흥분할까[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이지 않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에 새삼 공감이 가는 시간입니다. 연구실에서 무언가 개발에 성공하면 환호가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결과물이 연구실을 빠져나오는 순간 인간과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킵니다. 돈과 권력 등의 요소가 뒤섞이며 기술은 순수성을 상실합니다. 곧 개봉될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 일생만 봐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 아인슈타인이 제안하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 천재들을 이끈 인물이 오펜하이머입니다. 그는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된 후 이런 말을 합니다. “과학자라는 죄를 알아 버렸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을 제조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정부는 그를 소련 스파이로 몰아갑니다. 과학자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임무를 완수하고 양심에 따라 더 큰 희생을 거부한 것이 죄였습니다. 대가는 68년간의 스파이 혐의였지요. 맨해튼 프로젝트는 권력으로서의 기술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변질시킨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 최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단어는 ‘상온 초전도체’입니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비싸고 귀한 자원 ‘언옵테늄’이 초전도체입니다. 저항이 사라져 에너지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물질. 자기 부상 열차를 현실로 만들고 에너지 혁명을 일으킬 ‘상온 초전도체’. 이를 한국 연구진이 발견했다는 초보적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갑자기 공개된 후 젊은이들이 커뮤니티

    2023.08.04 09:30:31

    상온 초전도체, 이 낯선 용어에 우리는 왜 흥분할까[EDITOR's LETTER]
  • 이상한 나라의 푸바오[EDITOR's LETTER]

    몇 달 전 한 친구와 통화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다고 했더니 동영상 링크를 하나 보내 줬습니다. 판다 두 마리가 투닥거리는 영상이었습니다. 제목은 ‘사춘기 온 푸바오, 분노한 아이바오 등짝 스매싱.’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후 머리가 무거울 때마다 푸바오를 찾기 시작했고 추천 영상은 곰으로 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이 곰 한 마리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과학적으로는 동물을 보고 있으면 혈압이 하락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심리적·육체적 혜택을 본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동물과의 상호 교감을 통해 정신적 안정감을 주는 ‘애니피(animal theapy)’라는 치유법도 있지요. 이것만일까.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실 사회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현실을 볼까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보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비 좀 많이 왔다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구명조끼도 없이 수해 지역에 투입된 해병대 청년도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젊은 선생님은 학부모의 압박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월세가 싼 원룸을 찾으러 신림동에 왔다가 일면식도 없는 인간이 휘두른 칼에 맞아 숨진 취업 준비생의 삶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작년 10월 이태원 골목 참사 현장에는 아직도 추모의 글들이 남아 있는데 우리는 계속 젊은 생명들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책임을 피하고 떠넘기기 바쁩니다.주변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 가면 진심으로 교감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상사들은 현실

    2023.07.31 07:57:28

    이상한 나라의 푸바오[EDITOR's LETTER]
  • 하늘로 간 에코프로 주가, 그리고 터닝포인트[EDITOR's LETTER]

    화제의 주식 에코프로의 주가가 오를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작년 6월께였습니다. 에코프로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실적 전망과 경쟁력 등에 대한 대략적 얘기만 들었을 뿐인데 ‘이 회사 잘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전에 이동채 전 회장이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고 실패했고,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었는지 취재해 둔 덕에 신뢰가 갔습니다.물론 결정적으로 주가 상승을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제가 주식을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식을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오르는 마이너스의 손이기에 ‘내가 주식을 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에코프로는 믿을 수 있었습니다.한동안 잊고 있다가 4월께 주가를 보니 ‘역시’ 법칙대로였습니다. 배아픔이 밀려왔습니다. 통증을 뒤로하고 그간의 과정을 살펴보니 몇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먼저 코로나19 사태 때 있었던 ‘동학개미 운동’과의 유사성입니다. 일부에서는 ‘동학’이란 단어를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학은 실패한 혁명이라 부적절하다”고 이유를 댔습니다. ‘대중과 혁명에 대한 알레르기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어찌됐건 동학개미는 코로나19 시대의 희망과도 같은 단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주가는 3000선을 돌파했습니다.에코프로를 황제주로 만든 것도 기관이 아니라 개인들이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희망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일본 주식은 오르고 미국 빅테크도 고점을 찍었지만 한국 시장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산업적으로도 전기차는 중국의 기세가 무섭고 반도체는 추격당하고 바이오는 시들했습니다. 이럴 때 전기차에 들어가는 2차전지 소재(하이니켈 양극재) 부문에서 세계 1위를 하고 있고

    2023.07.25 14:12:50

    하늘로 간 에코프로 주가, 그리고 터닝포인트[EDITOR's LETTER]
  • 기시다의 쇼타임, 그래도 정책의 기술은 있었다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소니 워크맨과 TV, 도요타 자동차, 조지루시의 코끼리 밥솥, 그리고 마일드세븐. 1980년대 일본 제품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자동차부터 샤프까지 ‘일제’라고 하면 최고로 쳐줬습니다.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곤도 마사히코의 노래 ‘긴기라기니’가 길거리를 장악하고 갤러그가 한국의 오락실을 점령한 것도 1980년대였습니다. 방송도 일본 것을 베꼈습니다. 일본의 전성기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립니다.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버블 경제는 외부 충격과 정책 실패, 잘못된 전략이 어우러져 몰락의 방정식을 완성합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팔을 비틀어 반도체 산업을 파괴했습니다. 일본은 장기 불황에 들어간 지도 모르고 금리를 올렸습니다. 기업들은 시장 변화를 무시하고 고품질에 집중하다가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일본 업체들 자리의 상당수는 한국 기업들의 차지였습니다. 반도체·가전·자동차 등은 물론 코끼리밥솥 자리까지 쿠쿠가 대체했습니다. 그랬던 일본 경제가 최근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몰락의 방정식은 역으로 작용하며 부활의 디딤돌이 됐습니다. 미·중 무역 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 국가로 선정한 듯합니다. 워런 버핏은 일본 종합상사에 투자하고 마이크론은 공장 증설에 나섰습니다. 한국과 대만도 미국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양보를 거듭하며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일본에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대만 TSMC는 일본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정책도 시기

    2023.07.10 06:00:04

    기시다의 쇼타임, 그래도 정책의 기술은 있었다 [EDITOR's LETTER]
  • 당신은 어떤 리더입니까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좋은 리더십을 구성하는 마법의 성분은 여전히 수배 중이다.”리더십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리더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영 구루 톰 피터스조차 “리더십의 첫째 슬로건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정도니 말입니다.종합 예술가로 불리는 마에스트로들을 통해 그 성분이 왜 수배 중인지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첫째 인물은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입니다. 그는 다혈질의 폭군이었습니다.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던지고 꺾어 버리기도 했죠. 별명이 ‘베수비오 화산’이었습니다. 미국 NBC 심포니 단원들은 그를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폭발이 오롯이 음악에 대한 열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1957년 토스카니니가 세상을 떠나자 악단은 1년간 지휘자 없이 추모 연주를 하고 해산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리더십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한 것이지요.다음은 베를린필을 35년간 이끈 폰 카라얀입니다. 그는 세상의 흐름과 인간의 심리를 이해한 마에스트로였습니다. 1940년대 후반 LP 시대가 열립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고 무시했지요. 하지만 카라얀은 집에서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을 직감하고 LP 녹음에 집중했습니다. 1980년대 CD가 등장했을 때도 가장 먼저 반응했습니다. 이를 통해 크게 성공했습니다.심리를 파악하는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지휘자가 연주자와 눈을 맞추며 교감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지만 그는 때때로 눈을 감고 은발을 흩날리며 지휘봉을 휘둘렀습니다.“음악의 내면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연주자와 청중을 빨

    2023.07.03 08:43:19

    당신은 어떤 리더입니까 [EDITOR's LETTER]
  • 정주영은 어떻게 신화가 됐나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2007년 어느 날, 현대중공업 울산 공장에 취재를 갔습니다. 공장에 들어서자 플래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안내를 맡은 부장급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요즘이 어떤 시절인데 저런 걸 붙여 놓는 거지요. 저걸 보면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요즘도 저 글귀를 보면 마음이 찡합니다.” 정 회장 지시로 바다를 메워 조선소를 지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40년간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한국 조선업의 출발은 이제 신화가 됐습니다. 벌어진 일도 신화에 가깝습니다.1960년대 건설업으로 성공한 정 회장은 1970년대 들어 조선업 진출을 결심합니다.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중화학 공업으로 가야 한다. 건설업 현장을 바다로 옮기는 것이 조선업이다.” 하지만 공장도, 돈도, 기술도 없었습니다. 차관이 필요했습니다. 정 회장은 미포만 백사장 사진, 지도, 빌린 도면만 달랑 들고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선박금융이 발달한 영국이 그의 행선지였습니다. 바클레이스은행을 찾아 갑니다. 당연히 거절. 미치지 않고서야 공장도 없는 후진국 기업에 돈을 빌려줄 리 만무했겠지요.수소문 끝에 은행에 영향력 있는 영국 선박 컨설턴트 롱바통 회장을 찾아가 추천서를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500원의 신화’가 탄생합니다. 거부하는 롱바통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있던 거북선을 보여주며 설득합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인 롱

    2023.06.26 06:00:05

    정주영은 어떻게 신화가 됐나 [EDITOR's LETTER]
  • 살리는 규제, 죽이는 규제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몇 해 전부터 토큰이란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왠 토큰? 40~50대는 버스 토큰을 떠올렸을 겁니다. 토큰은 회수권과 함께 버스 요금업계를 이끈 쌍두마차였습니다.1980~1990년대 버스 요금을 현금 대신 가운데 구멍이 뚫린 작은 토큰을 내고 탔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토큰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권리 증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디지털화됐고 다양한 주체가 여러 가지를 발행할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점이었습니다.다양한 자산에 대한 권리 증서(주식)를 토큰 형태로 발행하는 토근 증권 발행(STO)은 투자 상품을 다양화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가상자산과 달리 토큰의 가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산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긴 합니다.흔히 예를 들 듯이 뉴진스의 노래 한곡, 호화 유람선, 미술품, 주차장을 자산으로 토큰을 발행할 수 있습니다. 또 동네 커피숍과 사업 계획서를 기초 자산으로 쓸 수 있습니다. 발행하려는 사람, 금융회사들, 투자자가 모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여기에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세계적 트렌드로 만들었던 세계적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다음 세대의 시장은 ‘자산의 토큰화’가 이끌어 갈 것이다.” 실행에 나선 기업도 있지요. 독일 지멘스가 채권을 토큰 형태로 발행, 토큰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금융위원회가 지난 2월 STO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금융위는 신중한 스탠스입니다. 루나, 위믹스 등 가상자산 투자로 인해 피해자가 쏟아져 나온 영향입니

    2023.06.19 06:00:38

    살리는 규제, 죽이는 규제 [EDITOR's 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