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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24시] 조주완 LG전자 사장, CEO F.U.N 토크로 임직원들과 소통…”가슴 뛰는 브랜드 만들자”

    [CEO24시]조주완 LG전자 사장은 10월 6일 ‘고객에게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기 위하여’라는 주제로 ‘최고경영자(CEO) 펀(F.U.N) 토크’를 열고 임직원들과 소통했다. 이 행사에는 7000여 명의 임직원이 실시간으로 참여해 조 사장과 함께 LG전자 브랜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눴다. 조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기업의 미래를 위해 꼭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자산 두 가지는 ‘사람’과 ‘브랜드’”라고 강조했다.LG전자는 이날 행사에서 ‘혁신적인 스마트라이프 솔루션을 통해 고객의 더 나은 삶, 더 나은 지구 환경에 기여’하는 ‘라이프 굿(Life’s Good)’ 컴퍼니로서의 브랜드 지향점도 구성원들과 공유했다. 브랜드 미션인 ‘더 나은 삶을 위한 혁신’을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한 핵심 가치로 △최고의 품질과 고객 경험 △인간 중심의 혁신 △미소 짓게 하는 따뜻함을 정립하는 등 향후 브랜드 방향성에 대해 공유하고 의견을 나눴다. 이와 함께 Z세대로 구성된 LG전자의 대학생 ‘디자인크루’에게 LG전자 브랜드에 대한 외부의 목소리도 들었다.조 사장은 지난해 말 취임 후 ‘리인벤트(REINVENT·재창조) LG전자’라는 슬로건으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조직 문화 혁신과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CEO 펀 토크를 통해 끊임없이 구성원들과 소통하며 조직 문화 혁신을 실천하고 있다.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2022.10.16 06:00:03

    [CEO24시] 조주완 LG전자 사장, CEO F.U.N 토크로 임직원들과 소통…”가슴 뛰는 브랜드 만들자”
  • [EDITOR's LETTER]사람과 시간이 만나 서사가 된 서울의 길

    [EDITOR's LETTER] 종로 뒷골목에 좋아하는 음식점 하나가 있습니다. 오래전 명절 때 집에 가지 못하면 찾던 곳입니다. 동그랑땡을 파는 그 집. 지금도 가끔 그곳에 갑니다. 얼마 전 그 음식점 인근 아는 카페 앞을 후배와 지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배는 말했습니다. “아 저 여기 알아요. 엄마 아빠가 데이트하던 곳이라고 들었어요.” 순간 흠칫했습니다. 항상 젊은 후배들과 정서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는 되지도 않을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난 후배들의 부모들과 정서를 공유하고 있구나….’  하긴 그전에 깨달아야 했습니다. 몇 년 전 영화 ‘1987’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더니 한 후배가 “우리 아버지도 눈물 흘리셨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몇학번이냐고 물었더니 후배는 답했습니다. “87학번이요.” 친구네 쩝.1980년대 종로는 젊음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서점·영화관·영어학원·음식점·카페·지하철 등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 있었습니다. 당시 또 다른 거점은 신촌(이화여대앞 포함)이었습니다. 이랜드그룹의 출발이 이대앞 ‘잉글랜드’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옷가게였고 스타벅스 1호점이 이대 앞에 문을 연 것도 상징적입니다. 한 군데 더 있었습니다. ‘강남스타일’의 발원지 강남역입니다. 당시 뉴욕제과 앞은 종로서적만큼이나 붐볐습니다. 나이트클럽은 꽉찼습니다. 종로에 있던 어학원들은 근처에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소득 증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습니다. 1986년 2000달러대였던 국민소득은 이후 8년간 매년 1000달러씩 늘어납니다.

    2022.06.04 06:00:01

    [EDITOR's LETTER]사람과 시간이 만나 서사가 된 서울의 길
  • 디올 장례식에서 평생의 동성 연인 베르제 만나[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이브 생 로랑②이브 생 로랑은 1957년 10월 30일 크리스찬 디올의 장례식에서 평생의 파트너이자 동성 연인 피에르 베르제 서점 중개인을 만났다. 그는 이브 생 로랑이 군 병원에서 약물에 취해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크리스찬 디올이 수석 디자이너를 이브 생 로랑에서 마크 보앙으로 교체했을 때 디올 하우스를 상대로 1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다지이너에서 해고됐을 때 베르제에게 “그렇다면 우리 함께 회사를 만들자. 경영은 당신이 맡는 거야”라고 말했다. 베르제는 자금을 모으느라 동분서주한 끝에 미국인 투자자 제스 마크 로빈슨에게 투자를 받았다. 이브 생 로랑과 베르제는 1961년 12월 ‘이브 생 로랑 퀴트르 하우스’를 설립했다.1962년 1월 29일 이브 생 로랑은 베르제의 도움으로 스폰티니 거리의 어느 저택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피 재킷( 엉덩이 길이의 직선적인 코트로 더블 여밈이 특징)’과 바지, ‘튜닉(그리스·로마 시대에 착용된 통자 스타일의 무릎 정도 길이에 장식이 거의 없는 느슨한 의복)’이 대성공을 거뒀다.미국 잡지 라이프는 “이브 생 로랑은 샤넬 이후 최고의 슈트 메이커”라고 평가했다. 1963년 아티스트 카산드라는 이브 생 로랑의 이니셜을 사용해 로고를 만들었다. 이 로고는 오늘날 향수·코스메틱·액세서리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이브 생 로랑의 핵심적 이미지가 됐다. 브랜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이브 생 로랑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다.턱시도 ‘르 스모킹’, 트레이드마크 돼이브 생 로랑

    2022.01.09 06:00:32

    디올 장례식에서 평생의 동성 연인 베르제 만나[명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