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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넬 제치고 승승장구…‘후계자’ 이브 생 로랑에게 ‘왕위’ 넘겨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③]크리스찬 디올은 샤넬을 존경했지만 정작 그의 패션에 영향을 준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디올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관심은 (에드워드) 몰리뇌에 있다. 어느것도 완전히 무에서 창조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들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의 스타일은 확실히 내게 많은 영향을 줬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그를 모방하도록 애쓴다는 것이 바로 그 사람 자체가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영국 디자이너 중 거장으로 꼽히는 몰리뇌는 완벽주의자였고 원칙주의자였다. 이것이 디올이 몰리뇌를 존경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몰리뇌와 달리 디올은 무척 낭만적이었다. 몰리뇌는 새로운 룩을 발표해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시즌을 거쳐 가면서 점진적으로 어깨의 패드를 제거하고 스커트의 볼륨을 증가시키며 자신의 디자인을 구축해 나갔다. 반면 디올은 강한 충격을 원했다. 점진적이기보다는 즉각적인 성공을 목표로 한 것이다. 디올은 1950년대 숨쉴 틈 없을 정도로 새로운 디자인들을 잇달아 선보였다. 1950년 봄 컬렉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컬렉션은 1950년 전체의 특징을 포괄할 것이다. ‘버티컬 라인’이라는 주제 아래 성향이 강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여성스러움이 남아 있어 여성 스스로를 가치 있게 한다.” 디올은 패션쇼를 통해  볼륨을 상체에 집중한 버티컬 라인을 발표했다. 1951년에는 자연스러운 선에 기초한 둥근 실루엣으로 여성의 허리를 고통스러운 코르셋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한 오벌 라인을 선 보였다.첫 립스틱 ‘루즈 디올’, 화장품 시장 진출1953년에는 튤립 라인을 내놓았

    2022.05.08 18:00:01

    샤넬 제치고 승승장구…‘후계자’ 이브 생 로랑에게 ‘왕위’ 넘겨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 크리스찬 디올, “우아한 상류층 여성 위해 디자인하는 게 즐겁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 ②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초,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서서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수년 동안 물자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던 그들은 독일 히틀러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차츰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파리뿐만 아니라 영국 런던, 미국 뉴욕은 실루엣의 변화를 원했고 패션도 이런 흐름을 쫓아가길 바랐다. 전쟁 이후 여성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이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를 모아 정체성과 명칭을 가진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역할에 정확하게 부응한 사람이 크리스찬 디올이었다. 전쟁 동안 사람들이 입었던 딱딱한 실루엣과 짧은 스커트는 쇠퇴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인 만큼 사람들이 옷으로 치장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디올은 길고 풍성한 스커트, 크리놀린(허리가 잘록하게 꼭 끼고 스커트 단이 넓게 퍼진 복식 양식), 그의 어린 시절 유행했던 페티코트(여성용 속치마)가 있는 것,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벌어진 스커트를 좋아했다. 스커트가 풍성하다는 것은 직물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타일 회사의 사장인 마르셀 부사크에게는 디올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디올은 부사크에게 투자 받은 뒤 자크 로에를 경영 책임자로 합류시켰다. 전쟁 뒤 절약 풍토 속 풍성한 스타일 거부감1946년 10월 시작된 디올 하우스는 3개의 작업실, 85명의 스태프와 세 명의 재단사로 구성됐다. 디올은 디자인 감독을 맡고 로에는 재정 문제를 담당했다. 이런 역할 분담은 당시 파리의 쿠튀

    2022.04.24 18:00:01

    크리스찬 디올, “우아한 상류층 여성 위해 디자인하는 게 즐겁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 21세에 크리스찬 디올 수석 디자이너 ‘이변’[명품 이야기]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이브 생 로랑①이브 생 로랑은 1936년 8월 1일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지중해 연안 북부 아프리카 알제리 오랑 지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 제작과 보험 사업을 했다. 집에서 파티가 자주 열렸고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이브 생 로랑에게 패션에 대해 많은 영향을 줬다. 그는 “하얗고 긴 명주 베일 원피스와 진주 모양의 시퀸(반짝거리는 얇은 장식 조각으로 금속 혹은 플라스틱, 합성수지로 만든 것)을 곱게 장식하고 무도회에 가기 전 내 방에 들러 굿 나잇 키스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그는 약골에 운동도 잘하지 못했고 자신보다 덩치가 큰 학생들의 놀림을 종종 받기도 했으며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집에서 그림을 즐겨 그렸다. 특히 어머니와 두 누나들의 드레스를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11살 때 연극 ‘아내들의 학교’ 보고 디자이너 꿈꿔이브 생 로랑은 “열한 살 때 ‘아내들의 학교’라는 연극을 보고 디자이너를 꿈꾸게 됐다”고 회고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크리스티앙 베라르가 디자인한 무대 의상은 그에게 감동과 미래의 디자이너를 꿈꾸기에 충분했다. 이브 생 로랑은 연극에 나왔던 의상들을 재현해 어머니와 두 누나들에게 선물해 그의 재능을 가족들에게 알렸다.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상조합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3개월을 채 다니지 못하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자퇴했다. 열일곱 살이 된 1953년 국제양모사무국(IWS)에서 개최하는 디자인 콘테스트에 응모해 3등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다시 도전해 1등상을 받는 영예를

    2021.12.26 06:00:46

    21세에 크리스찬 디올 수석 디자이너 ‘이변’[명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