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부왕을 만나다

미국의 ‘기부왕’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보유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언론은 이를 ‘기부 혁명’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이처럼 해외 부자들의 기부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 부자들은?’하고 아쉬움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여기 자랑스러운 ‘한국의 기부왕’들이 우리 곁에 있다.

최신원 SKC 회장, 류근철 카이스트 초빙 특훈교수, 스티브 김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송경애 BT&I 대표 등 4인을 만나 기부 스토리를 들어봤다.

‘기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누굴까. 세계 최고 부자들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아닐까. 두 사람은 특히 손을 맞잡고 큰일을 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을 대상으로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는 ‘기부 서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6월부터 ‘포브스 400’ 목록의 억만장자 중 80여 명을 접촉했는데, 40여 명이 호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벌써 1500억 달러(약 170조 원)가 모인 것이다.

두 사람의 캠페인은 혁명적이다. 세계의 기부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부의 필요성을 지구촌 곳곳에 알렸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유명인들의 기부 활동은 일반인들의 기부를 이끌어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지난 10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한길리서치를 통해 만 19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유명인들의 기부 활동이 일반인들의 기부 동기부여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물었더니, ‘도움이 된다’는 응답이 80.4%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18.4%)’는 응답을 압도했다.

그렇지만 한국 부자들의 기부 문화는 낮은 수준이다. 아직까지 한국의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지표로 본 한국의 선진화 수준’ 보고서에 따르면 선진화 지표 가운데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표의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30위로 꼴찌였다.

부자들의 대다수는 기업인이다. 이들이 주로 법인 명의의 기부를 선호하고 있는 것도 미국 등 선진국과 다른 점이다.
[창간 15주년 기획특집 1]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부자들의 기부 활성화 절실

기획재정부 자료(민간의 기부 문화 활성화를 위한 세제 지원 제도, 2009년 7월)에 따르면 국내 기부금 총량 기여도에서 기업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미국은 기부금 총량의 약 80%가 개인 기부금으로 구성되는 반면 한국은 61.3%에 그치고 있다. 개인 기부 또한 종교 단체 헌금(50%)을 제외하면 그 수치가 매우 낮다.

더구나 개인 기부는 오히려 가난할수록 소득 대비 기부금이 늘어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9년 국세청 통계 연보를 보면 8000만 원을 초과하는 소득 계층부터는 소득 대비 기부금이 점점 줄어들었다.

8000만 원 초과~1억 원 이하 계층은 소득액 1000원당 기부금이 19.9원이지만 2억 원 초과~3억 원 이하 계층은 18.8원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중산층 이상 자산가들의 기부 활성화가 기부 문화 확산에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한국 부자들이 기부에 인색한 이유는 뭘까. 우선 경영을 대물림하지 않는 외국과 달리 경영 승계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재산의 사회 환원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기부금이 기부자의 뜻대로 쓰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즉 기부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고액의 기부금을 신탁하면 운영 수익의 일부를 이용해 기부자가 생활할 수 있지만 한국은 고액 기부라도 기부한 동시에 어떤 수익도 제공받을 수 없는 구조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기부자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사정이 어찌됐건 한국에도 열정적으로 기부 활동을 하는 부자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한경비즈니스가 만난 최신원 SKC 회장, 류근철 카이스트 초빙 특훈교수, 스티브 김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송경애 BT&I 대표 등이 그렇다.

그들에게 기부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들은 돈을 버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기부를 통해 수십 배, 수백 배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그들은 주장했다. 나누는 행복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미국의 유력 경제 주간지 포브스로부터 ‘기부 영웅’ 칭호를 받은 최신원 SKC 회장은 대기업 오너 경영인인데도 불구하고 ‘을지로 최신원’이라는 개인 명의로 자선단체에 거액을 기부해 왔다.

김장 담그기 등 각종 봉사 활동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나눔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최 회장은 “한 사람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저절로 힘이 솟구친다”며 겸손해 했다.

류근철 카이스트 초빙 특훈교수는 개인 기부로는 사상 최대 금액인 578억 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한 인물이다. 류 교수는 “딸이 예쁘다고 시집보내지 않고 노처녀로 늙히기보다 좋은 짝을 찾아 보내는 게 좋은 것처럼 돈도 훌륭하게 잘 쓰일 수 있는 곳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통하는 스티브 김(한국명 김윤종)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은 세계 정보통신 업계가 알아주는 성공한 사업가에서 자선 사업가로 변신해 기부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돈은 많을수록 더 가지고 싶다”며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행 그룹 BT&I의 송경애 대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첫 여성 회원이다. 송 대표는 본인의 생일인 2010년 2월 14일을 기념해 2010만214원을 기부하는 등 기념일을 기부로 기념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송 대표는 “기부도 연습이 필요하다”며 “단돈 1000원이라도 자주 기부하다 보면 이전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