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혁신이다 (12)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과학적 방법론은 ‘제조’와 ‘구매’를 가리지 않는다
1978년, 드디어 한국에도 ‘품질 관리 대상’이 생겼다. 당연히 삼성전자도 수상에 도전했다. 사실 금성사(현 LG)가 우리보다 먼저 도전하기 시작했다. 삼성도 뒤질 수 없다는 생각에 뛰어든 것이다. 당시만 해도 금성은 삼성보다 10년이나 앞서 있던 회사였다.

당시 품질 대상의 모델은 일본의 데밍(Deming)상이었다. 일본 제조 업계의 품질관리(QC) 안정에 크게 기여한 미국인 학자의 이름을 딴 상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군수물자를 만드는 기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문제는 엉망인 품질이었다.

미국은 저명한 학자를 일본에 보냈고 후에 일본은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 당시 데밍상은 마쓰시타가 전자부품 부문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우리도 마쓰시타의 보고서를 입수해 공부했다. 일본식 토털 퀄리티 컨트롤(TQC), 품질전임조 활동 등을 모두 그때부터 본격 가동했다. 룰이나 (조직) 문화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을 때였다. 운이 좋게도 난 부품 본부 대표로 직접 참여해 QC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TV 등 전자제품의 생산 라인은 모든 부품이 설비를 중심으로 놓여 있다. 전자제품 조립 쪽은 부품의 부피가 크다 보니 제대로 정리정돈이 안 돼 있으면 라인이 먼지투성이로 지저분해지기 쉽다.

1980년대 초반, 1차 오일쇼크로 가전 불황이 왔을 때 불량 문제가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수원역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담당 직원들과 함께 들어와 엉망진창인 화장실과 라인을 박살낸 적이 있다.

라인은 물론이고 화장실, 식당 등 사원들의 작업 환경이 깨끗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환경에선 절대로 좋은 품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었다. 이 회장은 일본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정리정돈과 청결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생산량에만 급급했지, 그런 일(정리정돈·청결)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탈리아인에게 배운 글로벌 소싱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과학적 방법론은 ‘제조’와 ‘구매’를 가리지 않는다
1979년의 일이다. 어느 날 이탈리아의 구매 전문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가 생산해 내는 압축기의 3분의 1에 이르는 수량을 일괄로 유럽에 팔아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야말로 빅딜이었다.

유럽에 있는 냉장고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마쓰시타와 협상을 끝낸 상태였고 한국에선 삼성과, 말레이시아에선 현지 마쓰시타 공장과 협상을 끝낸 상태였다. 기업 간 경쟁을 붙여 싸게 구입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요구했다. 몇 % 수준이 아니라 몇 십 % 수준이었다. “도저히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원가 구조를 봤을 때 제일 비싼 게 구리다. 구리선을 얼마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리선을 가장 싸게 공급하는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30%쯤 싼값에 납품할 테니 그만큼 깎아 달라. 구리 공급은 내가 책임지겠다. 다른 재료들도 글로벌 소싱을 통해 절약해 주겠다. 대단위 생산인 만큼 생산성이 오를 것이고 그러니 인건비도 깎자.”

정말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채산이 맞을 것도 같았다. 그는 항상 이야기 중 노트를 펴 놓곤 했다. 들여다보니 그 안에 압축기 가격뿐만 아니라 압축기의 원가 구조, 부품·소재 가격과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기업 등이 전부 망라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을 조합해낸 가격 시뮬레이션도 이미 다 갖춰 놓고 있었다.

당시 우리의 구매는 마주 앉아서 “깎아 달라, 안 된다”며 입씨름을 벌이던 수준이었다. 원가 분석을 통해 부품 소싱 방법까지 완벽히 갖춰 주문 요청하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비록 협상은 결렬됐지만 그 이탈리아 구매 전문가의 협상 태도, 분석력, 정보력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수준이었다. 구매라는 건 그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어느 분야보다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 분야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 익힌 구매 경험은 후일 삼성SDI로 간 첫해(1996년) 진가를 발휘했다. 적자였던 경영 실적을 구매 혁신만으로 1조1000억 원을 절약해 흑자로 돌린 것이다. 과학적 분석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브라운관 제작에 필요한 유리를 사오는 데 20, 14, 12인치 등 여러 규격의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협상을 통해 가격을 새로 매겼다. 그런데 유리 무게, 금형 값 등을 계산해 보니 유리 자체의 무게와 원가 가격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턱도 없이 비싼 것도 많았다.

“유리가 이것밖에 들어가지 않는데 왜 이리 비싼가?” 결국 새 가격 구조를 만들어냈다. 원가 구조에 대한 완벽한 분석과 실력을 갖춘 덕분이었다. 무작정 압력을 넣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협력사도 원가를 개선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경기가 얼어붙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합작을 추진 중이었던 에어컨 사업부도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노느니 기획실에 와서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배경이다.

GE와의 협상 과정에서 항상 기획실 사람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획실장은 윤종용 부회장(당시 부장)이었고 그 위에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당시 상무)이 있었다. 윤 부회장은 얼마 후 사업부로 나갔다.

엔지니어가 기획실로 간 까닭

기획실이라고 듣고 갔지만 도대체 기획실이 무얼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업무를 파악해 보니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게 한 달에 한 번 대표이사의 월례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강진구 회장이 요구하는 자료를 올리는 정도였다.

당시 강 회장은 대만의 컬러 TV 방영에 대해 관심이 매우 컸다. 대만은 1974년 컬러 TV를 방영하면서 부품과 부가가치가 완전히 달라지며 전자 산업계 전체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한국을 제친 것도 그때부터다.

그래서 그때 우리 전자 산업계의 숙원도 컬러 TV 방영이었다. 강 회장은 온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청와대에서 김재익 수석 등을 만나 업계의 요구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흑백도 제대로 보급이 안 된 상태에서 컬러 TV가 나오면 국민 정서상 위화감이 생기기 쉽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여담이지만 강진구 회장은 오늘날 삼성전자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기술 경영인이다. 경기도 용인의 삼성 인력개발원에 가면 명예의 전당이 있는데, 현재 유일하게 헌액된 분이 강 회장이다. 강 회장이 있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LG전자를 앞설 수 있었고 대한민국 전자 업계도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획실은 회사의 미래 전략과 발전 방향을 세우는 곳이다. 그런데 하는 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일도 주말에만 바빴다. 강 회장은 주로 서울에서 일을 봤는데, 저녁 늦게 수원에 내려오면 생산 사업부장을 불러 박살을 냈다. 그런 와중에 라인끼리 움직이지 기획실 같은 스태프는 낄 틈도 없었다. 모두가 그걸 당연시했다.

“다음 주 월요일, 화요일에 청와대에 들어가니 이런 자료를 만들라”는 회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1주일 내내 빈둥거리던 사람들이 주말 밤을 새운다고 난리가 나곤 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이병철 회장은 공장을 세우더라도 꼭 도서실부터 만들어 자료 갖춰 놓는 분이었다. 도서관이 마침 기획실 옆이어서 매일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기획·참모·전략에 관한 일본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기획 참모로의 변신이 시작된 것이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