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고 시대 관전 포인트
엔·달러 환율이 11월 1일 1달러에 80.59엔을 기록, 달러 대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1995년 4월 19일의 달러당 79.75엔에 근접했다. 11월 들어서는 80∼81엔대 사이에서 엔·달러 환율이 오르내리고 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9월 14일 1달러에 82엔대를 찍자 다음날인 15일 6년 만에 외환시장에 개입, 약 2조 엔의 엔화를 매도했다.이어 10월 5일에는 사실상의 제로 금리를 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고’라는 큰 파도를 막는 데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 이런 급격한 엔고 현상은 일본의 제조업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엔고 현상이 지속되면 내년 이후의 기업 실적이 나빠져 일본 경제가 더욱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근의 달러 대비 엔 환율은 과거에 비해 다소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엔고 현상과 그에 따른 우려는 1달러에 100엔을 돌파하느냐 마느냐 하던 시기에도 있었던 일이다.
기업들은 70엔대 준비 중 G5(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1985년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의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고 정부의 협조 개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는 등의 내용에 합의했다.
이 플라자 합의 이후 현재까지의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의 추이를 보면 일시적인 하락 국면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상승 국면을 이어왔다.
플라자 합의로 1달러에 240엔대였던 환율은 160엔으로 수직 상승했고 1998년에는 120엔을 돌파했다. 2008년 이후에는 90엔대로 접어들어 현 수준에 도달했다. 1998년 당시에는 1달러가 100엔을 돌파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일본 경제의 화두였다.
1달러에 100엔이 최후의 보루로 이것이 깨지면 일본은 그야말로 위기 상황에 처한다고 난리였다. 물론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국인 일본을 생각한다면 엔고로 기업 실적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언론이 엔화 강세로 80엔대 붕괴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그에 따른 일본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내놓고 있었지만 각 기업들은 이미 70엔대 돌파를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엔고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 진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일본 기업은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회피하기 위해 해외 진출을 해왔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됐다.
일본 경제산업성 통계에 따르면 제조업에서 1985년 8.7%였던 해외 생산 비율이 2008년 31%에 달했다. 기업들은 해외 진출과 함께 자국 내에서도 피나는 원가 절감을 하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다시 말하면 기업들은 해외 진출을 통해 엔·달러 환율 변동 리스크에 대응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최대한 비용을 절감하는 극한의 합리화 정책을 병행함으로써 엔고 국면을 돌파하는 선제적인 대응을 해 온 셈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1달러에 70엔대 진입을 눈앞에 둔 엔고 현상이 도래하자 엔고에 따른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바로 해외 생산을 확대하거나 새롭게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다.
우선 자동차 산업은 2007년에 국내 생산 비율과 해외 생산 비율이 역전됐고 지난해에는 국내 생산 비율이 43.4%로 떨어졌다. 해외 생산 비율은 계속 증가해 올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51%가 늘어난 642만 대를 해외에서 만들었다.
도요타는 지난해까지 약 50%, 닛산과 혼다는 약 70%까지 해외 생산 비율을 높여 왔다. 빅 3로 불리는 이들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향후 해외 생산 비율을 늘릴 방침이다. 도요타는 국내 생산만을 고집해 왔던 주력 차종 ‘카로라’의 해외 생산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 회사들이 해외 생산 비율을 높이자 국내 생산만을 고집했던 대형 부품 업체들도 생산 설비를 해외로 속속 옮기고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필수 부품인 각도 센서를 생산하며 세계시장의 100%를 점하고 있는 타마가와정기는 도요타와 혼다의 해외 생산 확대 방침에 따라 창업 72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내년 1월부터 현지 생산에 들어간다.
해외 생산을 늘리는 것은 자동차 업계뿐만 아니라 다른 제조업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초대형 전자 부품 메이커인 무라타제작소는 현재 15%인 해외 생산 비율을 2013년까지 30%로 늘리기로 했고 후지쯔도 현재 25%에서 2013년까지 40%로 확대할 방침이다. 액정 패널 장치 대형 제조 업체인 얼백(ULVAC)도 2015년까지 현재의 2배 수준인 60%까지 해외 생산 비율을 높이기로 했다.
이처럼 제조업이 해외 생산 비율 확대나 새로운 해외 생산 기지 건설을 통해 엔고에 대응하고 있다면, 비제조업 분야는 인수·합병(M&A)을 통한 해외 진출로 엔고에 대비하고 있다.
톰슨 로이터 데이터에 따르면 올 들어 6월까지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M&A는 금액 기준으로 1조8089억 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80% 증가했다. M&A 건수는 227건으로 35% 늘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일본 기업의 M&A가 제지·출판 등 전형적인 내수형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제지의 오스트레일리언 페이퍼 매수, 스미토모임업의 호주 주택 판매 회사 매수, 야마토홀딩스의 중국 물류 회사 매수 등과 같이 내수형 특화 기업들이 해외 기업의 M&A를 통해 해외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대기업들은 해외 진출 확대, 해외 생산 확대, M&A를 통한 시장 개척의 방법으로 최근의 엔고 국면을 타개해 가고 있다. 제조업 공동화 우려…중소기업은 전전긍긍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엔고에 따른 이익 감소, 가격 경쟁력 약화 등의 직격탄을 맞고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물론 기업 규모가 작더라도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 경쟁 우위에 있는 기업이나 자금력이 풍부한 중소기업은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들은 사업을 축소하거나 정부의 대응을 촉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제산업성의 8월 조사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이 1달러에 85엔 수준이면 중소기업의 50%가 이익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환율이 지속되면 기업의 73%가 이익이 줄어들고 그중 39%는 생산 및 개발 거점을 해외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조사 대상 기업 중 60%는 해외 생산 비율을 높이겠다고 응답했다.
해외 생산 비율 확대나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은 비교적 상황이 나은 편이다. 그렇지 못한 많은 기업들이 엔고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은 감원, 사업 축소, 폐업이나 전업을 검토하며 정부의 금융 지원책 등만을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경제신문 10월 22일자 기사는 이런 중소기업의 복잡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의 중소 제조업체들이 밀집돼 있는 타마지구를 취재한 이 기사는 엔고로 해외의 경쟁 상품보다 가격이 비싸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기업, 엔고에 따라 이익이 감소되더라도 거래처에 가격 인상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기업들의 어려운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 정밀 기술을 보유하고 시장의 평가도 좋은 기업들마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졌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기업들의 엔고 극복 방안은 해외 생산 비율의 확대 및 신규 해외 진출 등으로 집약된다. 제조업의 해외 진출은 기업의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방법이겠지만 장기적으로 일본 내의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은 이런 방법조차 강구하지 못하고 정부의 시책만을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다. 엔고 시대가 새롭게 다가옴에 따라 일본 기업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김홍영 법무법인 지평지성 전문위원
일본 규슈대 대학원 법학부 박사과정 수료.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방문연구원. 규슈대 법학부 협력연구원. 법무법인 지평지성 일본담당 전문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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