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제26회 반도체대전 SEDEX 2024’ SK하이닉스 부스에서 AI 관련 영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제26회 반도체대전 SEDEX 2024’ SK하이닉스 부스에서 AI 관련 영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최근 ‘삼성 위기론’과 더불어 가장 많이 주목받는 이슈 중 하나는 ‘SK의 저력’이다. SK하이닉스는 일각의 ‘반도체 겨울론’을 비웃듯 올해 3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수요가 폭증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이 주효했다.

삼성전자는 32년간 지켜온 ‘메모리 1위 왕좌’도 SK하이닉스에 넘겨줄 전망이다. SK하이닉스가 올해 분기 영업이익에서 잇따라 삼성전자를 추월한데 이어 올해 연간 영업이익에서도 삼성전자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수요가 미쳤다”고 밝힌 최신 AI 가속기인 ‘블랙웰’에 들어갈 HBM3E 12단 제품을 독점 공급하고 있는 반면 아직 삼성전자 제품이 엔비디아의 퀄 테스트(품질 검증)를 통과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외신에서는 최근 엔비디아가 HBM3E 공급 부족을 이유로 삼성전자 제품을 ‘조건부 승인’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회사의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흔들리는 ‘기술의 삼성’, 치고 나가는 SK
삼성전자가 경쟁사인 SK하이닉스와의 HBM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지난 7월 ‘9만전자’를 바라보던 주가도 최근 ‘5만전자’로 내려앉았다. HBM 개발 타이밍을 놓쳤고 AI 중심의 반도체산업 패러다임 전환에 늦은 것이 주요인으로 지목된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 주가는 약 26% 하락했지만 SK하이닉스는 37% 상승했다. 블룸버그는 최근 삼성전자의 부진한 주가 흐름에 대해 “AI 열풍에 뒤처진 대가”라고 분석했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돈 먹는 하마를 백조로 만든 건 총수 리더십


재계에서는 “SK가 재계 1위 삼성을 뛰어넘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반도체 사업 히스토리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처음부터 황금알을 낳지는 않았다. SK그룹이 인수한 2012년 연간 2000억원대 적자를 냈다. 최태원 회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산업과 하이닉스의 잠재력을 보고 3조4000억원에 인수를 결정했고 조 단위 투자를 단행했다.

하이닉스는 SK그룹에 편입된 이후 10년간 매출이 약 4배, 영업이익은 약 34배 증가하며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다.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로 사업 영역을 정유와 통신에서 반도체로 확장했고 이를 통해 내수 기업의 한계를 벗어나는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

반도체 시장은 제품 수명 주기가 매우 짧고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는 장치 산업의 특성 때문에 매년 수조원대의 연구개발(R&D) 및 설비 투자가 필요한 만큼 총수의 결단과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차세대 기술개발 성공이 불가능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천포럼 2024’ 폐막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SK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천포럼 2024’ 폐막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SK
남들 10%씩 줄일 때 공격 투자…HBM 선두 비결

‘만년 2위’ SK하이닉스가 삼성 추격자에서 초격차 선두로 올라서게 된 데에는 최태원 회장의 글로벌 AI 리더십과 뚝심 있는 투자를 빼놓을 수 없다.

SK그룹의 AI와 반도체 전략은 총수가 직접 지휘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물리학과 출신으로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만 하이닉스 인수 전후로 반도체 스터디 모임까지 조직하며 ‘열공’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틈날 때마다 기술 트렌드를 점검하기 위해 글로벌 빅테크 CEO, AI 석학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 회장은 지난 4월 젠슨 황 CEO를 만난데 이어 웨이저자 TSMC 이사회 의장, 샘 올트먼 오픈AI CEO, 사티아 나델라 MS CEO, 앤디 제시 아마존 CEO, 팻 겔싱어 인텔 CEO 등 글로벌 AI 거물들을 잇따라 만났다. SK하이닉스의 HBM 성과에는 최태원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SK하이닉스는 HBM을 포함한 메모리 전 분야 R&D에 매년 조 단위의 공격적 투자와 함께 2015년부터 46조원을 투입해 M14, M15, M16 등 신규 공장을 준공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에서 “SK그룹에 편입된 게 2012년인데 그때부터 메모리 업황이 좋지 않아서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이 투자를 10% 이상씩 줄였지만 SK그룹은 투자를 늘리는 결정을 했다”며 “당시 투자를 확대하는 결정이 전 분야에 걸쳐 이뤄졌고 거기에는 시장이 언제 열릴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있는 HBM 투자도 포함됐다”고 밝힌 바 있다.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의 M16팹 전경. 사진=SK하이닉스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의 M16팹 전경. 사진=SK하이닉스
‘삼하’→‘하삼하’로 인력 대이동…언더도그 반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언더도그였던 SK하이닉스가 HBM을 무기로 선두주자에 올라선 데에는 조직문화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전폭적인 투자와 함께 토론과 소통 문화, 성과보상제도에서 직원 만족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지난해 8조원에 가까운 영업적자로 성과급을 주지 못하는 대신 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기극복 격려금 120만원을 지급했고 4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하자 직원들에게 자사주 15주와 격려금 200만원씩을 지급했다.

지난해 15조원에 육박하는 적자를 낸 삼성전자 DS부문은 초과이익 성과급(OPI)이 연봉의 0%로 책정돼 내부 불만이 커지며 노동조합 가입자 수가 급증하기도 했다.

최근 삼성전자 출신 한 유튜버가 삼성전자 전·현직 3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영상이 화제가 됐는데 이 조사에서 전·현직 직원들은 삼성의 위기 원인으로 기술 경쟁력 저하와 조직문제를 주원인으로 꼽았다. 위기 타파를 위해선 차등성과제 도입 등 보상체계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핵심 인재 유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채용업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전자에서 SK하이닉스로 이직한 ‘삼하’뿐 아니라 SK하이닉스에서 삼성전자로 갔다가 다시 SK하이닉스로 돌아오려는 ‘하삼하’ 현상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AI 반도체 훈풍에 역대급 실적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 중인 SK하이닉스는 업계 내 위상 변화에 내부적으로 사기도 충만한 상태다. 올해 창립 41주년을 맞아 뉴스룸에 게시한 글을 통해 ‘글로벌 넘버원(No.1) 인공지능(AI) 메모리 기업으로 도약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강욱 SK하이닉스 PKG(패키징)개발 담당 부사장은 HBM을 ‘하이닉스 베스트 메모리(Hynix Best Memory)’라고 지칭하면서 “HBM은 SK하이닉스가 처음 세상에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했다. HBM 주도권을 차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독주를 굳히기 위해 2028년까지 향후 5년간 총 10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투자액 중 80%(82조원)를 HBM 등 AI 관련 사업 분야에 쏟는다. AI 사업 투자의 대부분은 설비 증설에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HBM 등 AI 메모리 수요 폭증에 따라 생산능력을 확대해 주도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