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빵 달인의 계보 만들다

[Special ReportⅠ] 불굴의 집념과 열정…한국의 제빵왕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인기다. 시청률 40%를 웃돌고 있다. 김탁구의 집념이 부럽고 팔봉선생의 철학이 멋있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김탁구나 팔봉선생 같은 인물은 없을까.

최고의 ‘봉빵’을 만들기 위해 20년, 30년간 한 우물을 파 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을 만났다. 내 제빵 시장은 4가지 분야로 나뉜다. 윈도 베이커리, 양산빵, 프랜차이즈, 인스토어 베이커리 등이다.

윈도 베이커리는 이른바 독립 제과점으로 한국 제빵 산업을 주도했다. 1945년 광복 첫해 제과점 간판을 내건 태극당·고려당·뉴욕제과 등이 선발 주자다. 1947년 영일당(크라운제과의 전신), 독일빵집 등이 뒤를 쫓았다.

양산빵은 기업이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다.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삼립식품·샤니·서울식품·기린 등이 양산빵 시대를 열었다.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1970년대 말부터 뉴욕제과·고려당·독일빵집 등이 확장 정책에 따라 프랜차이즈 형태의 분점을 내면서 시작됐다.

이후 1984년 신라명과, 1986년 파리크라상, 1988년 크라운베이커리 등이 뛰어들면서 윈도 베이커리를 위협하는 강자로 떠올랐다. 2000년 이후에는 호텔·백화점·마트 등에서 빵을 파는 인스토어 베이커리가 활성화되면서 규모가 커지고 있다.

한국 제빵 시장을 주도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윈도 베이커리와 프랜차이즈 제과점이다. 한국제과협회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윈도 베이커리가 4400여 개점,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4300여 개로 엇비슷하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는 주인공 김탁구가 팔봉빵집에서 제과 명장인 팔봉선생으로부터 기술을 배운 뒤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아 크게 성공한다.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프랜차이즈 제과점인 파리크라상과 파리바게뜨를 경영하는 허영인 SPC그룹 회장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허 회장은 창업자인 고 허창성 삼립식품 회장의 둘째 아들로 미국의 유명 제빵 학교인 AIB(American Institute of Baking)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뒤 삼립식품에서 분사한 샤니의 경영을 맡아 국내 1위 기업으로 키웠다.

7명의 명장은 공인된 제빵왕들

프랜차이즈와 인스토어 분야에서도 허 회장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SPC의 파리바게뜨가 프랜차이즈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데다 인스토어에서도 샤니와 삼립식품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 회장은 기술자가 아닌 경영인이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도 아니다. 무엇보다 양산빵이나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빵이 정상급 윈도 베이커리의 품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대다수가 냉동 반죽을 사용한다. 윈도 베이커리는 즉석에서 반죽해 구워 준다. 양산빵은 손맛이 아닌 기계의 힘으로 생산된다. 김기설 월간 베이커리 편집장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윈도 베이커리보다 득세하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면서 “장인 정신이 녹아 있는 윈도 베이커리가 향후 대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제빵왕’의 개념을 규모로 따진다면 당연히 허 회장이 한국 최고의 제빵왕인 것은 틀림없다. 다른 한편 윈도 베이커리를 고집하며 40년, 50년간 ‘최고의 빵’을 만들기 위해 정진해 온 명장들도 허 회장과는 다른 의미의 제빵왕이다.

간혹 재야에서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최고의 경지에 오른 빵의 달인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국가가 명장으로 선정한 최고의 실력자들부터 살펴볼 수 있다. 최소 20년 이상 제빵업에 종사해야 하고 각종 대회나 출판을 통해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아야 명장 자격이 주어진다. 이름이 알려지고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들이 사업상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거뒀다는 의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한 제과·제빵 명장은 단 7명이다. 권상범·김영모·김종익·박찬회·서정웅·안창현·임헌양 명장(가나다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을 지독한 가난으로 보냈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적어도 20년 이상 스승의 제과점에서 배움의 길을 걸었고 기어코 일본 등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독립해서도 크게 욕심부리지 않았고 품질에 대한 자존심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권상범 명장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다. 1968년 제과점에 취직해 40년 동안 빵 만드는 일에만 매진했고, 결국 리치몬드제과점과 기술학원 경영자로 크게 성공했다.

김영모 명장은 ‘김영모 과자점’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이다. 서초본점 등을 운영하면서 빵으로만 연 1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역시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열일곱 살에 경북 김천의 한 제과점에서 빵집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나폴레옹과자점 등을 거쳐 1982년 서초동에 20㎡(6평)짜리 가게를 얻어 자신의 이름을 딴 ‘김영모과자점’을 세웠다.

김종익 명장은 대한민국 제과기능장협회 고문으로 서울 압구정동에서 김종익 제과를 운영하고 있다. 김 명장은 1950년 제과 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6·25전쟁 당시 가족이 서울로 피란 왔고 부친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곰보빵’을 만들어 파는 공장을 운영하면서 그의 제빵 인생이 시작됐다.

박찬회 명장은 국내 명장 1호로 인천에서 박찬회 화과자를 운영하고 있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박 명장은 10대 후반 뉴욕제과에서 제빵 업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유명 제과점의 공장장을 지내다 일본의 제과 및 양과학교에서 기술을 배운 뒤 ‘고수’ 반열에 올랐다.

서정웅 명장은 현재 대한제과협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 가락동에서 코른베르그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선진 제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벨기에 푸라토스사 등 국내외 교육기관 26곳에서 연수를 받았을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7명의 명장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안창현 명장은 안스베이커리 대표다. 대한제과협회에서 기술지도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임헌양 명장은 신라명과 고문으로 1965년부터 미8군 내 클럽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빵 만들기를 배웠다. 1970년 조선호텔 제과부에 스카우트돼 호텔 업계에 진출했고 1978년 호텔신라 제과사업부 창립에 참여했다.

7명 명장 중 3명이 김충복 선생 사사
[Special ReportⅠ] 불굴의 집념과 열정…한국의 제빵왕들
7명의 명장은 현업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제빵왕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가 수여한 명장 타이틀은 없지만 명장을 키운 선배들이 앞 세대에 포진해 있다. 권상범·서정웅·박찬회 명장 등은 광복 후 60년간 국내 제과·제빵 업계를 주도한 인물들을 3세대로 구분했다.

1세대는 공윤택·김환식 씨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으로부터 제빵 기술을 배웠다. 공윤택 씨는 고려당에서 오너가 아니면서도 판매와 생산 일체를 책임졌다. 일본에서 열린 한 제빵 대회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1등에서 2등으로 강등되자 홧김에 일본인 심사위원에게 주먹을 날리고 돌아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2세대인 박근성 씨가 공 씨를 사사했다. 김환식 씨는 고려당과 풍년제과의 공장장을 지낸 인물로 그 시절 공윤택 씨와 쌍벽을 이뤘다. 김종익 명장이 스승으로 모셨다.

2세대는 김충복·박근성·김종익 씨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충복 씨는 권상범·서정웅·박찬회 씨 등 3명의 명장이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권상범 명장은 “선생은 당대 최고의 제빵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회고했다.

박근성 씨는 국내 화과자의 실력자로 일본 도쿄제과학교 한국인 유학생 1호로 알려져 있다. 1세대인 공윤택 씨로부터 고려당 공장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3세대는 김종익 명장을 제외한 나머지 명장들이 해당된다.

명장들을 언급하면서 나폴레옹과자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폴레옹과자점은 한국 제빵 업계의 사관학교다. 7명의 명장 중 권상범·서정웅·김영모 명장 등 3명이 나폴레옹과자점을 거쳤다.

1980년부터 15년간 생산 책임자로 일한 서정웅 명장은 나폴레옹과자점의 창업자인 고 강인정 초대 사장에 대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회고했다.

나폴레옹과자점의 강인정 초대 사장은 기자 출신으로 일본 저널리스트들과 친분이 있어 자주 일본을 왕래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1970년 초반에 이미 직원들을 일본으로 보낼 정도로 깨어 있었다. 양인자 나폴레옹과자점 대표는 “(강 초대 사장이)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직원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았었다”며 “규모의 확장보다 최고의 품질을 지키는데 더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1년에 3~4명은 회사 경비로 유학을 보낸다는 게 양 대표의 전언이다.

나폴레옹과자점 출신들은 ‘거암회’라는 친목 모임을 결성하고 지금도 한 달에 한번 모인다. 모임 회장인 권상범 명장은 “모임에 13~14명이 참석한다”며 “나폴레옹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돋보기 서정웅 대한제과협회장

“장인 정신이 우리가 살길”
[Special ReportⅠ] 불굴의 집념과 열정…한국의 제빵왕들
제과·제빵인들의 모임인 대한제과협회를 이끌고 있는 서정웅(62) 대한제과협회장. 2005년 제과 명장에 선정된 인물로 서울시 가락동에서 코른베르그 과자점을 운영하고 있다.

전남 순천 출신으로 열아홉 살에 3등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상경한 서 회장이 명장으로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자고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에 혹해 도매 과자를 만드는 제과 공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부터 고생길은 시작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과자만 구웠다”는 그는 다니던 도매 공장이 문을 닫아 할 수 없이 10㎡(3평) 남짓한 소규모 자영 제과점에 들어갔다.

전화위복이었다. 그곳에서 “오븐만 있으면 나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됐다는 그는 1969년 태극당으로 옮겨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틈틈이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가 나폴레옹과자점의 강인정 초대 사장을 만나면서 1980년부터 나폴레옹과자점의 생산 책임자로 15년간 일했다. 강 사장의 지원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제과학전문학교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일본 제빵연구소 3개월 연수를 다녀왔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작성한 기술 노트가 두꺼운 대학 노트로 22권이 될 정도로 피나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기본을 고수한다. 1995년 코른베르그 과자점의 문을 연 지 15년째지만 그는 프랜차이즈로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 없다. “작은 과자 하나라도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장인 정신이야말로 우리 제과 기술자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서 회장은 대기업들이 프랜차이즈 제과점 사업에 뛰어들면서 윈도 베이커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대해 협회장으로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무한 경쟁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자구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후배 양성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서 회장은 후배들에게 “10년은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년이 되기 전에는 진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묻자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손에서 빵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 사진=서범세·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