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하는 가계 부채 기관차


빚을 내 살림을 꾸려가는 가계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작년 9월 말 기준으로 한국 가계의 부채 총액(가계 신용 기준)은 892조4571억 원을 넘어섰다. 전국 2001만9850가구에 가구당 4458만 원씩 나눠줄 수 있는 엄청난 액수다. 아직 공식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해 가계 신용 잔액은 900조 원을 가뿐히 돌파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부채의 증가 속도다. 우상향으로 가파르게 치솟은 가계 부채 그래프는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9~2010년까지 11년 동안 가계 부채는 연평균 13% 증가해 같은 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7.3%를 훨씬 넘어섰다. 주목할 것은 주택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가계 부채 증가세가 전혀 꺾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000조원 가계 부채 시대] ‘생계형 대출’ 급증… 금융시장 시한폭탄
저소득층·비은행권이 증가세 주도

가계 부채의 적정성을 재는 대표적인 지표는 GDP 대비 가계 부채비율과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비율이다. 한국은 가계 부채가 GDP의 85.9%(2009년)로 금융 위기 직격탄을 맞은 미국(100.2%)이나 영국(11.0%)보다 낮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CED) 평균(77.0%)과 일본(80.4%)보다 높은 수준이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비율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 수치가 152.9%로 미국(132.0%)마저 앞지르고 있다. 최원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비율이 낮아지는 추세”라며 “반면 한국은 2009년 152.9%에서 2010년 155%로 계속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가계가 빚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으로 기업들의 대출 수요가 감소하자 금융회사들이 공격적으로 가계 대출 시장 개척에 뛰어든 결과였다. 1999~2002년 4년간 연평균 24.3%씩 가계 부채가 급증했다. 당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카드사들이다. 2000년 여신 전문 금융회사의 가계 대출(카드론·현금서비스)이 한 해 동안 무려 107.4%나 증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터진 카드 사태로 가계 부채는 일시적인 조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5년 부동산 경기의 이상 과열과 함께 주택 담보대출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수도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값이 뛰자 시중 자금이 주택 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2006년 수도권 아파트 값이 한 해 동안 24.6% 뛰었고 같은 기간 은행 주택 담보대출도 14.1% 증가했다.

가계 부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다소 걱정스러운 수준이지만 가계 부채발 금융 위기 가능성은 낮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낙관론은 상당 부분 집값 하락에 대비해 일찌감치 담보인정비율(LTV)을 규제하는 안전장치를 해놓았다는 데 의존한다. 실제로 한국의 LTV는 47% (2009년 말)로 미국(75%) 등 다른 선진국보다 훨씬 낮다. 집값이 반 토막 나도 은행들은 담보로 잡은 주택을 처분해 충분히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가계 대출 부실이 금융회사 부실로 전이될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시스템 리스크의 가능성이 낮은 건 분명하지만 가계 부실, 가계 파탄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말했다.

최근 가계 부채의 질과 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은행이 낸 ‘금융 안정 보고서’는 최근 주택 구입 목적보다 생활형 자금 성격의 가계 대출이 가계 부채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택 담보대출 중 주택 구입 이외의 목적 대출 비중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꾸준히 상승해 작년 상반기 48.4%로 올라섰다. 같은 기간 신용 대출과 신용카드 대출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YONHAP PHOTO-0466> 경제정책조정회의 김석동 금융위원장
(과천=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6일 오전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이날 회의에서 박 장관은 "가계부채나 저축은행의 구조조정 문제는 손에 쥔 달걀과 같아서 힘을 너무 세게 주면 깨지고 약하게 주면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2011.7.6
    xyz@yna.co.kr/2011-07-06 08:50:03/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경제정책조정회의 김석동 금융위원장 (과천=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6일 오전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이날 회의에서 박 장관은 "가계부채나 저축은행의 구조조정 문제는 손에 쥔 달걀과 같아서 힘을 너무 세게 주면 깨지고 약하게 주면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2011.7.6 xyz@yna.co.kr/2011-07-06 08:50:03/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이처럼 ‘생계형 대출’이 늘어난 것은 가계의 주머니 사정이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득 감소와 물가 상승이 겹친 결과”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까지 실질임금 증가율은 마이너스 3.49%로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9.3%),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던 2008년(-8.5%)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치다.

생계형 대출의 주 수요층은 벼랑 끝에 내몰린 저소득층이다. 연소득 2000만 원 미만인 저소득 계층이 가계 대출 창구를 두드리고 있다. 현재 저소득 계층의 대출 잔액은 전체 가계 대출의 12%에 불과하지만 2010~2011년 상반기까지 대출 증가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달했다. 이들은 채무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 대출금리도 고소득 계층보다 높아 부실화 가능성이 크다.

비은행권이 가계 부채 증가를 주도하는 것도 새로운 변화다. 2010~2011년 상반기까지 비은행 금융회사의 가계 대출 증가율(17.95)은 은행(8.5%)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상호금융의 약진이다. 한국은행은 지방 주택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면서 지방 소재 상호금융사들이 주택 담보대출에 강한 드라이브를 건 때문으로 분석했다.
[1000조원 가계 부채 시대] ‘생계형 대출’ 급증… 금융시장 시한폭탄
전체적으로 가계 부채의 중심축이 상환 능력이 탄탄한 중상위 소득 계층(3~5분위)에서 저소득 계층으로, 금리가 낮은 은행에서 금리가 높은 비은행권으로, 자산 증가를 동반하는 주택 구입에서 생계형 대출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가계 부채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증가세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출을 무리하게 죌 경우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계 부채의 딜레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