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효율성 전면 재검토 나서…한은법 개정 본격화 전망

10일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열린 취임후 첫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한 이주열 한국은행총재가 회의시작전 비장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이호재기자.
10일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열린 취임후 첫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한 이주열 한국은행총재가 회의시작전 비장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이호재기자.
‘베이지색일까 분홍색일까?’

지난 4월 10일 아침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15층. 취임 열흘째를 맞은 이주열 한은 총재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석에 앉았다. 기자들 사이에선 그의 ‘넥타이 색깔’을 놓고 잠시 논쟁이 벌어졌다. 노란빛 계열에 붉은 점이 박힌 넥타이. 김중수 전임 총재는 임기 초기 붉은색 또는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금통위에 등장했고 시장에서는 그 색깔에 따라 그날의 금리 변화를 예측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이 총재의 넥타이 색은 무난하면서도 복잡했다. 시장의 억측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한 시간 뒤 금통위가 11개월째 기준 금리를 동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파장 낳은 실·국장 전격 인사
2년 만에 남대문로로 돌아온 ‘정통 한은맨’ 이주열 총재가 이끄는 한은의 4년은 어떤 모습일까. 첫 금통위 회의 날 그가 매고 나왔던 넥타이 빛깔처럼 이주열의 ‘뉴 플랜’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지난 3월 국회 인사청문회는 별다른 논쟁 없이 일사천리로 마무리됐다. 4월 1일 취임식도 간소하고 조용했다. 이 총재는 취임 직후 금통위 준비에 주력했고 회의 직후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은의 고위 관계자는 “부서별 업무 보고를 아직 본격적으로 못했다”며 “향후 한은이 어떻게 바뀔지 내부에서도 궁금증이 쌓인 상태”라고 전했다.

하지만 변화는 보이지 않게 시작되고 있다. 이 총재는 취임 사흘째에 예상치 못했던 실·국장 인사를 단행했다. 6명이 이동하는 ‘소폭 인사’였지만 그 파장은 작지 않았다. 기획협력국·인사경영국·커뮤니케이션국·비서실 등 총재 가장 가까이에서 경영 시스템을 책임지는 부서장들이 싹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서실장을 새로 맡은 김현기 자본시장팀장, 인사경영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임형준 통화정책국 부국장은 이 총재의 청문회 준비 태스크포스(TF) 팀에서 일찌감치 총재와 보조를 맞춘 인물들이다. 한은 출신의 한 외부 인사는 이에 대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들로 경영 시스템을 새로 구성한 것 같다”며 “이 조직을 중심으로 향후 한은의 경영 방식이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직 개편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정기 인사가 잡힌 오는 8월까지 기다리지 않고 측근 물갈이에 나선 배경은 취임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총재는 “조직 관리와 관련해서는 시스템과 효율성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부작용을 드러낸 조치가 있다면 조속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김중수 전 총재 때 이뤄진 조직 개편 작업을 손볼 것을 시사했다. 이 총재는 2012년 4월 부총재로 퇴임할 때 “60년에 걸쳐 형성된 고유의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됐다”며 당시 김 전 총재의 파격 인사를 비판한 바 있다.

따라서 향후 한은의 방향은 어느 정도 ‘과거’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외부에서 수혈됐던 김 전 총재와 달리 이 총재는 통화정책이라는 한은 본연의 기능을 강조해 왔다. 우선 공개시장조작 등 통화정책 핵심을 수행하는 금융시장부를 2년 만에 다시 ‘금융시장국’으로 격상시킬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은의 한 팀장은 “한은의 통화정책을 받치는 ‘정책 라인’이 다시 보강될 것으로 보인다”며 “조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이 총재가 머릿속으론 벌써 80% 이상 구상해 놓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어떤 방식이든 조직을 크게 흔들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은 다른 조직과 달리 안정성이 중요하다”고 밝혀 왔다. 오랜 기간 쌓아 온 실적과 평판이 가장 중요한 인사 기준이라고도 강조했다. 전임 총재 시절 한직으로 물러났던 인사들의 ‘컴백’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한 차례 인사를 제외하면 지금까지는 대체로 차분한 행보다. 이 속에서 이 총재의 자신감을 읽는 사람도 많다. 한은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며 과거 부총재까지 맡았던 만큼 통화정책의 최전선이 어색한 상황도 아니다. 금통위 데뷔전이었던 지난 4월 10일에도 여론으로부터 대체로 합격점을 받았다. 기자간담회에서는 구체적이지만 간결한 답변으로 메시지의 혼선을 최소화했다. ‘수요 측면의 물가상승 압박이 커지면 금리 인상을 선제적으로 논의할 것’이라며 향후 금리정책과 관련한 기준점도 제시했다.

시장이 눈여겨본 것도 이 지점이었다. 문홍철 동부증권 연구위원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지침)만큼 구체적인 수치 기준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시장이 금리 인상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줬다”며 “통화정책의 전문성이 높은 만큼 총재 한마디의 영향력도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총재 발언 영향력 커질 것
이 총재의 이날 발언 뒤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꺾이며 채권 금리는 상승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가 외환시장의 쏠림을 지적한 직후 원·달러 환율 하락세도 진정됐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총재가 앞으로도 일관된 메시지를 준다면 시장의 신뢰도가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시험대는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미국 양적 완화 축소(테이퍼링)와 금리 정상화(인상)가 진행되면 국내 금융시장에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칠지 알 수 없다. 물가 상승과 외국인 자금 유출 등에 대응해 금리를 조기 인상해야 할 수도 있다. 이때 1000조 원을 넘어선 가계 부채 상환 부담이 높아지고 가까스로 상승세를 잡은 내수 경기가 꺾일지도 모른다. 소비와 투자 등 내수 살리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정부엔 최악의 시나리오다. 성장에 다급한 정부와 물가 안정이 목표인 한은이 금리 향방을 놓고 또 한 번 기 싸움을 벌일 수도 있다.

이 총재 취임 다음날인 4월 2일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전격적으로 한은을 방문한 것은 향후 정책 조율 면에서 의미가 컸다. 과거 금융위원회에서 이 총재와 협업해 봤던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책 조율 면에서 이 총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며 “큰 불협화음은 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한은 출신답게 통화정책의 중립성을 강조하면서도 청와대에서 주재하는 서별관회의 사안에 따라 참석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히는 등 합리적 면모를 보였다. 이번 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회의는 현오석 부총리와 팀워크를 발휘할 첫 기회이기도 했다.

이 총재의 행보에 주목받는 부분은 또 있다. 한은의 역할과 위상에서 새로운 청사진을 그릴 가능성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물가 안정뿐만 아니라 금융 안정과 성장 또한 조화롭게 추구하는 게 국민의 시대적 요구”라고 밝혔다. 특히 금융 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금융 안정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2011년 한은법 개정 당시 한은은 금융 감독을 위한 단독 조사권을 추진했지만 금융감독원 등의 반대 속에 실패한 전례가 있다.

한은에서는 이미 금융 감독 권한을 쥔 영국중앙은행의 조직 개편 사례, 미국 금융안정감독위원회 등 협의체를 통한 감독 구조 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 총재가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해 보겠다고 밝힌 터라 임기 중 한은법 개정을 포함한 역할 확대 작업이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관건은 금융 당국과 국회의 협력을 어떻게 얻어내느냐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한은의 역할 모델을 그릴 때도 됐다”며 “통화정책 수장이자 조직의 리더로서 이 총재의 역량이 조만간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유미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