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출장소 오명 벗은 지 20년, 독립성 크게 높아져

한국은행 총재가 통화정책의 사령탑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채 20년이 되지 않는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전 한국의 금리 수준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수장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역할이었다. 한은 총재는 금통위 위원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그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했다. 한때 한은은 ‘재무부의 남대문출장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은행감독원이 한국은행에서 분리되고 1998년 한은법이 개정되면서 금통위 의장으로 한은 총재가 된 후 임명된 총재는 신임 이주열 총재를 포함해 현재까지 총 5명이다. 이들 모두 임기 4년을 꽉 채우고 퇴임했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고 전철환 총재는 외환위기, 박승 총재는 카드 사태, 이성태 총재는 글로벌 금융 위기, 김중수 총재는 유럽 재정 위기 등 각 총재의 재임 기간마다 커다란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며 “각각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금리정책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이주열의 뉴 한은 플랜_역대 한은 총재 평가] 박승·이성태 ‘굿잡’…김중수는 ‘갸우뚱’
전철환, ‘독립 1호 총재’ 영광
한은의 21대 총재로 취임한 전철환 총재(1998년 3월~2002년 3월)는 정부로부터 금통위 수장의 바통을 넘겨받은 첫 총재여서 ‘독립 1호 총재’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금융정책을 총괄했으며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던 역사적 순간에 상환 서명을 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취임 초기 연 20%가 넘었던 콜금리를 재임 기간 중 단계적으로 연 4%대까지 낮춤으로써 경제 회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전 전 총재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국채 시장의 활성화다. 한국은행 출신의 한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한은이 직접 인수하는 형식으로 국채가 운용됐는데, 전 전 총재는 직접 인수를 ‘단호히’ 거부하고 시장 발행을 유도했다. 이에 따라 한국 국채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고 금리정책에 매우 중요한 ‘이자율 기간 구조’가 채권 만기별로 형성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의 금리 중심 통화정책의 인프라는 전 전 총재 덕분에 구축됐다”고 했다.

하지만 쓴소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은 출신의 한 경제학자는 “교수 출신 총재로 학문적인 접근만 했기 때문에 통화정책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했고 내부 경영 측면에서도 동향 출신을 발탁하면서 잡음이 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골프를 하지 않고 등산을 즐겼던 전 전 총재는 한은 총재 시절에도 휴일엔 관용차와 운전사를 마다한 채 프라이드 승용차를 고집하는 소박한 모습으로 귀감이 됐다. 그는 2004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박승 22대 한은 총재(2002년 4월~2006년 3월)는 ‘카드 대란’과 맞서야 했다. 전문가들은 박 전 총재를 경제성장을 중요시하는 ‘비둘기파’로 분류한다. 그는 카드 사태 이후 국내 경기가 예상보다 빨리 회복됨에도 불구하고 기준 금리(당시 콜금리)를 4.25%→4.00%(2003년 5월 13일), 4.00%→3.75%(2003년 7월 10일), 3.75%→3.50%(2004년 8월 12일), 3.50%→3.25%(2004년 11월 11일) 등 총 4차례에 걸쳐 인하했다. 박 연구위원은 이 같은 금리 결정이 결과적으로 수도권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도 “박 전 총재 재임 기간에 국제 유가 상승으로 물가가 오를 것으로 예측되는 데도 ‘5% 내외의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기준 금리를 내렸다”고 했다.

박 전 총재는 한국은행 총재로선 최초로 시장과 본격적으로 대화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임기 중 서울 강남과 강북의 개발 불균형, 교육 문제 등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거침없이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과감하고 솔직한 발언’이 그를 공격하는 화살로 돌아오기도 했다.

한편 그를 정무적 판단이 뛰어난 인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한 연구위원은 “대학교수, 건설교통부 장관, 청와대 경제 수석 등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시야가 넓은 편”이라며 “대학 졸업 후 한은에서 직원으로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한은의 독립성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며 관료 경험을 통해 필요한 경우엔 정부와의 협력 등 전체적인 그림에서 금리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이성태 23대 한은 총재(2006년 4월~2010년 3월)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적극적인 금리 인하와 한미 통화 스와프 등을 통해 위기를 무난히 넘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물가 안정 없인 경제성장도 없다는 소신을 펼쳐 적극적인 물가 안정 정책을 주장했고 금융 위기를 맞은 2008년을 제외하고는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 범위 안에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 전 총재는 취임 첫해 두 차례에 걸쳐 콜금리 인상을 단행한데 이어 지급준비율을 16년 만에 전격적으로 인상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항상 매파·원칙주의자 등의 수식어가 뒤따랐다. 금리정책과 관련해 시장이 예측할 수 있도록 일관성 있는 발언을 지속한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이 전 총재 재임 당시 2008년 3월 통화정책 체계가 콜금리 목표제에서 현재의 기준 금리 중심으로 전환됐다.


이성태, 안팎에서 신뢰 얻어
한 경제학자는 “이 전 총재는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전반에 대해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었던 거의 유일한 총재”라며 “조직 이기주의적인 논리가 아니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통화정책을 펼쳤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한은 안팎으로 유례없는 신뢰를 받았던 이 전 총재도 신뢰성에 금이 가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 전 총재는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벌어지기 불과 한 달 전인 2008년 8월 기준 금리를 5.00%에서 5.25%로 전격 인상해 ‘한 치 앞도 모르고 거꾸로 가는 한은’이란 비난을 받았다. 이 전 총재는 이후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까지 5개월간 기준 금리를 5%에서 2%까지 급격히 내리며 적극 대응 했다.

김중수 24대 한은 총재(2010년 4월~2014년 3월)는 지나치게 확고한 소신 때문에 ‘불통’ 혹은 ‘대쪽 같다’ 등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 인하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동결을 고수해 ‘동결중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금융 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 침체, 가계 부채 문제 등이 회복세를 보이던 국내 경제는 유럽의 재정 위기 상황에 직면하며 다시 하락세를 지속하다가 2013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박 연구위원은 “2011년까지 기준 금리를 올리긴 했지만 소폭 인상에 그쳐 적정 금리보다 1% 포인트 이상 낮았고 유럽 재정 위기 이후 금리가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해 기준 금리가 적정 기준 금리보다 1% 포인트 정도의 괴리를 보이는 등 고금리 기조가 오래 지속됐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김 총재는 금리 인상을 통해 물가 안정을 꾀하는 대표적인 ‘매파’로 불렸다. 김 전 총재는 취임 후 1년 남짓한 기간 총 4번의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재임 기간 내내 총 40번의 금리 동결을 단행했다. 지난 3월 13일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연 2.50%인 기준 금리를 10개월 연속 동결했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김 전 총재 재임 기간 내내 수출과 가계 모두 부실해졌고 잠재성장률도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 퇴임사에서 한국 경제가 4년 전에 비해 한 단계 더 올라간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 것은 무슨 지표를 근거로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중앙은행 총재는 때론 시장이 더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세계적인 학자 ~의 논문에 따르면”, “~가 쓴 책에 따르면”이라는 식의 화법을 주로 사용했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