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제 1237호 (2019년 08월 14일)

‘손학규 중도정치의 꿈’은 왜 이뤄지기 힘든가

[주목 이 정치인]
-정계 은퇴 번복, 좌우 정당 넘나들며 ‘제3의 길’ 외쳐 왔지만, 후배들에 등 떼밀리는 처지에 몰려


손학규(왼쪽) 바른미래당 대표가 국회에서 7월 19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당 혁신을 요구하는 혁신위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가운데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경비즈니스=홍영식 대기자] 며칠 동안 깊은 산중에서 밤을 지새워 보니 어둠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고 들리는 것은 거센 바람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어디에서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중략)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알을 깨고 나오는 작은 새를 생각했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창조도 없고 버리지 않으면 새 길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손학규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현 바른미래당 대표)는 2007년 3월 19일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이렇게 심경을 밝혔다. 그는 탈당 선언을 하기 직전 며칠 동안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와 설악산 등을 전전했다.

그는 한나라당을 떠나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대선 경선에 나섰다. 하지만 정동영 후보에게 패해 ‘새 길’을 여는 데 실패했다. 2012년과 2017년에도 대선 도전에 나섰지만 연거푸 벽을 넘지 못했다.

대선 3수에 실패했으면 웬만한 정치인이라면 정계 은퇴를 했을 법한데 그는 여전히 여의도에 남아 있다. 이제 후배들에게 등 떼밀리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왜 정치판을 떠나지 않을까.


◆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 깨야”

그에겐 정치 입문 이후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기대주·저평가 우량주 등이다. 자질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기 때문에 정치적 ‘뒷배’만 잘 갖춰진다면 대권 고지에 성공적으로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가 현실 정치의 벽을 넘기 위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늘 기대주에만 그친다는 역설적인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그는 26년간의 정치 역정에서 여야, 보수·진보 정당을 넘나들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해 민자당·신한국당에서 3선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지사를 지냈다. 탄탄대로는 그때까지였다.

3연속 대선 도전 실패와 국회의원 낙선 등으로 두 번의 정계 은퇴, 칩거, 정계 복귀를 거듭했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약 10년간 몸담았다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이후 유승민 의원 등 새누리당 탈당파들과 함께 바른미래당을 만들었다. 이런 정치적 역정으로 그에게 ‘정치 철새’라는 달갑지 않은 딱지가 붙었다.

그는 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듣는다. 2014년 ‘경기 수원병 보궐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정치는 날고 들 때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순서”라고 했다.

이후 그는 전남 강진으로 내려가 허름한 시골 흙집에서 생활하다가 2016년 10월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가 이젠 후배 정치인들에 의해 정계 은퇴 요구를 받는 처지에 몰렸다. 바른미래당 안철수계와 유승민계 의원들에게 협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찌질이’, ‘정신 퇴락(頹落)’이라는 듣기 민망한 말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파 패권주의에 굴복해 퇴진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2007년 설악산을 전전하며 다짐했던 ‘새 길’을 열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새 길’은 중도정치, 제3의 길이다. 실현 방법은 선거법 개정과 개헌 완수를 통해 양강 구도를 깨는 것이다. 그는 2016년에 쓴 자서전 ‘강진일기’에서 “기존 권력 구조를 혁파하는 ‘새 판 짜기’가 어쩌면 내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의 한 측근은 “손 대표는 중도정치, 제3의 길을 여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겨 왔다. 자신이 물러나면 안철수계와 유승민계가 연합해 바른미래당을 자유한국당에 넘겨 제3정당이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손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물러나라는 말에 꿈쩍하지 않는 것은 자리에 연연해서가 아니다. 야당 대통합을 두 번 이룬 사람으로서 바른미래당을 이끌고 새 정치를 열어 가기 위해서다. 그것은 제3의 길, 중도정당이다. 나라가 어수선한 것은 거대 양당의 극한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야 한다. 바른미래당이 나서 중도 세력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이 돼 제3의 길을 확고히 해야 할 때다. 새 정치 세력이 중심을 잡으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것이 내년 4월 총선의 구도가 될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당 내 손 대표 반대파들은 4개월 넘게 그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손 대표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태경 최고위원은 “손 대표는 준(準)여당 같은 스탠스를 취해 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심판 대상이 집권당이 아니라 제1 야당을 심판하자는 식으로 보인다”며 “바른미래당을 연립 여당 구성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손 대표의 리더십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경남 창원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참패했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든가, 혼란스러운 당을 수습해 나갈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 비전이나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여전히 구시대적인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고 있다는 불만이다.

오신환 원내대표는 “창원성산 선거에서 우리 당이 민중당 후보보다 득표율이 낮았다”며 “심판을 받았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쇄신해야 하는데 손 대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손 대표의 리더십은 소멸됐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당직자는 “손 대표가 추석 때까지 당 지지율이 10%에 못 미치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해놓고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며 “지도자가 이렇게 신뢰하기 힘든 언행을 하는데 어떻게 따를 수 있겠나”라고 했다.




◆ “중도정치, 인물과 정책 부재로 설 땅 잃어”

양 측 간 갈등의 근본 원인은 이념과 가치를 무시하고 몸집 불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무리하게 통합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중도보수(유승민계)와 중도개혁(손 대표 측)이 만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실패한 나머지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손 대표가 필생의 과업으로 내세우는 중도정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중도층은 보수와 진보 성향보다 많은데 중도정당이 설 땅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행정연구원의 ‘2018년 사회 통합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이념 성향에서 중도가 47.4%로 다수를 차지했다. 진보는 31.4%, 보수는 21.2%였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중도 성향 응답은 대체적으로 40% 안팎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를 자처하는 바른미래당의 지지율은 4~6%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중도정당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고착화돼 온 양극화된 정치 지형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사활을 걸고 싸우면 국민도 양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도정당이 국민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견해도 많다. 중도를 표방한 정당들이 양극화된 정당에 거부감을 지닌 중도층들에게 먹힐 만한 정체성과 차별화된 제3의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를 힘 있게 실천할 만한 힘 있는 인물과 리더십도 없는 게 현실이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중도정치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다”며 “좌우 대결 구도가 심화되면서 중도정당에 대한 관심과 지지층 형성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또 “바른미래당이 지속적인 중도정책 및 중도 브랜드를 강화했어야 했는데 당 내 권력 갈등으로 실기했다”고 강조했다.

서성교 건국대 초빙교수는 “바른미래당이 경제·사회는 진보, 안보는 보수 노선을 택해 왔는데 이게 중도일 수는 없다”며 “기존 보수·진보와 차별화된 중도정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손 대표가 보수와 진보 정당을 오가면서 중도정치에 대한 진정성을 얻지 못했다”며 “초지일관 중도를 표방한 인물이 부재한 것도 중도정당이 설 땅을 잃은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가 “중도정치의 명분은 있지만 손학규 간판으로는 안 된다”는 후배 정치인들의 거센 비판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의 ‘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7호(2019.08.12 ~ 2019.08.1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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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9-08-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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