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열다섯 번째 김수영 ‘거대한 뿌리’

프랑스에 빅토르 위고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김수영이 있다. ‘4·19의 시인’, ‘모더니스트 시인’ 같은 말은 그를 정당하게 기념하는 언사가 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 그는 한 시대에 속하거나 한 부류로 한정될 시인이 아니다. 자유의 시인이며, 동시에 사랑의 시인이다.
[GREAT TEACHING]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
호사스럽게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영화 한 편이 있다고 치자. 해서, 그 영화를 보러 갔다고 하자. 그런데 보고 났더니 영화가 영 시시했다면, 뭔지 모르지만 영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다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아마도 짐작컨대 영화에 대해 일절 아무 말도 꺼내 놓지 않은 채 다음 일정으로 화급하게 옮겨가는 한 부류가 있을 것이요. 이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러쿵저러쿵 영화에 대해 뒷담화를 늘어놓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약간의 불만과 짜증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으로 넘어갈 일이고.


삶이 곧 시요, 시가 곧 삶이라
그런데 시인 김수영은 불란서 영화 ‘인생유전’을 보고 난 이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고 하면서 “나는 그 영화가 싫어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이틀 동안을 계속해 술을 마시었다”고 한다. 영화 한 편이 싫어 이틀 내리 술만 마시었다니, 누가 들으면 열렬한 영화광으로 오해할 만한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애주가의 그럴 듯한 궤변으로 들릴 만한 얘기다. 그런데 김수영의 일기를 가만히 읽어보면 영화광도 애주가도 아닌, 말 그대로 영화가 싫었다는 이유가 전부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열렬하게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이틀 내리 술을 마신 걸까. 김수영의 언급 그대로 보자면 ‘불란서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 한국의 사대주의 문화도 그러하고, 그럴 만한 것도 아닌데 과도한 의미 부여로 저급한 영화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평론가들도 지독하게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인생유전’은 제목부터가 신파스러운 데다가 줄거리 또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니,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이 서사를 참아내기 어려웠나 보다.

김수영에게 삶은 곧 시였고, 시는 곧 삶이었다. 언어와 생활에 모리배 의식이 배어 있는지 없는지 늘 살피는 것은 물론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좋은 시가 나오기 어렵고 김소월 같은 시인이 ‘부유한 아이들을 10명씩 모아 놓고 고가의 과외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 노릇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삶 전체를 담아 놓은 일기첩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편의 거대한 역사를 기술한 기록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일례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시도 찬찬히 읽어보면 그의 하루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어느 날 시인이 고궁에 간 모양이다. 대개 사람들은 고궁을 산책하며 역사와 전통, 고적함 등을 느끼기 마련일 텐데 김수영은 정반대로 마음이 소란스럽다. 고궁의 역사 속에서 ‘옹졸한 나의 전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렁탕에 기름덩어리가 많다고 주인에게 투덜대며 욕하는 자신, 하루에도 서너 번씩 20원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들을 증오하는 자신. 이런 모습을 누가 지적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가 거울이 돼 고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자기 몸을 통해 고궁을 이해하는 자, 김수영이다.

물론 그렇다고 시인 김수영이 정말 자잘한 일에만 분개했느냐 하면 그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그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4·19의 시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역사에 길이 남을 시인이다. 1960년 6월 15일에 쓰인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에서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쓰면서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부르짖으며 4·19의 의미를 되뇌었던 시인이다. 그 이전에 썩어진 어제와 이별하자고 하면서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고 한 시도 있다. 전국의 ‘초등학교’ 교실마다 붙어 있던,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사진을 떼내자고 부르짖기도 했다. 이런 그이지만 그조차도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는 말로 ‘혁명’의 말조차 한 인간의 삶의 언어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렇게 방만 바꾼 이 시인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비록 방만 바꾸었을망정 방을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니 말이다.

시인 김수영은 조그마한 일에만 분노한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그의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일까지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고 말해야 더 적절하다. 그것은 때로 자신의 비루함이나 구차스러움일 때도 있고 가정사의 부끄러운 일면일 때도 있으며 친구와의 사사로운 감정 문제일 때도 있다. 존재 전체를 시 속에 던져 넣은 것은 아닌지 갸우뚱해질 정도로 그에게 오는 무엇이든 ‘시가 된다’. 그리고 그의 몸이 곧 시가 된다.


온몸으로 역사를 상대하는 일, 그게 사랑
하루는 시인이 한강대교를 거닐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거닐다가 한순간 숨을 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시인 김수영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아마 짐작컨대 그는 어떤 시적 상태에 놓여 있던 것일 테다. 시인은 한강대교를 건널 때마다 마치 우리나라가 건축한 다리인 양 아무 생각 없이 ‘식민지의 곤충’처럼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 못내 걸렸던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회고주의자’가 돼 한강대교, 이 다리가 어떤 다리인데, 일본이 어떤 목적으로 만든 건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숨을 참으며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그런데 이런 시인의 모양새를 보고 젊은이들은 ‘20년 전’ 이야기라며 나이든 사람의 괜한 ‘회고’인 양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이 젊은이들을 두고 오직 “사랑을 배운다”라고만 말한다. 젊은이들이 같은 민족이라서가 아니다.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 알았으니까 이제 할 일은 사랑하는 일뿐이라는 것. 뭘 모르는 젊음은 잘못이 아니나 성찰하지 않는 젊음은 ‘똑똑하게 천천히’ 보고 제대로 일러 가르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배운다’고만 쓴다. 그에게 ‘사랑’은 어떤 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어떤 실천, 즉 온몸으로 온 역사를 상대하는 일이다.

김수영 시인은 1921년생이다. 젊은 시절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했으나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리고는 포로로 만신창이가 됐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자유의 몸이 됐다. 그의 몸은 온 역사를 관통하며 비로소 얻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해방 후 조선의 과거를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의 역사로 말한다. 더욱이 해방 후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몰래 들추어보며 이미 습관처럼 비참을 새기고야 만다.

그렇게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서럽다고 한다. 비참한 아버지와 서러운 아들이다. 그렇지만 서러운 아들이 찾는 것은 허세나 치기나 모방이 아니다. 김수영이 쓰고 있는 구절 중에서 참 좋은 구절,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라는 시구가 그러한 것처럼, 김수영은 낡은 것으로부터 사랑을 이야기한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