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tif in Art] 실타래(thread): 인연이라는 운명
입력 2015-12-10 15:52:52
수정 2015-12-10 15:52:52
우리나라 전통 혼례에서는 청실과 홍실을 엮어 남녀의 화합과 백년해로를 기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은 양극을 연결하기 때문에 서로의 인연을 의미하며,
그 길이처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내포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제작된 ‘실타래 감기’라는 그림을 보자. 어느 건물의 테라스에서 두 여자가 조용히 실을 감고 있다. 왼쪽에 앉아 있는 여인은 양손에 실타래를 끼고 부드럽게 손을 놀려 실이 잘 풀리도록 하고 있다. 오른쪽에 서서 실을 감고 있는 여자는 어린 소녀다. 실로 연결된, 서로 닮은 이 두 여인은 모녀일까, 자매일까?
전통적으로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일은 가정에서 여성이 익혀야 할 의무로 당연시되는 일상의 노동이었다. 이 그림에서 실을 감고 있는 두 여인은 자신이 맡은 일과를 묵묵히 수행하는 중이다. 이 그림을 그린 프레더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은 1867년 그리스의 섬 로데스를 여행하다가 어느 하얀 집의 옥상 테라스에서 본 장면을 스케치했다. 10여 년 후 그는 모델과 날씨 등을 조정해 유화로 옮기면서 고전적으로 그림을 재구성했다. 인물들은 고운 피부, 우아한 자태, 주름진 순백의 드레스로 고대 여신 같은 인상을 준다. 전경에 수평으로 배치된 깔끔한 건물 너머 배경에는 구름이 물러가는 청명한 해안에서 잔잔한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빈틈없이 잘 정돈돼 고요하고 평온하다. 레이턴의 그림에서 사소하고 친숙한 일상은 영원한 이상적 세계로 변모한다. 이처럼 질서 잡힌 안정된 세계는 여성이 인습에 순응하며 가사에 충실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인가? 전통 사회에서 바람직한 여성상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만약 여성이 자신의 임무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샬롯의 아가씨’는 이에 대한 당시의 관념을 반영한다. 시에서 샬롯의 아가씨는 창밖을 내다보면 저주를 받는다는 예언에 따라 탑에 갇힌 채 거울로만 밖을 보고 직물을 짜며 지루한 일상을 보낸다.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수려한 남자 랜슬롯을 본 순간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고 만다. 그리고 비로소 거울 속이 아닌 현실을 발견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거센 비바람 속에서 배를 타고 랜슬롯을 찾아 홀린 듯 흘러 가지만 그를 만나기도 전에 쓸쓸히 배 위에서 죽어 간다.
테니슨의 시를 소재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샬롯의 아가씨’를 여러 번 그렸다. 1894년에 그린 작품은 샬롯의 아가씨가 랜슬롯을 보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앞을 응시하고 있다. 뒷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 그녀가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기사 복장을 하고 지나가는 랜슬롯이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발치에는 실뭉치들이 나뒹굴고 몸에는 실타래가 휘감겼다. 실타래는 여인을 붙잡아 구속하려는 듯 완강해 보이지만 그녀의 단호한 결심 앞에서 무력하게 끊어지고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에 굴하지 않고 치명적인 사랑에 자신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샬롯의 아가씨는 본인의 감정에는 충실했지만 주어진 실타래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비극적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실타래를 포기해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다가 전화위복으로 사랑과 영광을 얻은 여인도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드네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타 섬 미노스 왕의 딸이다. 미노스 왕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둬 놓고 아테네의 젊은 남녀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이에 분개한 아테네 사람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자 크레타에 들어온다. 늠름한 테세우스를 본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반해 그를 살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칼과 실타래를 테세우스에게 건네며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 준다. 테세우스는 실을 풀면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그 실을 따라 무사히 길을 찾아 돌아온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크레타 섬에서 도망쳐 나온다. 이들이 낙소스 섬에 도착했을 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 버린다. 절망과 슬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리아드네에게 한 남자가 다가갔으니, 그는 인간의 감정을 주관하는 신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반해 그녀를 위로하고 아내로 삼는다. 아리아드네가 죽은 후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선물했던 금관을 하늘로 던져 별자리로 만들어준다.
삶을 안내하는 지혜의 끈
워터하우스는 1898년 아리아드네 신화 중 한 부분을 그렸다. 그림에서 아리아드네는 야생 정원이 있는 테라스에서 곤히 잠들어 있고 배경의 바다에는 범선 한 척이 떠나가고 있다. 물론 그 배에는 테세우스가 타고 있을 것이다. 혼자 남은 그녀 곁에 두 마리 표범이 호위하듯 머물고 있다. 표범은 디오니소스의 상징이므로 그녀는 이미 디오니소스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선홍빛 드레스를 입고 관능적 자세를 하고 있어 사랑의 정념에 도취됐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늘씬한 몸을 길게 눕히고 있지만 무릎 아래쪽을 구부려 발끝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 영원히 잠든 것이 아니라 곧 깨어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준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나 이후 연인에게 버림받고, 지독한 아픔을 경험했지만 디오니소스의 구애를 받아들여 삶의 미궁으로 또다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술과 도취, 광기 어린 향락, 파괴적 본능, 극한의 고통과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디오니소스는 니체가 말했듯이 아리아드네에게 있어서 종잡을 수 없는 미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어두운 삶의 미로를 헤쳐 갈 지혜, 즉 보이지 않는 끈을 갖고 있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했다. 그녀의 용기는 천상의 별자리로 영원히 보상받았다.
이제 다시 처음에 본 레이턴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왼쪽 여인이 깔고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표범 가죽이다. 표범과 실타래를 가진 그녀는 아무래도 아리아드네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녀의 손에서 실은 거의 다 풀렸지만 옆에 놓인 바구니에는 다른 실타래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실을 엉킴 없이 잘 감는다면 그녀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인이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평온을 찾은 아리아드네라면 오른쪽에 서서 실을 감고 있는 소녀는 어린 아리아드네, 또 다른 미래의 아리아드네가 아닐까? 아랫도리에 붉은 천을 두른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운명의 끈은 아이에게 이어지고 소녀는 성장하면서 삶의 격정에 빠져들 것이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잠자는 아리아드네처럼.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은 양극을 연결하기 때문에 서로의 인연을 의미하며,
그 길이처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내포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제작된 ‘실타래 감기’라는 그림을 보자. 어느 건물의 테라스에서 두 여자가 조용히 실을 감고 있다. 왼쪽에 앉아 있는 여인은 양손에 실타래를 끼고 부드럽게 손을 놀려 실이 잘 풀리도록 하고 있다. 오른쪽에 서서 실을 감고 있는 여자는 어린 소녀다. 실로 연결된, 서로 닮은 이 두 여인은 모녀일까, 자매일까?
전통적으로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일은 가정에서 여성이 익혀야 할 의무로 당연시되는 일상의 노동이었다. 이 그림에서 실을 감고 있는 두 여인은 자신이 맡은 일과를 묵묵히 수행하는 중이다. 이 그림을 그린 프레더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은 1867년 그리스의 섬 로데스를 여행하다가 어느 하얀 집의 옥상 테라스에서 본 장면을 스케치했다. 10여 년 후 그는 모델과 날씨 등을 조정해 유화로 옮기면서 고전적으로 그림을 재구성했다. 인물들은 고운 피부, 우아한 자태, 주름진 순백의 드레스로 고대 여신 같은 인상을 준다. 전경에 수평으로 배치된 깔끔한 건물 너머 배경에는 구름이 물러가는 청명한 해안에서 잔잔한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빈틈없이 잘 정돈돼 고요하고 평온하다. 레이턴의 그림에서 사소하고 친숙한 일상은 영원한 이상적 세계로 변모한다. 이처럼 질서 잡힌 안정된 세계는 여성이 인습에 순응하며 가사에 충실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인가? 전통 사회에서 바람직한 여성상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만약 여성이 자신의 임무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샬롯의 아가씨’는 이에 대한 당시의 관념을 반영한다. 시에서 샬롯의 아가씨는 창밖을 내다보면 저주를 받는다는 예언에 따라 탑에 갇힌 채 거울로만 밖을 보고 직물을 짜며 지루한 일상을 보낸다.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수려한 남자 랜슬롯을 본 순간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고 만다. 그리고 비로소 거울 속이 아닌 현실을 발견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거센 비바람 속에서 배를 타고 랜슬롯을 찾아 홀린 듯 흘러 가지만 그를 만나기도 전에 쓸쓸히 배 위에서 죽어 간다.
테니슨의 시를 소재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샬롯의 아가씨’를 여러 번 그렸다. 1894년에 그린 작품은 샬롯의 아가씨가 랜슬롯을 보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앞을 응시하고 있다. 뒷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 그녀가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기사 복장을 하고 지나가는 랜슬롯이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발치에는 실뭉치들이 나뒹굴고 몸에는 실타래가 휘감겼다. 실타래는 여인을 붙잡아 구속하려는 듯 완강해 보이지만 그녀의 단호한 결심 앞에서 무력하게 끊어지고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에 굴하지 않고 치명적인 사랑에 자신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샬롯의 아가씨는 본인의 감정에는 충실했지만 주어진 실타래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비극적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실타래를 포기해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다가 전화위복으로 사랑과 영광을 얻은 여인도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드네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타 섬 미노스 왕의 딸이다. 미노스 왕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둬 놓고 아테네의 젊은 남녀를 제물로 바치게 했다. 이에 분개한 아테네 사람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자 크레타에 들어온다. 늠름한 테세우스를 본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반해 그를 살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칼과 실타래를 테세우스에게 건네며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 준다. 테세우스는 실을 풀면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그 실을 따라 무사히 길을 찾아 돌아온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크레타 섬에서 도망쳐 나온다. 이들이 낙소스 섬에 도착했을 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 버린다. 절망과 슬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리아드네에게 한 남자가 다가갔으니, 그는 인간의 감정을 주관하는 신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반해 그녀를 위로하고 아내로 삼는다. 아리아드네가 죽은 후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선물했던 금관을 하늘로 던져 별자리로 만들어준다.
삶을 안내하는 지혜의 끈
워터하우스는 1898년 아리아드네 신화 중 한 부분을 그렸다. 그림에서 아리아드네는 야생 정원이 있는 테라스에서 곤히 잠들어 있고 배경의 바다에는 범선 한 척이 떠나가고 있다. 물론 그 배에는 테세우스가 타고 있을 것이다. 혼자 남은 그녀 곁에 두 마리 표범이 호위하듯 머물고 있다. 표범은 디오니소스의 상징이므로 그녀는 이미 디오니소스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선홍빛 드레스를 입고 관능적 자세를 하고 있어 사랑의 정념에 도취됐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늘씬한 몸을 길게 눕히고 있지만 무릎 아래쪽을 구부려 발끝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 영원히 잠든 것이 아니라 곧 깨어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준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나 이후 연인에게 버림받고, 지독한 아픔을 경험했지만 디오니소스의 구애를 받아들여 삶의 미궁으로 또다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술과 도취, 광기 어린 향락, 파괴적 본능, 극한의 고통과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디오니소스는 니체가 말했듯이 아리아드네에게 있어서 종잡을 수 없는 미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어두운 삶의 미로를 헤쳐 갈 지혜, 즉 보이지 않는 끈을 갖고 있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했다. 그녀의 용기는 천상의 별자리로 영원히 보상받았다.
이제 다시 처음에 본 레이턴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왼쪽 여인이 깔고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표범 가죽이다. 표범과 실타래를 가진 그녀는 아무래도 아리아드네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녀의 손에서 실은 거의 다 풀렸지만 옆에 놓인 바구니에는 다른 실타래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실을 엉킴 없이 잘 감는다면 그녀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인이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평온을 찾은 아리아드네라면 오른쪽에 서서 실을 감고 있는 소녀는 어린 아리아드네, 또 다른 미래의 아리아드네가 아닐까? 아랫도리에 붉은 천을 두른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운명의 끈은 아이에게 이어지고 소녀는 성장하면서 삶의 격정에 빠져들 것이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잠자는 아리아드네처럼.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