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은 마음속의 분열과 혼란의 상징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독일 유학 중이던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부왕의 서거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다. 아버지가 궁중 정원에서 낮잠을 자다가 독사에 물려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햄릿에게 죽은 선왕의 유령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지금 왕으로 있는 너의 숙부 클로디어스에게 독살 당했다. 나를 대신하여 이 원통함을 풀어다오!”
조선 설화 ‘장화홍련전’을 보자. 평안북도 철산 땅에 살던 좌수 배무룡은 장화와 홍련이라는 늦둥이 두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죽고 후처를 들였는데 후처와 후처 소생들이 장화와 홍련을 괴롭힌다. 계모와 이복남매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장화는 연못에 몸을 던진다. 홍련도 시름시름 앓다가 장화의 뒤를 이어 연못에 투신자살한다. 자매는 철산부사에게 유령의 형태로 나타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주인공 맥베스도 ‘햄릿’의 클로디어스처럼 형 던컨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다. 맥베스는 궁궐에 고관대작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 흥겹게 잔치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뱅쿠오의 유령이 나타난다. 유령은 맥베스의 눈에만 보인다. 뱅쿠오는 정권 찬탈 과정에서 맥베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던컨왕의 충신이었다.
“지금처럼 불안감에 떨며 밥을 먹고 밤마다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잠을 잘 바에야 차라리 망자와 함께 있는 것이 낫겠소. 던컨왕은 지금 무덤 속에 있소. 열병 같은 인생을 끝마치고 편안히 잠들어 있단 말이요!”
유령에 시달리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맥베스는 던컨왕의 신하였던 맥더프의 칼에 숨을 거둔다.

동서고금 공통적으로 분포하는 귀신 설화
억울하게 죽은 혼령이 원한을 품고 저승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공통적으로 분포하는 설화의 원형적인 주제 중 하나다. 소설 ‘삼국지’에도 있다. 오나라의 손권 형 손책도 유령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는 케이스다. 사냥을 나섰다가 숲속 깊숙이 들어와 홀로 남게 된 손책은 원한을 품은 자객들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다. 명의 화타의 제자가 손책을 치료해 준다.
“상처가 깊사오니 앞으로 100일간은 조리를 잘하시어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아직 상처가 아물기 전에 성루에서 부하들과 일을 논하던 손책이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다. 흰 수염에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어떤 노인을 보더니 대소 신료는 물론이고 길 가던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그에게 다가가 큰 절을 올리며 공경을 표하는 것이 아닌가.
“저 사람이 누군가?”
“우길이라는 도인이옵니다. 그는 부적과 신령스러운 물로 백성들을 치료해 주는 신선 같은 사람입니다. 비바람도 마음대로 부린다고 하옵니다.”
평소 미신을 믿지 않는 손책은 기분이 언짢아져 우길을 불러 비를 내려 보라고 명령한다. 과연 우길이 비를 부르자 손책은 더욱 화가 났다.
“교묘한 사술로 혹세무민하는 저런 자는 살려둘 수 없다!”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책은 우길을 처형한다. 이때부터 손책에게는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 밤마다 우길이 나타나는 악몽을 꾸고 우길의 유령을 자주 보게 된다. 어느 날 손책이 거울을 보고 있는데,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우길의 모습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대경실색한 손책은 칼로 거울을 깨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 바람에 아직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다시 터져 손책은 죽고 만다.
조조도 말년에 관우의 잘린 목을 보고 놀란 나머지 날마다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 고생한다. 자신을 치료해 준 명의였던 화타를 죽이고 병세가 심해지면서 자신이 죽인 복황후와 동귀비, 여포 등의 유령까지 나타나면서 괴로워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와 오나라 여몽에게 빙의된 관우의 혼령 이야기는 지난번에 한 적이 있다.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을 때의 일이다. 관우의 장남 관평은 맥성전투에서 패해 아버지 관우와 함께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당시 관우와 관평을 생포했던 오나라 장수가 바로 반장이다. 전투에 나선 관우의 차남 관흥이 어느 집에 잠시 주둔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그 집에서 관흥은 아버지와 형님을 사로잡았던 반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깜짝 놀란 반장이 말머리를 돌려 내빼기 시작했다. 그때 관우의 혼령이 나타난 것이다.
“네 이놈! 반장아. 나 관우를 기억하느냐? 네 놈이 감히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느냐?”
반장이 혼비백산한 사이에 관흥이 나타나 반장의 목을 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관우의 유령은 제갈량이 북벌을 할 때 다시 나타난다.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 북방의 강족(羌族)과 전략적인 제휴를 맺는다. 관우의 아들인 관흥과 장비의 아들인 장포가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런데 역부족으로 관흥과 장포가 둘 다 적군에게 포위돼 버렸다. 바로 그때 관우의 혼령이 홀연히 나타나 사면초가의 형세에 빠진 아들 관흥과 조카 장포를 비롯한 촉나라 군대를 구출해 주고 사라진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고대소설인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괴담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령의 존재는 지금도 초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요 연구 주제다. 물론 ‘과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리처드 와이즈만 같은 심리학자는 “유령이 출몰하는 데는 진짜 유령이나 복류나 저주파나 약한 자기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암시의 힘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령은 없는데,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암시(暗示)에 의해 보이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유령의 실체의 존재 유무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고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퇴마(退魔)나 구마(驅魔)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지 않은가.
융 심리학자인 안셀름 그륀의 말처럼 우리 마음속의 “강박, 고정관념, 콤플렉스, 감정의 혼란과 차단, 명석한 사고력의 결여, 내면 분열 상태”나 “억압된 공격성, 무의식적 증오감, 맺힌 한과 불안”이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유령·혼령 혹은 마귀나 사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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