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가 보이나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이자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세월이 지나 ‘꼰대’가 돼 버린 당신의 눈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의 그림이 보이나요?

혼자 다니는 것이 익숙한 한 남자, 그날도 여느 날처럼 홀로 비행기를 타러 나갔다. 그런데 비행기 엔진이 고장 나는 바람에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하게 된다. 정비사도 없고 승객도 없다. 마실 물도 고작 일주일 치뿐이다. 그래서 홀로 하룻밤을 지새웠다. 바로 그 즈음, 그는 한 가지 상상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몰랐고, 또 어쩌면 한 번도 꺼내놓지 않았던 자신의 소망일지도 몰랐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어쩌면 ‘보아 구렁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연인즉 어린 시절 보아 구렁이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보아 구렁이만 그린 것이 아니라 실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를 그렸었다.

그 상상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이 그림을 두고 어른들은 대번에 ‘보아 구렁이’가 아니라 ‘모자’일 뿐이라고 했다. 보아 구렁이 뱃속에 놓인 그 어마어마한 코끼리를 보지 못한 채 ‘그저 모자’일 뿐이라니, 정말 어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런 그림 따위는 집어치우고 국어나 수학 공부를 하라고 타박했다.

또 언젠가는 어른들에게 비둘기가 앉아 있는 멋진 벽돌집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른들은 ‘10만 프랑쯤 되는 집’으로 요약해 버렸다. 10만 프랑쯤 되는 집을 상상할 수 없었으나 10만 프랑쯤 되는 집과 멋진 벽돌집을 같은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 보아 구렁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멋진 집에 대해서도 상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림도 그리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말하려 하지 않았다.

뒤죽박죽 세상에서 가치는?
아무도 없는 컴컴한 사막 한가운데서 그가 만나게 된 것은 오래전 잊고 있었던 아주 작은 어린 아이였다. 한 행성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어린 왕자. 그가 언제부터 홀로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어린 왕자가 그에게 하는 말은 “그림을 그려줘”였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말이지 않은가.

그런데 실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어서 잘 그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습관대로 ‘보아 구렁이’, 아니 ‘모자’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그 조그맣게 생긴 어린 왕자가 대번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봐준 것이다.

어린 왕자는 다시 “양 한 마리만 그려줘”라고 말했다. 그런데 몇 번씩이나 그려줘도 양이 힘이 없어 보여 안 된다는 둥, 너무 늙어 보여 안 된다는 둥, 뿔이 나서 안 된다는 둥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퇴짜를 놓았다. 남자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상자 하나를 그렸다. 그러면서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들어 있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린 왕자는 “이게 원했던 거야”라고 하지 않는가. 또 “양이 잠들어 있어. 상자를 양의 집으로 쓸 수 있어 다행이야”라고도 했다.

어린 왕자는 소행성B612에 산다고 했다. 크기가 아주 작은 별인 것 같았다. 남자가 “네가 착하게 굴면 양을 매어 놓을 수 있는 고삐랑 말뚝도 그려줄게”라고 제안했더니 어린 왕자는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로 “양을 매어 둔다고? 희한한 생각도 다 하네”라고 했다. 어린 왕자는 양을 매어 둔다는 얘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린 왕자가 사는 곳은 너무 작아 양을 매어 둘 필요도 없으며, 또 별이 크든 작든 무엇을 매어 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어린 왕자가 양과 관련해 걱정하는 일이 있다면 혹시나 양이 장미를 먹어 치우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다. 그나마 어린왕자가 키우는 장미에 네 개의 가시가 있다고 했다.

장미 이야기야 그렇다 쳐도 네 개의 가시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무가치했다. 실은 가시뿐만 아니라 장미도 마찬가지라고 말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고장 난 비행기를 고치는 일이지 여기 있지도 않은 장미를 걱정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아저씨도 다른 어른들처럼 말하는구나”라고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어린 왕자에게 어른들이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못한 채 ‘세상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준 그 한 그루의 장미, 즉 자신의 시간을 바치며 일궈낸 삶의 이야기들이다. 수많은 장미꽃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어린 왕자의 별에 남아 있는 한 그루의 장미가 더 ‘중요’한 것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간을 바치며 길러냈던 것,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어른처럼 읽어서는 안 되는 동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이자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더 이상 날 수 없었던 비행사인 그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성능 좋은 엔진이 아니다.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들어서는 가능하지 않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잊지 않아야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기 위해 다른 말에 귀를 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어른들처럼 말’해서는 그럴 수 없다. 삶을 지속시켜 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많은 별들에 대한 모호한 일반화가 아니라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 속에 살고 있는 장미 한 그루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므로 불시착한 사막에서 그가 대면해야 하는 것은 장미 한 그루에 대한 문제, 혹은 ‘네 개의 가시’가 전하는 장미의 아픔과 걱정에 대한 것이다.

어린 왕자가 늘 기억하며 가치를 두는 것은 그가 시간을 바치며 ‘길들인 것’들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길들인다는 것이다. ‘길들인 것’과 관계 속에 삶의 가치가 있다. 그것과 무관하게 사는 삶은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고립’된 삶이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그 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쓰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는지 하는 문제다.

어린 왕자가 모든 이야기를 마치는 시점과 그가 다시 사막을 빠져나오는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어린 왕자’는 1970년대 이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운 동화 정도로 기억되는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어른처럼’ 아니 ‘꼰대처럼’ 사는 것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다.

당신도 어린 시절, 아니 청년 시절이 있지 않았는지, 그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물음 속에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 아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외면한 채 ‘모자’나 ‘영어’ 타령이나 한다면, 불시착한 사막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어린 왕자는 그 비행사가 품고 있었던 유일한 삶의 가능성이다. 삶을 지속시키는 가치에 대한 물음, 그 거대한 코끼리에 대한 것.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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