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권 (15)] 우범지대 바꾼 '소금길의 마법'

대학가 낀 미개발 상권…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기대 반 걱정 반'


‘소금길’ 덕분에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해소되면서
낮은 임대료와 낙후된 동네 분위기는
오히려 염리동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는 강력한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화여대와 서강대 사이에 자리한 염리동은 비탈진 지형에 꼬불꼬불한 골목이 뒤엉켜 있는 그야말로 ‘달동네’다. 지난 10여 년간 재개발이 거듭 지연되면서 주택이 점점 낙후됐고 덩달아 범죄율도 치솟았다.

염리동이 ‘우범지대’의 이미지를 벗게 된 데는 2013년 조성된 염리동 소금길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시는 2012년 10월 ‘범죄 예방 디자인’ 프로젝트의 첫 지역으로 염리동을 선정하고 본격적인 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범죄심리학자와 범죄 예방 디자인 전문가, 경찰, 아동 청소년 전문가, 행동심리학자 등을 포함한 총 10명의 범죄예방디자인위원회가 꾸려졌다. 그 결과가 바로 염리동의 골목을 활용한 산책로인 ‘소금길’이다.

◆ ‘안전과 재미’ 챙긴 달동네의 변신

1.7km 정도 좁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소금길은 조선시대부터 염리동을 주름잡던 소금 장수들이 지나다니던 길을 따라 만들어져 붙은 이름이다. 옛 마포나루 길목과 가까이에 자리한 이 동네는 서울 시내로 소금을 대는 일종의 ‘소금 창고’였기 때문이다.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소금길은 1부터 69까지 숫자가 매겨진 전봇대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이 전봇대마다 가로등과 함께 위기 상황 시 누를 수 있는 빨간 버튼이 장착돼 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위치를 전송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선 CCTV를 설치해 현장 상황을 녹화하고 전봇대 사이사이에는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빠르게 뛰어들어가 몸을 피신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소금 지킴이집’도 마련했다. 총 6곳의 소금지킴이집 대문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띌 수 있는 노란색을 입혔다.


어둡고 음침했던 골목길이 ‘소금길’산책로 조성 이후 밝아졌다.
최근에는 20~30대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소금길은 ‘안전’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산책로 군데군데 ‘소소한 재미’를 담았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의 길목을 노란색 페인트로 연결해 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방인들이 손쉽게 산책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렸을 적 동네 꼬마들이 즐겨 하던 ‘사방치기’ 등의 그림이 길바닥에 그려져 있기도 하다. 칙칙하기만 했던 염리동의 주택들도 이 산책로를 중심으로 알록달록한 변신에 성공했다. 대문마다 초록색·분홍색을 칠해 예전의 분위기를 확 날려버렸다. 높은 담벼락은 각양각색의 캐릭터와 화려한 그림이 덧칠해졌다.

소금길을 걷다 보면 유독 자주 만나게 되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하얀 소금을 형상화한 ‘소금길 캐릭터’다. 전봇대마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운동법을 이 캐릭터를 활용해 소개하고 있다. 하염없이 높아만 보이는 계단에는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수명 4초 연장’, ‘튼튼한 허벅지 만들기’ 등의 재치 있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소금길에 따른 변화의 효과는 순식간에 나타났다. 서울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범죄 예방 디자인을 적용한 이후 1년여 만(2014년)에 염리동의 주민 범죄 두려움은 13.6% 감소했고 범죄 예방 효과 또한 78.6%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만족도가 83.3% 증가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곳곳에 소소한 재미가 묻어나는 이 ‘동네 산책길’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외지에서 구경 온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염리동의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20~30대 젊은 층이 대부분이다.

◆ 산책길 따라 ‘젊은 가게’ 속속 둥지

염리동 소금길이 ‘출사지’로 인기를 얻으면서 젊은 감각과 분위기로 무장한 새로운 가게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은 2013년에서 2015년 사이에 소금길 인근에 터를 잡은 곳들이다.

염리동은 오래전부터 상권이 발달하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지역 중 하나다. 대로변 하나를 마주하고 있는 이화여대는 물론 연세대·서강대·홍익대 등 주변에 큰 대학가를 끼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이대역 5번 출입구와 바로 연결돼 있다는 것도 상권으로서는 큰 장점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지금처럼 ‘동네 상권’으로 남아 있었던 이유는 재개발 지역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가 워낙 짙었기 때문이다. 염리동의 개발이 늦어질수록 집값 또한 다른 곳과 비교해 현저히 낮아졌고 이곳은 인근 대학생들이 더 ‘싼 방’을 찾아 자연스레 모여드는 주거지역의 성격이 강해졌다. 최근에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학생들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도 염리동에 둥지를 틀었다. 예술가들도 염리동으로 모여들었다. 인근에 있는 홍대 상권의 임대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면서 밀려난 이들이다.



염리동 상권의 단점으로 꼽혔던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소금길’로 인해 해소되면서 낮은 임대료와 낙후된 동네 분위기는 오히려 염리동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는 강력한 촉매재로 작용하고 있다. 예술가와 청년 창업가들에게 진입 장벽이 낮아 새로운 시도가 자유로운 것이다. 이곳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식당을 운영 중인 한 가게 사장은 “염리동은 임대료도 저렴하지만 오랜된 주택가가 주는 정겨운 느낌 때문에 유독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것 같다”며 “최근 1~2년 사이에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예술인만 20명이 훨씬 넘는다”고 말했다.

한 공간에서 두 가지 이상의 업종을 겸하는 가게들이 유독 많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가난한 예술가와 청년 창업가들이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실험해 보기 위해 문을 연 가게들이 많다 보니 이와 같은 공통점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일단멈춤·언뜻가게·퇴근길책한잔·좀비수제버거 등이 이곳에 색다른 개성을 불어넣고 있는 대표 주자들이다. 2013년 12월 소금길 시작 지점에 자리 잡은 언뜻가게는 인디밴드 뮤지션이 운영하는 카레 음식점이다. 아직 ‘풍년쌀상회’라는 30년도 더 된 간판을 달고 있어 자칫 지나치기 쉽다.

천휘재 언뜻가게 사장은 “가게를 오픈한 초반에 비해 찾는 사람이 늘었고 매출도 꾸준히 오르고 있다”면서 “20대는 소셜 다이닝(낯선 이들끼리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모임)을, 30대는 예술 문화 공연을 즐기러 온다”고 말했다.


염리동 상권은 오래된 동네 가게와 젊은 감각으로 무장한 새로운 가게들이 뒤섞여 있다.

2015년 4월 문을 연 퇴근길책한잔도 독특한 공간이다. 주인이 좋아하는 기성 도서나 다양한 독립 출판을 판매하는 서점이다. 동시에 책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영화도 감상할 수 있는 카페가 되기도 한다. 낮술을 즐기는 손님도 있고 밴드를 초대해 음악회도 자주 갖는다.

김종현 퇴근길책한잔 사장은 “권리금 없고 임대료 저렴한 곳을 찾아 들어와 보니 이곳이 염리동이었다”며 “20 ~30대들이 많이 찾는 ‘출사지’라 그런지 호기심 때문에 가게를 한번쯤 들르는 고객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 100만 원도 안 되는 월세, 진입 장벽 낮아

염리동 소금길은 이제 막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인 만큼 매일같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아직은 이곳에서 자취하는 대학생과 중국인 유학생, 동네 거주민들이 가장 큰 수요다.

하지만 주말이면 삼삼오오 카메라를 둘러메고 소금길을 방문하는 관광객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염리동 마을 공동체 소금나루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소금길을 방문한 사람은 약 1300명으로 집계된다. 염리동 마을 공동체인 소금나루 관계자는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데이트 코스로 소금길을 찾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며 “최근엔 범죄 예방 디자인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하려고 단체로 방문하는 해외나 지방자치단체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소금길이 속해 있는 염리동과 아현동 일대는 아현뉴타운으로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재개발로 배후 수요가 늘어난 이후에 대한 기대감과
소금길이 사라진 이후에 대한 우려감이 교차하고 있다.

이는 SK텔레콤의 빅 데이터 비즈니스 플랫폼인 지오비전의 분석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2015년 10월을 기준으로 염리동 소금길 반경 350m 일대의 유동인구는 하루 평균 6만3602명이다. 20대 여성이 8175명(12.9%), 30대 남성이 6118명(9.6%)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화여대와 가까워 이화여대 학생들의 거주 비율이 높은 영향으로 분석된다. 시간대별 유동인구는 점심시간이 1만6782명(26.38%)으로 가장 높았다. 주중과 주말 하루 평균 유동인구는 각각 6만8533명과 5만1256명이었다.

대부분의 주거지역 유동인구가 주말에 비해 주중이 현저히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주중과 주말의 유동인구 차이가 1만 명 안팎으로 적은 편이다. 염리동 거주민 수요 중 주말 동안 빠지는 유동인구의 상당수를 염리동 소금길을 찾는 외부 관광객 수요가 상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시세는 아직까지 큰 변화가 없다. 매매가는 이대역 근처와 대로변 중심으로 3.3㎡(1평)당 5000만~6000만 원 선이다. 임대료는 43㎡(13평)를 기준으로 월세 170만 원, 보증금 3000만 원, 권리금 1억 원이다. 골목 쪽으로 들어서면 임대료는 더 낮아진다. 33㎡(10평) 정도 규모의 가게가 가장 많은데, 이를 기준으로 권리금 1000만~2000만 원, 보증금 500만~1000만 원, 월 임대료 50만~80만 원 선이다.

현진공인중개사사무소 오병수 대표는 “소금길이 조성된 이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나 블로그를 보고 이곳으로 구경 오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아직 유동인구가 많은 동네는 아니지만 역세권이라는 장점이 있어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향후 염리동 상권의 잠재력을 가늠하기 위해 꼭 짚어봐야 하는 것이 이 일대의 재개발 이슈다. 소금길이 속해 있는 염리동과 아현동 일대는 아현뉴타운으로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이 중 일부인 염리 4구역(이대역 방면)은 재개발이 해지됐지만 아현2구역(아현역 방면)은 1200가구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으로 아파트 분양 신청까지 끝난 상태다. 소금길의 일부 구간이 사라질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곳 상인들 사이에서는 재개발로 배후 수요가 늘어난 이후에 대한 기대감과 소금길이 사라진 이후에 대한 우려감이 교차하고 있다. 신흥부동산 Y 씨는 “3~4월에 재개발 예정 지역 주민들의 이주 계획이 잡혀 있다”며 “염리동에 남은 상가가 얼마 없어 상가 투자자들의 관심이 달아오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하지만 좀비수제버거 관계자는 “재개발이 진행된다고 하지만 그에 따라 염리동 상권이 수혜를 볼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그 내부에 새로운 상가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염리동은 소금길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동력 삼아 발전하는 곳”이라고 분석했다. 재개발과 관계없이 문화적 색깔을 강화해 나간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선 대표는 “향후 염리동 상권의 발전을 위해서는 소금길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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