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인맥(1)] '관리의 삼성' 시절 사장보다 센 관리본부장
입력 2016-01-20 11:04:03
수정 2016-01-20 11:23:32
회장 '쪽지' 전달하는 비서실 막강 파워, '인재 제일주의'로 인사팀 중용
1938년 삼성상회로 출발해 올해로 78주년을 맞이한 삼성은 한 기업집단으로서 크로노스(Cronos :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넘는 고속 성장을 했다. 2015년 기준 67개 계열사, 자산 351조원(공정거래위원회)의 국내 최대 기업이다.
한 해 매출액을 국내총생산(GDP)과 견줘볼 때 2014년 매출액 224조원으로 명목 GDP의 13.8%를 차지한다. 단일기업집단 비중이 GDP 1조 달러 이상 15개국 중 가장 높다.
국내를 넘어 세계 속 위상을 고려할 때 그 이름은 ‘글로벌 삼성’으로 통한다. 2012년 기준 삼성의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은 메모리반도체, 디지털 TV,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휴대전화를 비롯해 26개에 달한다.
또 한국 사회 곳곳에 삼성 출신 인맥이 퍼져 있다는 점에서 ‘삼성공화국’으로도 불린다. 삼성에는 명과 암의 평가가 공존하지만 제일주의 가치를 공유하며 대한민국 기업 최고 신화를 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직급보다 사업부 따라 권한 달라져
삼성의 성공 스토리를 사람을 중심으로 풀어보자. 삼성은 양적·질적 성장의 양 날개를 펼치는 동안 변곡점엔 언제나 위기를 돌파하고 극적인 변화를 이끈 주역들이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을 제외하면 두 번의 오너십을 경험했다. 이병철 선대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삼성을 이끌어 왔다. 사업 보국의 정신을 강조한 이병철 회장과 ‘다 바꾸라’로 요약되는 이건희 회장의 개혁과 도전은 오늘날의 삼성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
삼성은 능력만 있으면 ‘스펙’에 관계없이 탕평 인사를 하는 문화로 알려져 있다. 임원 승진이 ‘별 따기’에 비유될 만큼 어렵지만 확실한 대우가 따르는 만큼 신입 사원 때부터 별을 향한 경쟁이 치열하다.
친분·학연·연줄로 얽힌 인맥보다 인재 관리를 통해 리더들이 배출되는 편이다. 될성부를 잎일 때부터 ‘리더십 파이프라인(Leadership Pipeline)’을 통해 예비 최고경영자(CEO) 인맥이 만들어진다. 내부 승진에서는 의외의 인맥이 CEO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직급별 검증과 평가를 거쳐 매년 ‘20%’씩 탈락되고 진짜 실력자들만 살아남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삼성의 ‘신인맥’ 관전 포인트는 수십 년 동안 형성된 일종의 인맥 형성 ‘패턴’에서 얼마나 벗어날지, 중심축이 신흥 세력으로 움직일지 여부에 있다.
시대에 따라 파워 엘리트 그룹의 키워드는 다르다. 오너의 경영전략에 따라 매년 새 조직이 생겨나고 뜨고 지는 인물이 속출했다. 성과에 따른 조직 개편 및 구조조정을 상시화한 곳이 바로 삼성이다.
삼성맨은 직급 자체보다 어느 사업부에 소속되는지를 매우 중시한다. 소속에 따라 같은 직급이라도 권한이 다르다. 국내외 250여 개 법인 가운데 핵심 조직, 실제 권한이 부여되는 자리에 앉는 게 중요하다. 78년에 걸쳐 삼성을 움직여 온 핵심 포스트는 어디인지, 어떤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 먼저 변화의 흐름을 좇아본다.
“나는 지금까지 내 손으로 수표나 전표에 도장을 찍거나 물건을 직접 산 적이 없다. 도장을 찍고 비즈니스를 할 사람을 찾고 기르는 것이 나의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보냈다.”(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 공채 면접 직접 챙겨
삼성 인맥의 시작점은 이병철 회장의 인재 제일주의다. 삼성의 인재 중시 뿌리는 이병철 선대 회장의 경영 철학에서 시작한다. 1938년 대구의 삼성상회로 출발, 1951년 삼성물산 설립 때까지 고향 사람, 아는 사람을 기용했던 삼성은 제조업 진출을 계기로 인재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독일의 방직·호주의 양모 기술을 배워 오고 수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일가친척이 아닌 인재를 찾기 위해 고심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국내 최초의 공채 제도(1957년)다.
인재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집념은 대단했다. 신입 사원 한 명을 뽑을 때도 공채 면접 사장단 옆 한쪽 구석에는 늘 이병철 회장이 앉아 있었다. 또 정성스럽게 뽑을 뿐만 아니라 집요하게 교육시켰다. 경기도 용인에 마련한 동방생명 연수원(현 삼성인력개발원)은 삼성의 경영 이념과 철학을 전파시킨 인재사관학교의 요람이었다.
당시 비서실 임원으로 일한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은 매일 아침 이병철 회장에게 교육 현황을 보고해야 했다. 공채 8기로 이병철 회장을 지켜본 손욱 삼성인력개발원 전 사장은 이 시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오늘 연수원 무슨 과정에 총 몇 명이 교육을 받는다는 식으로 보고했는데, 200명 과정에서 90%인 180명이 안 되면 불벼락이 떨어졌어요. 회장이 매일 체크하니 비서실이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이 엄청 노하셨어요’라고 해서 만사 제쳐 놓고 교육을 해야 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확실한 담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경영 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교육을 통한 인재 육성이 곧 기업의 미래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과 경영 철학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삼성의 대표 별칭인 ‘관리의 삼성’은 이 무렵부터 시작됐다. 농경 사회에서 경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앞서 배운 사람의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관리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의 틀 속에서 빠르게 전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관리의 삼성의 중심에는 회장의 참모들, 즉 비서실(1959년 출범)이 있었다. 비서실은 ‘돈(재무)’과 ‘사람(인사)’을 움켜쥐며 관리의 삼성의 본산 역할을 했다. 특히 인재를 제일로 여기던 이병철 회장 뜻에 따라 인사팀 멤버가 삼성을 좌우했다.
소병해 실장, 12년간 ‘2인자’ 자리
그룹 내 2인자는 비서실장이었다. 그중에서도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비서실장을 맡은 소병해 실장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건희 회장과 동갑내기인 소병해 실장은 1978년 제8대 비서실장으로 취임한 이후 12년간 최장기 2인자 자리를 지켰다.
경북 칠곡 출신으로 대구상고와 성균관대 상학과를 졸업해 36세에 비서실장에 오른 소 실장은 전통적인 ‘재무 라인’으로 분류된다.
삼성 비서실은 이서구 초대 비서실장이 임명되며 신설됐는데, 소 실장 시절에 이르러 ‘권력형’ 조직으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15개 팀 250여 명의 인력을 거느리며 인사·감사·기획·재무·경영관리·국제금융·홍보 등 그룹의 전 방위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파워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소 실장은 삼성그룹의 전산화를 정착시키고 경영권 승계 과정을 연착륙시킨 1등 공신이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인맥을 중심으로 계열사 경영과 인사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계열사 사장들이 소 실장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이병철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자네 직함이 뭔가”라는 질책을 받은 일화도 있다.
회장의 명령은 비서실에서 각 계열사로 전달됐다. 이 중간다리 역할을 지금의 최고재무책임자(CFO)에 해당하는 ‘관리본부장’이 했다. 각 계열사 사장이 있었지만 그 아래 직급인 관리본부장이 사장보다 더 힘이 셌다.
계열사에서 재무와 인사를 관리하는 관리본부장들은 비서실과 직접 소통하며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돈과 사람 관리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고 사장의 평가까지 관리본부장을 통해 이뤄졌다. 사장이 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관리본부장과 비서실을 거쳐야 했다.
당시 관리본부장 출신들은 후에 CEO로도 많이 활약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전자 관리본부장을 지낸 이대원 삼성항공 전 부회장, 이준구 삼성테크윈 전 사장 등이다.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이었던 이학수 전 부회장도 이병철 회장 시대의 제일모직 관리부장 출신이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의 많은 부분을 직접 챙겼다. 오너이면서 실질적인 CEO 역할을 했고 계열사 사장들은 최고운영책임자(COO)에 가까웠다. 관리의 삼성은 비서실과 관리본부장을 중심으로 주로 ‘쪽지’로 전해 오는 회장의 지시 사항을 챙기며 철저하게 명령을 달성해 나가는 데서 힘을 발휘했다.
직원들은 앞에서 길을 보여주는 리더를 따라 “우리 회장님이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따라가던 시절이다.
이병철 회장의 머릿속엔 삼성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었다. 삼성이 전자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LG전자(당시 금성사)보다 10년 늦은 1969년에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LG전자가 라디오로 시작해 흑백 텔레비전으로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삼성전자는 1969년 설립 이후 1985년까지 내수 시장에서 전국 대리점 망이 튼튼한 LG전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수출에 더욱 공을 들였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의 미래가 첨단 기술 산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980~1982년 제2차 오일쇼크로 매출액이 절반으로 떨어지던 시절에도 기술 투자에 나섰다. “삼성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첨단 기술 산업이다. TV·냉장고로는 안 된다. 전자 산업이 세상을 지배할 텐데 첨단 기술을 잡아야 한다.”(이병철 회장)
그는 보다 큰 그림을 그렸다. 삼성전자가 잘되기 위해서는 부품 산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생각에 “1982년부터 5년 동안 삼성전기는 종합 부품회사로 매출액을 10배인 3000억원으로 키워라, 삼성SDI는 브라운관 생산을 100만 개에서 1000만 개로 늘려라. 그러면 세계 1등이 된다”고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이와 같은 회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관리의 삼성은 위력을 발휘했다. 삼성전기는 10배 성장을 위해 매년 67% 성장을 목표로 했고 신규 사업 25개를 동시에 시작했다. 딱 5년 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며 그 명령은 유언이 되고 말았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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