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DNA'로 진격하는 LG 인재
작년 매출 150조원…계열 분리하고도 21년 새 5배로 키워
1947년 구씨와 허씨 집안이 의기투합해 자본금 300만원으로 만든 조그만 화학공업사가 오늘날 재계 서열 4위 LG그룹과 GS그룹(7위), LS그룹(15위)을 낳았다.
고 구인회 창업회장에 이어 구자경 명예회장, 1995년 경영권을 이어받은 구본무 회장에 이르기까지 LG는 불가능에 도전해 왔다. 국산 1호 화장품과 치약을 생산해 냈고 국내 최초로 라디오·냉장고·컬러TV 등을 만들었다.
이제는 ‘혁신 DNA’를 가진 인재를 앞세워 시장을 선도하는 ‘일등 LG’를 실현하려는 그룹의 비전 ‘LG 웨이(WAY)’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룹 지주회사와 신사업은 물론 전자와 화학 부문을 중심으로 LG의 파워 엘리트를 분석한다.
“혁신 기반을 토대로 제2의 혁신을 본격화하고 정도 경영으로 고객·사원·주주·사회를 만족시키는 초우량 LG를 만들어 가겠다.”
‘온화한 승부사’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5년 2월 22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해 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고 저력”이라며 “이제 그 전통을 한층 새롭게 해 세계 초우량을 진정으로 갈구하고 오직 초우량을 목표로 삼는 강한 LG를 만들자”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이처럼 구 회장은 기존의 LG 경영 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인간 존중의 경영’에 정직과 공정을 바탕으로 한 ‘정도 경영’을 새로운 경영 철학으로 정립한 것이다. 보수적이고 우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문화로 급속히 바꿔 나갔다.
1945년 경남 진주 출생인 구본무 회장은 연세대 상대 재학 중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 오하이오 주 애슐랜드대를 나왔다. 클리블랜드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75년 LG화학 과장으로 입사했다.
위기 때마다 빛난 ‘결단과 끈기’
부친인 구자경 LG명예회장이 창업회장(고 구인회 회장)에게서 철저한 경영 수업을 받았던 것처럼 구 회장 역시 부장·이사·상무·부사장 등을 차례로 거쳤다. LG화학과 LG전자 및 기획조정실 등 그룹 내 주요 회사의 영업·심사·수출·기획 업무 등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1985년 회장실 전무로 승진하고 1989년 LG그룹 부회장에 올랐다.
1995년 회장 취임 직후 공정문화추진위원회·전략사업개발단·그룹 환경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해 7월 미국의 대형 가전 업체 ‘제니스’를 전격 인수, 21세기 초우량 가전 멀티미디어 업체로서의 성장 기반을 다졌다. 이듬해인 1996년 7월 미래 전략 분야인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을 위해 LG텔레콤을 설립했다.
구 회장은 취임 후 전자·디스플레이·화학 등 주력 분야를 글로벌 기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자동차 부품·에너지 솔루션 등 차세대 성장 사업 분야에도 과감히 도전했다.
그는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과감히 도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일단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그 과정이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도에 포기하거나 단기 성과에 급급해하지 않고 부단히 도전해 달라”고 경영진에게 강조했다.
1997년 말 외환 위기라는 국가적 난국을 헤쳐 나가는 동안 당시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는 ‘반도체 빅딜’이 이뤄지기도 했다. 구 회장은 그 대신 향후 LG의 미래 먹을거리 사업으로 액정표시장치(LCD)를 눈여겨봤다. 그 결과 LG는 ‘제2의 반도체’라고 불리는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D-LCD) 생산에 주력했다.
하지만 LCD 사업은 1998년까지 적자가 지속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마침내 LCD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 단계에 이르자 1999년 9월 필립스로부터 당시 외자 유치 사상 최대 규모인 16억 달러를 투자받아 합작회사인 LG필립스LCD를 설립하는 쾌거를 이뤘다. 구 회장의 뚝심이 아니었으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성과였다.
이후 LG는 필립스와 결별, 2008년 단독 법인인 LG디스플레이를 출범한 이후에도 지속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 기업으로 거듭났다. LG디스플레이는 현재 대형 LCD 패널 분야에서 23.9%의 점유율로 2009년 4분기부터 2015년 3분기까지 24분기 연속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끊임없는 연구·개발(R&D)을 통해 2013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는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의 세계 최초 양산에 성공했다.
LG화학은 현재 중대형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 1위로 평가 받는 등 이차전지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2013년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내비건트리서치가 발표한 세계 전기차 배터리 기업 평가 및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배터리 제조사 국제 경쟁력 평가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디스플레이·이차전지 세계 최고 사업으로
글로벌 이차전지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LG화학의 이차전지 사업은 약 25년 전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구 회장은 영국 출장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하면 여러 번 반복해 사용할 수 있는 이차전지를 처음 접했다.
이차전지가 미래의 새로운 성장 사업이 될 가능성을 본 것이다. 구 회장은 당시 계열사였던 럭키금속에 이차전지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 럭키금속의 전지 연구 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
1997년 LG화학 연구진은 소형 전지 파일럿 생산에 성공했다. 하지만 대량 양산하기에는 품질이 따라주지 않았다. 일본 선발 업체들의 기술 경쟁력을 따라잡기에도 역부족이었다. 1990년대부터 수년간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주변에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하라.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라”고 독려했다.
2005년 이차전지 사업이 2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다시 한 번 임직원들을 다독였다.
LG그룹 관계자는 “미래를 위한 사업과 경영 활동에서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며 용기 있고 과감하게 추진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끝까지 도전해 결실을 보는 구 회장 특유의 ‘결단과 끈기’의 리더십이 힘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구 회장 체제 초창기에 LG회장실을 책임진 인물은 이문호 당시 사장(LG인화원 전 부회장)이었다. 그는 1942년생으로 서울대 사대부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66년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 입사했다.
구 회장이 1998년 3월 경영 체제를 개편해 ‘이사회 중심의 선진국형 책임 경영 체제’ 확립을 천명할 때도 이 전 부회장이 앞장섰다. 기존의 형식적으로 운영되던 이사회를 업무 집행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과 대표이사의 직무 집행 감독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이사회 운영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구 회장 자신도 LG화학과 LG전자의 대표이사로서 이사회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이사회 중심의 책임 경영을 실천했다.
구 회장은 곧이어 1998년 4월 회장실을 구조조정본부로 개편했다. LG구조본 체제의 핵심 인물은 강유식 LG경영개발원 부회장이다. 회장실에서 사장과 부사장으로 손발을 맞췄던 이문호 전 부회장과 강 부회장이 각각 초대 본부장과 부본부장을 맡았고 이듬해 3월엔 강 부회장이 본부장(사장)으로 승진했다.
청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1972년 LG화학에 입사한 그는 1948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2002년 구조본 부회장에 올랐다. 2003년 3월부터 2012년까지 지주회사인 (주)LG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는 등 15년 동안 구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LG그룹의 구조조정 업무와 지주회사 전환 업무를 진두지휘했다.
강 본부장은 ‘부드러운 원칙주의자’로 불리며 그의 경영 철학도 ‘원칙에 충실한 정도 경영’과 ‘성과주의’로 집약된다.
강 부회장은 남용 LG전자 전 부회장, 이헌출 LG카드 전 사장과 함께 ‘48년생 서울 상대 3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모두 회장실 출신이다. 남 전 부회장은 1989년 회장실로 옮겨 1992년 구자경 명예회장 비서실장을 거쳤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구 명예회장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97년 계열사로 옮겨 2007년부터 2010년까지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고 2015년부터 대림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전 사장은 1975년 LG화학에 입사해 1987년 LG회장실 이사로 승진한 이후 회장실에서 참모 역할을 하다 1997년 LG카드로 옮겼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
당시 LG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작업은 재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슈였다. 외환 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의 지배 구조가 문제시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른 그룹에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LG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것은 2000년 7월이다. 계열사 간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출자 관계를 재편해 지주회사가 관련 업종 계열 기업의 지분만 소유하고 업종과 무관한 계열사 간 출자 관계를 해소함으로써 출자 구조를 단순화·수직계열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주회사 체제는 ‘한국형 지배 구조’에 대한 모범 답안의 하나로 정부와 기업에서 관심을 갖던 시기였다. 정부에선 지주회사 체제를 위한 법적 요건을 명시한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LG는 전자와 화학 분야의 중간지주회사(LGEI와 LGCI) 과정을 거쳐 두 개의 중간지주회사를 합쳐 2003년 3월 완결편인 통합 지주회사 (주)LG를 출범시켰다.
2015년 9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기준으로 LG는 자회사 16개, 손자회사 39개, 증손자회사 3개, 기타 8개사를 거느리고 있다.
엄수진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원은 ‘국내 지주회사 체제 전환 현황 및 사례’ 보고서에서 LG그룹 지주회사 설립 과정상의 두드러지는 특이 사항으로 유상증자를 통한 공개 매수를 실시, 추가 자금 투입 없이 자회사 지분을 확보한 점과 별도의 구조조정이나 합작 없이 지주회사를 설립했다는 점을 꼽았다.
엄 연구원은 “유상증자를 통한 공개 매수 덕분에 지배 주주는 현금의 추가 지출 없이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며 “인적 분할 방식을 통해 분할된 사업자회사들이 지주회사와 함께 동시에 상장했다는 점, 지주회사 할인 현상으로 투자자들의 지주회사 지분 보유 유인이 적어 지주회사의 주가가 하락했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LG의 지주회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늘어나 작년 9월 말 현재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는 140곳(일반지주 130, 금융지주 10)에 이르고 있다. 대기업집단 중에서는 SK·CJ 등 30곳이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고 있다.
57년 동업에 종지부 찍은 계열 분리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한 LG는 2006년 4월 파주에 대규모 7세대 LCD 공장을 준공하고 2013년 7월 자동차 부품 R&D 기지인 ‘LG전자 인천캠퍼스’를 준공했다. 또한 LG화학은 2014년 8월 아우디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는 등 사업 자회사를 통한 활발한 투자와 글로벌 경영에 나서고 있다.
LG는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LIG·LS·GS그룹을 계열 분리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1999년 LG그룹에서 분리된 LG화재해상보험(현 KB손해보험)이 모태인 LIG그룹은 지주회사인 LIG를 중심으로 3개 사업 영역인 방위산업·정보기술(IT)·서비스 부문에 총 6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LG전선 관련 기업들 역시 LG그룹이 지주회사로 전환한 그해 11월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고 LS그룹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구인회 창업회장의 동생들이 조카인 구자경 명예회장 일가의 전적인 동의를 얻어 아무 잡음 없이 성공적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2005년 3월 31일 3대째 내려오면서 57년간에 걸친 구씨와 허씨 동업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4년 7월 LG가 다시 두 개의 순수지주회사인 LG와 GS홀딩스로 분할됐고 GS그룹은 2005년 3월 서울 역삼동 GS타워(구 LG타워)에서 기업 이미지(CI) 및 경영 이념 선포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이날 구본무 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LG와 GS는 한 가족으로 지내며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다”며 “GS가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고 가슴 뿌듯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처럼 계열사를 차례로 분리해 금융업·전선·정유·건설·유통 등의 사업 영역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LG그룹의 매출은 5배 정도 증가했다. 시가총액도 7조원에서 82조원으로 불어났다.
LG는 구 회장 취임 전 1994년 연 매출 30조원에서 지난해 150조원을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해외 매출은 10배 늘어난 100조원대를 돌파했고 해외 법인도 90여 개에서 280여 개로 늘어났다.
지주회사 체제를 안착시킨 후 구 회장은 줄곧 (주)LG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강 부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2009년 12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조준호 LG전자 사장이 (주)LG 공동 대표이사를 지냈다.
1959년생으로 휘문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조 사장은 1986년 LG전자에 입사했다. 1996년 1월 LG 회장실 경영혁신추진본부 이사대우로 승진한 이후 1999년 말까지 구조본에서 근무했고 LG정보통신과 LG전자 부사장을 거쳐 2008년 12월 (주)LG 경영총괄 부사장으로 옮겼다. 그는 2014년 12월부터 LG전자 MC(모바일커뮤니케이션)사업본부장(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조 사장에 이어 2015년 3월부터 하현회 사장이 (주)LG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1956년생으로 부산대 사학과를 나와 와세다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하 사장은 1985년 LG금속에 입사해 LG디스플레이 부사장을 거쳐 2012년 말 (주)LG 시너지팀장(부사장), 2013년 말부터 1년 동안 LG전자 홈엔터테인먼트(HE)사업본부장(사장)에 이어 2014년 12월부터 (주)LG경영총괄 사장을 맡고 있다.
미래 신사업 선점에 나서
디스플레이와 이차전지를 세계 1위로 올려놓은 구 회장은 또 한 번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B2B 사업 중심의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 솔루션, 소재부품을 새로운 미래 먹을거리로 정하고 선제적인 투자와 자원을 집중해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는 것.
구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자동차 부품과 신에너지 분야처럼 성장의 가능성을 봤다면 자원을 집중해 과감히 치고 나가 남보다 먼저 시장을 선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미래 신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지난해 말 임원 인사에서도 (주)LG에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 소재부품 등 그룹 전체의 미래 먹을거리 사업을 이끌 ‘신성장사업추진단’을 신설했다. 구 회장의 취임 초기에 발족했던 ‘전략사업개발단’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단장에는 구본준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을 임명했다. 구 부회장은 LG전자 이사회 의장을 겸한다. 또 OLED와 이차전지 등 B2B 신사업을 키워낸 한상범 LG디스플레이 사장과 권영수 LG화학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구 부회장의 신사업 구상을 집중 지원할 (주)LG 시너지팀장은 기존 사업개발팀장(부사장)을 맡고 있다가 이번에 승진한 백상엽 사장이 맡았다. 시너지팀은 이번 조직 개편에서 사업개발팀과 통합했고 구 회장의 양자인 구광모 상무(1978년생)도 시너지팀 소속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70세에 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점을 들어 재계에서는 구 회장도 작년에 70세여서 넘겨주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구 회장이 왕성하게 경영 활동을 하고 있는 데다 구 상무의 나이를 감안해 구 부회장이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이어지고 있다.
구 회장의 동생들 중에선 구자경 명예회장의 3남인 구본준 부회장만 LG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김현기 기자 henr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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