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가는 여전히 약세…조용히 지나간 ‘슈퍼 엘니뇨’

{FAO 식량가격지수 하락세 지속, 라니냐 변수는 남아 있어}


[한경비즈니스=차완용 기자] 양호한 작황, 풍부한 재고, 수요 부진에 의해 곡물 가격이 하락하고 있다. 중국 등의 경기 둔화로 수요가 줄어든 반면 미국 등 주요 곡물 수출국에서 생산량과 재고가 늘어난 때문이다.

엘니뇨 등 기상이변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반등할 것이란 당초 기대와 달리 중국·브라질·러시아 등 농산물 가격을 견인해 온 주요 신흥국의 경제 사정 악화가 기상 변수를 상쇄하면서 당분간 농산품 시장을 약세 흐름으로 이끌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상승 흐름을 타기 시작한 농산물 가격은 신흥국 경기 호조에 따른 수요 증대와 늘어나는 바이오 연료 생산에 힘입어 국제 원유나 금속 등 다른 원자재들과 함께 상승 랠리를 이어 왔다.

하지만 원자재 슈퍼사이클을 타고 치솟던 농산물 가격은 2012년을 정점으로 빠른 속도로 내리막을 걷고 있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곡물 가격 상승에 대응해 전 세계에서 농산물 생산량이 증가한 가운데 신흥국 수요가 둔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반등 힘겨운 농산물 가격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엘니뇨 이후 라니냐 발생 가능성이 있어 농산물 가격 상승 위험이 내재한다. 라니냐 시기에는 북미·남미의 가뭄으로 옥수수와 대두의 단위 생산량이 크게 감소해 충격이 크다. 그러면 농산물 분야 전반에 걸쳐 가격이 오를 수도 있다.

물론 현시점의 곡물 가격만 놓고 보면 여전히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올해 2월 식량가격지수가 전월과 비슷한 150.2를 기록했지만 전년 동월에 비해서는 14.5%(25.6포인트) 낮은 수치다.

특히 1년 동안 식량가격지수는 계속 하락세를 보여 왔다. 작년 2월 175.8에서 작년 12월 153.4에 이어 올해 1월에도 150.0까지 떨어진 것이다.

주요 품목을 살펴보면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의 옥수수 2개월물은 작년 7월 부셸당 466센트로 단기 고점을 형성한 이후 지난 3월 2일 356센트까지 떨어졌다가 3월 31일 351센트로 소폭의 등락을 거듭했다. 소맥 2개월물도 작년 6월 말 부셸당 616센트에서 3월 1일 446센트까지 추락한 뒤 3월 31일 474센트로 소폭 회복했다.

이처럼 주요 곡물 가격이 당분간 하락세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형국이다. 특히 소맥 가격은 미국의 겨울 밀 작황 전망이 양호해 공급 부담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대두와 옥수수는 남미(브라질·아르헨티나)의 작황 차질 우려가 일정 부분 가격의 낙폭을 제한했지만 소맥은 단기적으로 반등을 지지했던 러시아의 소맥 수출 제한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재차 공급과잉 부담을 반영하며 하락했다. 러시아는 소맥 수출세와 관련해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올해 초 루블화 가치 급락에 따른 물가 상승을 우려한 러시아가 소맥 수출을 제한하는 정책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전망이 소맥 가격 상승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1월 말 들어 점유율 확대를 위해 수출세를 낮추거나 폐지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소맥 가격에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대두와 옥수수는 남미의 기상 여건과 함께 미국의 수출 추이에 반응하는 흐름을 보였다. 달러화 강세 기조가 주춤하고 있지만 미국의 신곡 수출이 크게 개선되지 못하면서 가격 반등을 지지하지 못했고 지지부진한 흐름 속에서 월간 단위로 소폭 하락했다.

게다가 늘어나는 생산량과 곡물 재고가 당장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가격 하락세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 농무부의 1월 수급 전망 보고서(WASDE)는 곡물 가격에 부정적이었다. 소맥은 2015~2016년 말 재고 전망치가 상향 조정됐고 미국의 수출이 4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 기상 악재 불구 작황 호조

데이비드 콜 버지니아공과대 농업경제학과 전 교수도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및 다른 신흥국의 성장률 둔화로 농업과 지방 경제가 “랠리 이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갈 상황에 직면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분간 곡물 가격은 큰 폭의 등락이 제한되는 지지부진한 양상을 이어 갈 전망이다. 3월 이후 시작되는 남미의 수확과 맞물려 미국의 신곡 수출이 부진한 흐름을 보인다면 약세 흐름이 이어질 수 있다.

브라질 농산물유통공사(CONAB)는 지난 2월 초 올 시즌 대두 수확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지만 여전히 사상 최고 수준이며 옥수수는 상향 조정했다. 대두 수확량은 1억90만 톤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직전의 1억1800만 톤 대비 하향 조정됐고 옥수수는 2835만 톤으로 58만 톤 상향됐다.

물론 남미의 기상 여건은 여전히 긍정적이지 못하다. 특히 브라질 주요 작황 지역의 강우량이 아직 예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기상 악재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작황을 유지한 채 수확 시즌에 접어들기 때문에 수확 차질을 야기하는 강도 있는 이상기후가 발생하지 않는 한 곡물 가격이 날씨 모멘텀을 받기 힘들다.

소맥 시장은 여전히 암울하다. 주요 곡물 중 재고 부담이 가장 높은 데다 미국의 수출 둔화 우려까지 더해지면서 하락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곡물 작황에서 소맥은 대두나 옥수수와 다른 주기를 가지는데 현재는 겨울밀 작황(9~10월 파종 후 이듬해 6~8월 수확)이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겨울밀 작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공급 전망은 지속적으로 상향 조정되고 있다. 미국의 대두·옥수수 파종이 시작되는 4월부터는 파종 진행 상황이 곡물 가격에 대한 영향을 높일 전망이지만 3월은 이미 노출된 재료들에 의한 등락이 지속되고 변동성이 높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농산물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있다. 날씨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이 전 세계 이상 기온 현상을 일으킨 엘니뇨가 물러가면 라니냐가 원자재 가격에 새로운 복병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엘니뇨 다음해에는 페루 앞바다 해수 온도가 내려가는 라니냐 현상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이다.

라니냐 때는 미 곡창지대에 비가 줄면서 수확량이 감소할 수 있다. 이전 라니냐가 관측된 2006~2007 생산 연도에는 미 옥수수 수확량이 5% 줄었다. 라니냐는 엘니뇨와 반대로 동태평양 지역의 수온이 낮아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엘니뇨로 지난해 호주와 북미 지역에는 평년보다 따뜻한 날씨와 가뭄이 이어졌다. 이와 반대로 라니냐는 북미 지역에 많은 비를 뿌리고 기온을 낮출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 연합뉴스)

◆ 라니냐 영향, 전망 엇갈려

라니냐는 원자재 중에서도 곡물 가격에 큰 변화를 줄 것으로 전망된다. 소시에떼제네랄은 올해 초 발간한 보고서에서 “미국에 가뭄이 이어지면 옥수수·대두·밀 수확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건조한 날씨도 옥수수와 대두 작황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1997년에서 1998년 사이 엘니뇨와 그 뒤를 따른 라니냐의 영향으로 농산물 가격이 크게 올랐던 애그플레이션(농산물의 지속적인 가격 상승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반면 올해 라니냐가 발생해도 그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날씨에 대한 대응력이 높아진 데다 작년 엘니뇨 피해가 적어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옥수수의 세계 재고는 사상 최대 수준에 가깝다.

작년에도 사상 둘째 규모라는 엘니뇨 현상이 세계를 강타했지만 곡물 가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영향으로 미국의 곡창지대는 지역에 따라 고온이거나 강수량이 증가했다. 일반적으로 6~8월 생육 시기에 고온이 이어지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줄어들고 강수량이 늘면 씨앗 유실이나 수확 지연으로 수확량 감소로 연결된다.

하지만 강력한 엘니뇨 현상에도 2015~2016 생산 연도 미국산 옥수수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전년보다 2% 감소하는 데 그쳤다. 2012년 엘니뇨 현상 때 4% 감소한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오히려 이번에는 엘니뇨에 따른 강수가 생육에 도움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엘니뇨 때문에 건조해지기 쉬운 호주의 밀 수확량도 전년보다 늘었다.

한편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식량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농산품 시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시장이 좋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농산물에 투자할 적기라는 견해도 있다.

원자재 투자 전문가인 짐 로저스는 최근 B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원자재 시장의 호황이 영영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수요가 적거나 떨어지더라도 공급이 없으면 원자재는 다시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cw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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