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의 봄’ 준비하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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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티크의 봄’ 준비하는 한국

한국 앤티크 시장에도 봄이 왔다. 유럽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앤티크 투자가 한국에서도 꽃망울을 피우고 있다. 드넓은 앤티크의 세계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는 것은 나 자신의 취향과 안목에 달려 있다. 스스로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세계,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앤티크에 한국의 컬렉터들이 주목하고 있다.
이현주 기자│사진 서범세 기자, 한국경제 DB

영국에서 꽃피운 서양 앤티크 문화는 미국과 일본 등을 거쳐 한국에서도 움트고 있다. 일찍이 삼성·신세계가(家) 등의 재계에서 앤티크 투자에 눈을 떴고, 좀 더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00년 후반이다. 서울 이태원에 앤티크 가구 거리가 조성된 것도 그 무렵이다.
3월 말 찾은 이태원 앤티크 거리는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곳은 올해 들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는 약 85개 상점이 모여 있는 이 원조 앤티크 거리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연상시키는 유럽풍 거리로 탈바꿈하기로 했다. 거리를 확장하고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플리마켓(flea market)도 열린다. 4월 14~17일 열리는 앤티크 축제 ‘2016 이태원 앤티크 & 빈티지 페스티벌’을 앞두고 새 단장이 한창이다.
앤티크 거리의 대명사가 이태원이었다면, 최근 일산에도 또 다른 앤티크 거리가 조성됐다. 정발산역 인근에 생긴 ‘보넷길’이 그곳이다. 유럽 현지에서 앤티크를 수입해 판매하는 20여 곳 상점이 밀집해 있다. 마니아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별다른 홍보 없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 서양 앤티크는 국내에서 얼마나 많이 향유되고 있을까.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100년 이상 된 골동품은 1233만2000달러(약 143억 원)로, 15년 전인 2000년 643만6000달러(약 74억 원)에 비해 589만6000만 달러(약 68억 원) 늘어났다. 특히 악기류, 도자기류, 가구류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산가들의 취미생활로 떠올라
국내에서 앤티크 열풍이 한차례 불던 때가 2000년대 초반이다. 진짜 앤티크 제품보다 ‘앤티크 스타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시대품의 스타일을 흉내 낸 70~80년 된 가구가 대부분으로, 10만 원 이하의 제품부터 1000만 원이 넘는 장식장 등 고가품까지 다양하게 거래돼 왔다.
최근 다시 부는 ‘앤티크 붐’은 과거와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더 강해진 컬렉터’들이 대표적이다. 컬렉터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좋은 딜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묻지마 투자’가 되지 않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방대한 앤티크의 세계에서 남들이 잘 모르는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이며, 심미안도 갖춰야 한다. 이와 같은 전문가 뺨치는 컬렉터들이 하나 둘 배출되면서, ‘나만의 컬렉션’에 도전하는 이가 늘고 있다.
분야도 다양하다. 시계, 가구, 도자기, 유리공예, 와인 등으로 각기 다른 전문성을 드러내는 컬렉터 집단이 존재한다. 개인 박물관을 열 목적으로 유명 유럽 도자기 브랜드인 마이센, 세브로의 앤티크를 색깔별로 모으는 이도 있다. 이태원의 하이엔드 앤티크 상점인 스칼렛 앤틱의 황보춘자 대표는 “한번에 수억 원씩 큰 비용을 쓰는 고객도 있다”며 “불황으로 앤티크 시장이 양극화가 됐는데, 하이엔드의 경우 여전히 불황을 비켜가는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남성들에게는 시계와 와인, 오디오가 핫 아이템이다. 51년 된 앤티크 시계 전문점 용정 컬렉션의 김문정 대표는 “예전에는 딜러가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날 가게 앞에 줄을 서던 고객들이 이제는 직접 여행 스케줄에 맞춰 바젤 페어와 같은 시계박람회에도 참가하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20~30대 청년층으로 고객층이 확대됐다”며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동호회 활동이 크게 늘면서 롤렉스, 파텍 필립 등의 인기 아이템은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억 대를 불러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직접 원하는 브랜드와 시대품을 찾아나서는 앤티크 컬렉터가 많아진 배경에는 늘어난 해외여행이 한 몫을 차지한다. 해외여행 수요는 매년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에 오고 가며 자연스럽게 앤티크 문화를 접하고 해외의 유명 딜러들과 접촉하면서 이메일 등을 통해 직거래를 시작한 게 큰 변화다.
유럽 곳곳에 숨어 있는 앤티크 박물관과 페어, 경매장 등을 찾아 ‘앤티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악기 회사 브롬튼 아시아의 최지혜 경매사는 유럽의 고성들을 찾아 영국의 장식품을 연구하고 '영국 장식 미술 기행' 등의 책으로 내기도 했다. 여행사들도 유명 페어에 맞춰 앤티크 여행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또한 앤티크는 최근 인테리어 붐과 맞물려 각광을 받는다. 앤티크는 집 안 분위기를 바꾸는 데 효과적인 도구다. 호텔 중에서는 임페리어팰리스 호텔, 프리마 호텔이 일찍이 앤티크 인테리어에 눈을 뜬 곳이다. 꼭 집 안 전체를 앤티크로 도배하지 않더라도, 작은 소품 하나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유명 앤티크 장인인 티파니의 조명등을 설치하면 평범한 식탁이 1900년대 초 미국의 중산층 가정의 느낌으로 연출된다. 그렇게 작은 소품에서 시작해 하나의 분야로, 재현품에서 시대품으로 본격적인 컬렉션의 길에 접어드는 게 일반적인 입문 과정이다.
앤티크는 옛 시대의 것이지만, 나름대로 뜨고 지는 트렌드가 있다. 최근 한국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앤티크는 스털링 실버다. 유럽에선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앤티크이지만 한국에선 인기가 없었던 이 스털링 실버는 은의 함유량이 92.5% 이상인 은 합급 제품들이다. 영화 속 식탁에 등장하는 포크, 스푼, 나이프 등이 대표적으로 이를 ‘커트러리’라 부른다. 최근 ‘셰프의 전성시대’를 맞아 식문화와 푸드스타일링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이와 같은 커트러리가 일반 가정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앤티크의 힘은 고전으로서의 역할
앤티크는 흔히 비싸다는 인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잘만 고르면 웬만한 투자 못지않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자산가들의 새로운 취미생활로 떠오른다.
국내 최고의 헤리티지클럽을 지향하는 반얀트리 클럽앤스파 서울(이하 반얀트리 서울)은 최근 새로운 예술 강의 하나를 시작했다. 바로 ‘서양 앤티크 테이블 웨어’에 대한 강의다.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시대의 대표적인 앤티크를 홈 데커레이션에 접목하는 강의로, 지난 3월 초 첫선을 보였다. 반얀트리 서울의 멤버십 회원들과 입소문을 듣고 신청한 비회원 등 총 14명이 한데 모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강의를 진행한 백정림 이고갤러리 대표는 10여 년 전 본격적으로 서양 앤티크 컬렉션을 시작해 하우스 갤러리를 운영하며 앤티크 강의를 통해 홈 문화의 변화를 꾀하는 앤티크 문화 전도사다. 그는 부자들이 앤티크를 선호하는 것에 대해 “자산가들은 차별과 구별을 원한다”며 “희소한 앤티크를 손에 넣는 기쁨은 고가의 명품 가방을 살 때와는 또 다른 만족감을 안겨준다”고 설명했다. 앤티크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딜러와 신뢰 관계가 쌓인 후에야 오랜 기다림 끝에 손에 넣을 수 있다.
앤티크는 자신의 취향과 안목에 배팅하는 가치투자에 해당한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가구를 선택하고 배치하는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취향’은 사회적 계급과 연결돼 있다. 예컨대 가구는 집 안의 고유 언어로서 가구의 획득 과정은 자신감을 드러내는 방법이자 문화자본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자본에 비해 문화자본이 약한 한국의 부자들에게 앤티크는 상위 1%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매력적인 선택이다.
‘취향의 정치학’의 저자인 홍성민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유럽에서 취향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로 작동하는데 단순히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상층 계급이 될 수는 없다”며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키워 가고 즐기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거나 투자 목적만을 염두에 둔 소비와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앤티크가 과시적 소비에서 취향과 문화로 진화하면서, ‘앤티크 라이프’를 즐기는 모임도 생겨났다.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소사이어티를 형성하면서 지속적인 교류를 하는 것. 이미 유럽에서는 이런 소사이어티를 통해 앤티크를 지속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백정림 대표의 경우 앤티크 라이프를 즐기는 지인들과 함께 매년 플리마켓을 열고 있다. 이를 통해 서로 가진 물건을 교환하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 자체로 ‘작은 시장’이 생기는 셈이다.
앤티크에 빠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앤티크는 ‘삶을 바꾸는 투자’라고 전한다. 단순히 제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나만의 공간에 과거 한 시대의 역사를 들여놓음으로써 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삶 속에 흡수할 수 있어서다. “식탁 매너가 바뀌고 대화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 자녀들의 문화 소양을 늘리는 데도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앤티크 컬렉터들은 전한다. 한 앤티크 컬렉터는 “돈이 많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다”라며 “그런데 앤티크를 수집하고 지인들과 함께 즐기면서 우울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
앤티크의 진짜 힘은 고전으로서의 역할에 있다. 창조의 원천으로서 질문을 던지고 영감을 주는 도구다. 돌아보면, 수백 년 전의 물건이 지금까지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는 장인정신으로 공 들여 만들고 집 안에서 귀하게 대하면서 대를 이어 물려준 덕분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앤티크는 어쩌면 새것 증후군에 걸린 우리에게 ‘사람이건 사물이건 가장 가까이 있는 게 좋은 것이다. 오래 두고 아낄수록 더욱 좋아진다’는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주려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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