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당신은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병약한 노인의 도움 요청 차마 외면 못해}
{인간은 ‘이기적 DNA’ 뛰어넘어…이타주의적 충동 지녔기 때문}


(일러스트 김호식)

[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얼마 전 KTX를 타고 지방 강연을 가기 위해 지하철 4호선 플랫폼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멀리서 큰소리가 난다. 원래 남의 일에 관여하는 걸 싫어하는 성미라 눈길을 주지 않고 읽던 책을 다시 읽어 내린다. 고함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누가 아침부터 예의도 없이….” 나는 구시렁거렸다. 어떤 할아버지가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지팡이를 들고 더 크게 외친다. 순간 그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할아버지! 저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지팡이를 든 손은 더욱 격렬해졌다. 내심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겠지!” 하며 ‘구경꾼 효과(bystander effect)’를 노리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눌한 것으로 보아 중풍병 환자인 것 같은데, 먼발치서 봤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다가 금속으로 된 골프채를 지팡이 삼아 거꾸로 쥐고 있다. 옷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모양새가 천생 노숙자처럼 보였다.

재차 되물어 그의 의도를 알아냈다. 4호선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계단을 오르기가 힘이 드니 자신을 좀 부축해 달라는 것이다. 갑자기 그의 손이 내 손을 사정도 없이 움켜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조마조마하던 차에 환자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강력한 손아귀 힘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환승로는 무척 길었고 계단도 많았다. 땀까지 삐질삐질 났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미션을 완수하자마자 서둘러 현장을 벗어났고 지하철역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비눗물로 씻고 또 씻었다.

◆‘자기 보호’와 ‘질병 회피’의 본능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침에 보았던 그 노인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진화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7개의 부분 자아가 있다고 본다.

첫째가 자기 보호(Self-Protection) 부분 자아, 다음이 질병 회피(Disease-Avoidance) 부분 자아다. 자기 보호 부분 자아는 자신의 신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잠재적인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안전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침략자나 포식자 맹수들에게 생존을 위협받던 시절부터 몸에 밴 습성일 것이다.

질병 회피 부분 자아 역시 흑사병·천연두·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으로 전 부족이 거의 몰살되는 끔찍한 상황을 반복 경험한 조상들이 자연스레 질병 감염 상황에 민감해졌을 것이다.

중국에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 한국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창궐했을 때 사람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낯선 사람이나 생소한 이방인을 보균자로 인식, 접촉을 회피했던 것이 좋은 사례다.

아마도 위생 상태가 불량한 병자인데다가 위협적인 골프채까지 가진 낯선 사람을 보는 순간 나의 자기 보호 및 질병 회피 부분 자아가 동시에 극도로 활성화된 듯하다.


(사진) 빈센트 반 고흐 작 ‘선한 사마리아인’.

나는 문득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채 길가에 버려졌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자마자 오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오히려 온갖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정성껏 치료해 준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학자의 말에 예수는 되묻는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율법학자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하자, 예수는 명령한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하라!”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 바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아마도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DNA에 내재된 사람들의 ‘이기적인 본성’으로 설명하려고 들 것이다. 타인에게 선행을 하는 까닭은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혹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의 생각은 도킨스와 다르다. 프란스 드 발은 ‘이타주의적 충동’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는 ‘타인이 내는 고통의 신호에 반응하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타인이 필요한 걸 인식하고 적절히 반응하는 일은 유전적 이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프로그래밍된 본능과는 다르다.

융심리학자인 캐럴 피어슨의 생각도 프란스 드 발과 비슷하다. 그녀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원대한 것에 삶을 바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를 ‘이타주의자 원형’이라고 부른다.

유관순이나 잔 다르크와 같은 구국의 영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익사 직전의 혹은 불에 타 죽기 직전의 위급 상황에 놓인 생면부지의 낯선 타인을 구하기 위해 아무런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급류와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에도 이런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고흐는 사마리아인의 헌신과 오던 길로 도망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위선을 자신 특유의 황금빛 노랑 색조로 뚜렷하게 대조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병약한 노인 한 사람에게조차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지 못했던 ‘못난 이웃’이었던 나는 고흐의 그림을 보며 무안하고 당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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