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위기가 ‘재벌’ 탓인가

[리더스 뷰]


(일러스트 김호식)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KAIST청년창업투자지주 대표)] 20대 국회는 ‘협치’의 약속한 때문인지 첫 회기 대표 연설에서 여야를 구별하기 힘든 일관된 메시지를 내놓았다. 한국의 경제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으로 ‘재벌 개혁론’을 들고나온 것이다.

익히 ‘경제 민주화’의 기수인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대표 연설은 평소의 소신답게 대기업의 민주화를 위해 즉각 상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여당의 정진석 원내대표마저 재벌의 경제활동을 비정상적이라고 진단하고 ‘방만한 가족 경영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데서 재벌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한국에 팽배한 재벌 원죄론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의 ‘재벌 때리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현재 우리 경제가 처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국회의 단합된 재벌 개혁론이 과연 올바른 진단인지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실업의 증가와 고용 악화, 저성장과 빈부 격차 확대 등의 경제의 부정적 결과는 재벌이 지배한다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실리콘밸리로 대변되는 창업의 메카인 미국에서도 중산층 붕괴와 빈부 격차의 악화는 미국 대선에서 보듯이 국민들의 분노의 원인이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일본의 경제의 장기 침체의 해결책으로 기대를 모았던 아베노믹스는 이미 실패로 판정되고 있다. 유럽의 침체와 경제의 부진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움직임으로 대표되고 있다.

중소기업 중심 경제로 우리가 그렇게 칭찬하던 대만의 경제 위기와 젊은 층의 실망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경제학자들은 산업의 글로벌화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급격한 인구 구성 변화, 기술의 급격한 진화, 도시 집중화 등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흐름이 전 지구적으로 모순된 전환기 경제구조를 가져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으로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원인은 외면하고 재벌 원죄론에 집착하고 마녀사냥을 계속하는 꼴이다.

그렇게 막강하다는 우리의 재벌 중 가까운 미래에 생존을 걱정하지 않을 만한 기업은 현재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정부의 보호 하에 있는 금융회사와 소위 ‘전차부대(삼성전자와 현대차)’를 제외하고는 EBITA(현금 창출력)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예외적인 두 회사마저 심각하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은 중국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고 자동차는 전기자동차, 자율 주행 자동차, 차량 공유 서비스의 등장과 유인 드론의 가능성 등 산업의 지각변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어떠한 영역에서도 우리 기업은 주도적으로 혁신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가족 경영에 대한 비판 또한 현실적이지 못하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는 한국 기업의 대표적인 실패의 사례가 바로 대우조선해양이고 과거 기아차는 경영층과 노조의 도덕적 해이로 망하고 말았다.

역량이 안 된 2세, 3세의 경영 부실로 망하는 기업은 금융을 통해 철저하게 망하게 두면 될 일이다. 그런데 최근 조선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면 경영 부실을 재벌의 사재 출연이라는 통과의례만 거치면 막대한 국민 세금으로 구제하고 있으니 경영자의 역량을 걱정할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때 오바마 정부의 미국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은 정부와 의회 청문회에 자동차 경영자들이 불려 다니며 돈의 사용처와 노조의 복지 축소, 공장 폐쇄와 국제적 경쟁력을 회복할 정도의 인력 구조조정, 임금 삭감을 약속 받고 구조조정 자금을 제공했다.

하지만 우리는 구조조정이 아닌 부실기업 구제를 남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부실 경영의 재벌 구조도 건재하다.

최근 하버드의 새로운 경영 이론은 기업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선택적으로 잊어야 할 과거와 잘 관리하고 집중할 현재의 핵심적인 사업의 박스, 미래에 대비하는 실험적 박스 등 세 가지 유형을 분류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니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기계로 전환될 때 내구성을 최고의 가치로 두던 식스시그마의 성공 신화에 매몰돼 실기했고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 과거의 지나친 성공에 발목 잡힌 노키아는 터치스크린 기술 없이 자체 연구·개발(R&D)로 시간을 허비하며 과거에 매달리다가 망했다.

한국 사회는 전환기의 위기에 처해 있다. 과거의 도그마 중 재벌 원죄론이 있고 금산 분리의 원칙이 있고 의료 민영화 불가의 원칙이 있다. 이런 도그마를 잊지 못하니 원격의료, 인터넷 은행, 금융시장에 의한 경제의 자율적 혁신과 순환도 안 된다.

우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는 경제적 자폐 증세가 심각하다. 그 자폐증의 원인에는 수년 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일갈했다는 삼류도 못되는 오류의 정치권이 일류나 이류를 통제하고 충고하려는 오만이 존재한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