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에게 '감동'을 전하는 기업이 산다
위기의 수호자 자처하는 애플 광팬들, '정서적 연대' 구축이 핵심 키워드
1990년대 중반 스티브 잡스가 당시 애플의 임시 대표로 갓 복귀한 후 애플에서 주최한 콘퍼런스에 참석한 ‘바이올로지(Buyology)’의 저자 마틴 린드스트롬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다.
스티브 잡스가 기조연설 도중 “우리는 더 이상 뉴턴(애플의 PDA) 라인을 지원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뉴턴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 관객들이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자기의 뉴턴 단말기를 콘퍼런스 룸 바닥에 던진 후 발로 밟기 시작한 남성,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중년 여인 등 콘퍼런스 룸은 애플 지지자들의 감정적인 동요와 슬픔의 표출로 순식간에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에반젤리스트(Evangelist)’의 개념은 기독교에서 비롯된 단어로,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부 소비자들의 특정 브랜드에 대한 특성이 이들과 비슷하다고 해서 광적으로 특정 브랜드를 지지하는 소비자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소셜 미디어 타고 영향력 커져
에반젤리스트라고 불리는 이러한 특정 소비자들의 행동은 기업 활동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사랑에 빠진 기업의 제품을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기업에 대한 비판에 맞서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행동을 하곤 한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후 경영에 복귀하기 전 약 10년간 애플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겪었고 회사가 매각되기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 시절 애플의 에반젤리스트들은 애플이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지역별 조직을 만들어 무료로 제품 상담이나 애프터서비스를 대행하기까지 했다.
애플로부터, 유통 채널로부터 이들에게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에반젤리스트들은 스스로 애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에반젤리스트의 역할은 소셜 미디어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에반젤리스트들은 각종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제품에 대한 우호적 리뷰와 추천을 하고 브랜드를 소재로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한다.
또한 브랜드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때로는 감정이 실린 반론으로 편 가르기와 논쟁을 확산시키기도 한다. 에반젤리스트를 보유한 기업들은 특별한 홍보비용 없이도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콘텐츠를 에반젤리스트의 입을 통해 잠재 고객들에게 노출시키고 소비자들은 해당 브랜드에 대한 팬 또는 안티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에반젤리스트들은 해당 브랜드를 일반 소비자 대비 13% 정도 많이 구매해 고정적인 매출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브랜드에 대해 우호적인 내용을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전달해 부가적인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전 피스크와 크리스 말론은 ‘어떤 브랜드가 마음을 파고드는가’라는 저서에서 ‘휴먼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들에 따르면 심리학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따뜻함’과 ‘유능함’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데, 이러한 평가의 잣대가 기업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연결성이 강화되고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높아지면서 기업이 제공하는 이미지 중심으로 형성됐던 기업에 대한 인식이 ‘기업의 실제 행위에 근거한 평판’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2 발표에서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술과 인문학이 결합됐을 때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제품을 내놓게 됩니다”라며 제품 개발 시 기술을 통한 소비자들의 효용을 넘어 그들이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과 소비자 간 정서적 동기화의 도구는 무엇일까.
첫째, 우선 브랜드가 추구하는 신념을 들 수 있다. 소비자들이 브랜드를 바라보는 시각 내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제로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1%가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비슷할 때 그 기업의 브랜드를 구매하는 경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즉 소비자가 추구하는 개인적인 가치가 구매하는 브랜드에 투영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추구하는 가치나 신념은 개인마다 다르며 이러한 신념을 기업이나 브랜드가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타깃 고객들이 갖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와 브랜드의 그것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초창기 애플은 다양한 광고 캠페인을 통해 선과 악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형성하고 자신들이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대척점에 서서 소비자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강조해 왔다.
애플은 1984년 슈퍼볼 광고에서부터 시작한 IBM(빅 브러더) 반영웅의 이미지를 IBM의 ‘싱크(Think)’ 슬로건을 비꼰 ‘싱크 디퍼런트(Think different)’ 캠페인을 통해 지속해 왔다. 최근 수년간의 ‘맥 vc PC’라는 광고 캠페인도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
구글 또한 ‘악해지지 말라(Don’t Be Evil)’는 강령을 기초로 자신들이 마이크로소프트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둘째, 소비자들과의 정서적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브랜드는 개성(personality)이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개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간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로 브랜드와 소비자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다.
최근 기업들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최고경영자(CEO)들이 소비자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다.
최근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활성화되면서 기업의 일반적 커뮤니케이션 창구인 PR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CEO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업의 공식 SNS가 아닌 CEO들의 개인 계정을 통해 소비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함으로써 공식적인 기업 이미지보다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컬래버레이션 또한 브랜드의 ‘개성’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단순한 브랜드 라이선스가 아니라 강한 개성을 보유하고 있는 예술가나 대중문화 아이콘 등과 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방식으로 실제 제품의 제작 프로세스에 장인의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소비자들과의 끈끈한 감정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까.
첫째, 감정적 연대를 강화하는 활동은 일관된 방향으로 꾸준히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들이 실행하는 마케팅 및 프로모션 활동들은 대부분이 단기적인 관점으로 진행되며 프로그램 자체를 계획하고 실시하는 데 의미를 둘 때가 많다.
이러한 활동은 기업의 단기적 매출을 올리거나 해당 브랜드를 일시적으로 이슈화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비자들과 감정적 연대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끌어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방적인 홍보는 화를 부른다
둘째, 일방적 홍보는 화를 부른다. 오늘날 수많은 마케팅 메시지에 노출돼 있는 소비자들은 기업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기업들이 소비자와의 정서적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홍보하면 오히려 정서적인 연대가 약화되는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다. 기업은 말로 과도한 약속을 제시하는 것보다 정서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셋째, 공유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 감정적인 연대를 확보하기 위한 기업의 활동이 기업의 입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려면 해당 활동을 접한 소비자가 지인들과 그것을 공유할 이유나 명분이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과 정서적 연대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기업의 활동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싫증을 느끼거나 흥미를 잃지 않도록 큰 방향 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되 계속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자들이 이미 한 번 공유했던 내용을 또다시 공유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전통적인 마케팅 기법이나 이론들을 살펴보면 고객들이 느끼는 감성적인 부분이 결여된 것이 많고 이는 감성적인 부분을 측정해 정량화하거나 지표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브랜드를 접하고 끊임없는 마케팅 메시지에 지쳐 있는 오늘의 소비자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설명보다 감성적인 행동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모든 브랜드가 애플처럼 광적인 에반젤리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로 소비자 간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돼 있는 오늘,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대변해 줄 수 있는 ‘우리 편’은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소비자들과의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연대를 강화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허지성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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