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는 왜 난정에서 연회를 열었을까?

[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난정연회(蘭亭宴會)’ 출간]
{불세출의 서예 작품 '난정서(蘭亭序)'를 해부하다!}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 왕희지(王羲之)는 왜 난정(蘭亭)에서 연회를 열었을까.

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 교수)은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서예 대가와의 만남을 계기로 동양 최고의 행서(천하제일행서)라고 불리는 서예작품 ‘난정서(蘭亭序)’ 연구에 빠져들었다.

중국 소흥에 있는 ‘난정연회’ 현장을 직접 답사한 끝에 10년여에 걸친 탐구결과를 책으로 엮어냈다.

서기 353년 음력 3월 3일, 왕희지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대의 명사 41명을 ‘난정’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

‘난정연회(蘭亭宴會)’ 또는 ‘난정집회(蘭亭集會)’라고 불리는 이날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술 세 말의 ‘벌주’를 마시게 하는 ‘유상곡수(流觴曲水)’ 형식의 연회였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귀족들의 ‘포석정(鮑石亭) 연회’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 '난정서'의 여러 판본 가운데 '신룡본'(중국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한길사 제공

◆‘난정집’의 서문인 ‘난정서’의 필자는 왕희지

난정연회에 참석한 당대의 명사들이 각각 시를 짓고, 그 시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난정집’이다. 이 책의 서문인 ‘난정서’는 왕희지가 쓴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중요한 ‘난정서’인데도 서예가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된 일이 많지 않았다”며 “서체의 아름다움과 서예사적 위치, 왕희지의 명성, 이 연회가 열리게 된 배경과 당시 상황 등을 이해해야 ‘난정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당시 배경은 어땠을까. 중국은 늘 황제의 나라였는데, 유일하게 이런 정치구도에서 벗어난 때가 바로 남북조시대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귀족들은 지금의 난징에 동진(東晉)을 세웠다.

황권이 약화되고 북쪽의 옛 땅을 찾는 자가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약화된 황권은 역설적으로 찬란한 귀족문화를 불러왔다.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귀족들은 경치가 좋은 ‘회계(會稽$지금의 소흥 지방)’에 별장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모임이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이 책은 ‘난정서’를 다각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하연지(何延之)의 , 진서(晉書) 등 여러 관련 문헌을 두루 살피며 왕희지와 주변 인물들의 생애와 인간상을 그려냈다.

아울러 ‘난정서’의 여러 판본도 비교했다. 풍승소의 ‘신룡본(神龍本)’, 구양순의 ‘정무난정서(定武蘭亭序)’, 우세남의 ‘장금계노본(張金界奴本)’, 저수량의 ‘임본(臨本)’ 등이다. ‘난정서’의 진위 논란과 관련하여 추사 김정희의 ‘계첩고('帖攷)’까지 살폈다. (한길사, 신국판 328쪽, 3만원)

손희식 기자 hssoh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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