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공자도 ‘권위’보다 ‘공감’을 중시…공감 잃은 사회는 미래 없어
(일러스트 김호식)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여러 해 전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는 적자에 허덕이는 지하철공사가 노인들에게 무임승차 혜택을 주는 것을 비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김 총리는 새는 돈을 아껴 없는 사람들에게 더 혜택을 주자는 취지에서 말한 것이지 무임승차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 나라의 총리가 기본적 공감 능력조차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시각에서 국정을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 공감 능력과 입체적 사고
세월호 비극이 일어난 지 벌써 두 해 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사태의 본질은 미궁인 상태고 선체는 아직도 수중에 있으며 물에서 건져내지 못한 시신은 차가운 바다에 잠겨 있다.
사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는 온갖 훼방과 왜곡으로 만신창이가 됐고 증인들은 출석을 거부하고 권력의 뒤에 숨어 있다. 심지어 이 문제를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하는 이도 있고 그것 때문에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며 비난하는 이도 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됐을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아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지난 정부에는 아예 없었고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건 기업 프렌들리도 아니고 양아치들이나 할 짓이다.
자국민의 고귀한 목숨이 어이없이 스러졌는데도 오불관언이라면 그게 어찌 정부와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지만 여당 의원들의 방해로 무산됐다.
그러다가 지난 4월 총선으로 여소야대가 되니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사람들은 마치 처음 알았다는 듯이 분노했고 불매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해당 회사는 사죄와 배상은커녕 오히려 ‘1+1’ 행사를 내세웠다.
이런 모욕이 없다. “니들이 아무리 분노해도 불매운동을 해도 너희들 앞에 돈만 흔들면 그 앞에 금세 무너질 걸!” 그런 뜻이다.
하지만 이런 모욕에도 정부는 남의 일이고 시민들도 금세 잊고 만다. 그러니 악덕 기업은 여전히 독버섯처럼 자란다. 그런 기업을 내버려 두는 것은 건전한 기업의 환경마저 망가뜨린다는 최소한의 양식조차 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값을 호되게 치르게 된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야금야금 붕괴되고 있다. 온갖 부적격자들이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고 청문회를 통해 도저히 인사 대상이 될 수 없는 자들의 패악이 드러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혹은 일부러 보란 듯이 임명한다. 국민들의 박탈감과 분노쯤은 남의 일이다.
그러면서 무조건 자신의 뜻을 따르라거나 자기는 절대선이라는 착각으로 농단한다. 신뢰는 사라지고 냉소와 체념만 증가한다. 정치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탈감과 분노를 넘어 체념을 학습하는 것은 머지않아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져 아무런 반성도 성찰도 없다.
공감 능력이 없는 지도자는 자격이 없다. 공감 능력이 없는 강자와 부자는 개인적으로 그걸 누려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누군가를 지도하려거나 명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자에게서 권위만 읽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을 강조했지만 공자는 공감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행위에서도 앎이 먼저라고 했지만 공자는 안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라며 삶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공자의 공감 능력은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네와 안회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자공이 답했다. “저를 어떻게 감히 안회와 견주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 정도 압니다.”
그런데 공자의 답이 뜻밖이다. “그래 못하다고…. 자네와 나 둘 다 그 친구보다 못하지.” 제자인 안회를 높이 평가하는 공자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더 주목할 것은 자공에 대한 배려다.
공자도 자공이 안회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동료가 더 뛰어남을 고백해야 하는 자공의 입장을 헤아렸다. 그래서 자신도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제자의 위축감을 공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게 공자의 진면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자의 권위에만 의존한다. ‘논어’를 다시 읽어야겠다. 더 늦기 전에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게 사라지면 우리의 사회는 한순간에 붕괴된다는 점을 두려워해야 한다.
거죽만 보면 본질도 실체도 읽어내지 못한다.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공감을 회복한다. 그게 미래를 밝히는 불빛이다.
공자도 ‘권위’보다 ‘공감’을 중시…공감 잃은 사회는 미래 없어
(일러스트 김호식)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여러 해 전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는 적자에 허덕이는 지하철공사가 노인들에게 무임승차 혜택을 주는 것을 비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김 총리는 새는 돈을 아껴 없는 사람들에게 더 혜택을 주자는 취지에서 말한 것이지 무임승차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 나라의 총리가 기본적 공감 능력조차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시각에서 국정을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 공감 능력과 입체적 사고
세월호 비극이 일어난 지 벌써 두 해 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사태의 본질은 미궁인 상태고 선체는 아직도 수중에 있으며 물에서 건져내지 못한 시신은 차가운 바다에 잠겨 있다.
사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는 온갖 훼방과 왜곡으로 만신창이가 됐고 증인들은 출석을 거부하고 권력의 뒤에 숨어 있다. 심지어 이 문제를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하는 이도 있고 그것 때문에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며 비난하는 이도 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됐을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아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지난 정부에는 아예 없었고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건 기업 프렌들리도 아니고 양아치들이나 할 짓이다.
자국민의 고귀한 목숨이 어이없이 스러졌는데도 오불관언이라면 그게 어찌 정부와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지만 여당 의원들의 방해로 무산됐다.
그러다가 지난 4월 총선으로 여소야대가 되니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사람들은 마치 처음 알았다는 듯이 분노했고 불매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해당 회사는 사죄와 배상은커녕 오히려 ‘1+1’ 행사를 내세웠다.
이런 모욕이 없다. “니들이 아무리 분노해도 불매운동을 해도 너희들 앞에 돈만 흔들면 그 앞에 금세 무너질 걸!” 그런 뜻이다.
하지만 이런 모욕에도 정부는 남의 일이고 시민들도 금세 잊고 만다. 그러니 악덕 기업은 여전히 독버섯처럼 자란다. 그런 기업을 내버려 두는 것은 건전한 기업의 환경마저 망가뜨린다는 최소한의 양식조차 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값을 호되게 치르게 된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야금야금 붕괴되고 있다. 온갖 부적격자들이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고 청문회를 통해 도저히 인사 대상이 될 수 없는 자들의 패악이 드러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혹은 일부러 보란 듯이 임명한다. 국민들의 박탈감과 분노쯤은 남의 일이다.
그러면서 무조건 자신의 뜻을 따르라거나 자기는 절대선이라는 착각으로 농단한다. 신뢰는 사라지고 냉소와 체념만 증가한다. 정치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탈감과 분노를 넘어 체념을 학습하는 것은 머지않아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져 아무런 반성도 성찰도 없다.
공감 능력이 없는 지도자는 자격이 없다. 공감 능력이 없는 강자와 부자는 개인적으로 그걸 누려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누군가를 지도하려거나 명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자에게서 권위만 읽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을 강조했지만 공자는 공감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행위에서도 앎이 먼저라고 했지만 공자는 안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라며 삶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공자의 공감 능력은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네와 안회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자공이 답했다. “저를 어떻게 감히 안회와 견주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 정도 압니다.”
그런데 공자의 답이 뜻밖이다. “그래 못하다고…. 자네와 나 둘 다 그 친구보다 못하지.” 제자인 안회를 높이 평가하는 공자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더 주목할 것은 자공에 대한 배려다.
공자도 자공이 안회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동료가 더 뛰어남을 고백해야 하는 자공의 입장을 헤아렸다. 그래서 자신도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제자의 위축감을 공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게 공자의 진면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자의 권위에만 의존한다. ‘논어’를 다시 읽어야겠다. 더 늦기 전에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게 사라지면 우리의 사회는 한순간에 붕괴된다는 점을 두려워해야 한다.
거죽만 보면 본질도 실체도 읽어내지 못한다.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공감을 회복한다. 그게 미래를 밝히는 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