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 정국’에 손발 묶인 기업들…투자계획·전략수립 엄두조차 못 내

[커버스토리 = '국정농단'에 비상 걸린 경제 성장엔진 : 속 타는 기업들]
국정 농단에 트럼프 변수까지…국정·사라진 경제정책 어젠다


(사진)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강남 테헤란로. /연합뉴스

재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과 최순실 게이트라는 내우외환에 휩싸였다.

당장 트럼프발(發) 전략 수립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재계 총수들은 검찰 조사에 끌려 나가고 일부 기업들은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여기에 내년 경제정책의 어젠다를 제시해 줘야 하는 정부마저 최순실 사태로 손을 놓고 있는 처지여서 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재계의 한 임원은 “국내외 정치·경제의 불확실성이 깊어지면서 내년 투자 계획이나 사업 목표치를 아직 세우지 못했다”며 “일단 최순실 사태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돼야 뭐라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최순실 폭탄’ 맞은 기업들

실제로 기업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촉발된 기업 사정 정국에 몸살을 앓고 있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은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각종 의혹에 휩싸이면서 2008년 삼성 특검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삼성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까지 검찰 압수 수색을 받은 데다 총 7조원 정도의 손실을 낸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7 쇼크를 극복하기 위해 전사적 역량이 투입되고 있는 시점에서 터진 최 씨 국정 농단 사건의 파문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 10월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 등기이사 선임 이후 3세 경영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던 삼성의 계획도 차질을 빚고 있다.

K스포츠재단의 추가 지원에 응했던 롯데그룹도 비슷한 처지다. 형제 간 경영권 분쟁과 강도 높은 검찰 수사를 이제 막 마친 롯데그룹은 대대적인 쇄신 작업에 나서야 하는데,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금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현대차그룹 역시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차은택 씨에게 현대차그룹의 광고를 줬다는 특혜 의혹이 제기돼 관련된 수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SK도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원 회장과 올 2월 독대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최 회장이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민원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CJ는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 압박 의혹이 불거지며 최순실 게이트의 최대 피해 기업으로 거론된다. CJ그룹 관계자는 “당초 정권의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다가 이제는 오너의 퇴진 압력까지 받았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그룹 직원들의 사기가 현저히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포스코와 KT도 최순실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차은택 씨 관련 광고사 강탈 의혹 및 인사 청탁, 광고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다. 이 때문에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황창규 KT 회장은 당초 연임이 확실하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이마저 불투명해졌다.

◆ 내년 사업·투자 계획 어쩌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 내년 투자 계획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 수립은 고사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경제정책에 대한 대응 방안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은 글로벌 무대에서 치르고 있는 애플과의 스마트폰 경쟁을 비롯해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중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기업 등과의 경쟁을 위해 대규모 투자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잡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열사 사업 재편과 신규 먹거리인 바이오 사업에 대한 사업 비전 수립도 정체 상태다. 삼성 측은 일단 최순실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할 방침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전체 자동차 시장 수요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내년 완성차 판매 목표치를 높여 잡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아차는 창사 이후 처음으로 올해 연간 판매 목표치를 813만 대로 낮춰 잡았는데 이마저 달성이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대선 이후 보호무역 강화 움직임이 예상되는 것도 수출이 주력인 현대·기아차에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특히 멕시코 현지에 생산 공장을 둔 기아차는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가 현실화되면 멕시코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완성차의 미국 시장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판매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LG그룹은 대규모 적자를 기록 중인 스마트폰 사업과 신성장 동력으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자동차 부품 사업에 초점을 맞춰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있지만 최근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미르재단 기금과 관련된 검찰 소환 조사를 받으며 다소 위축된 모습이다.

SK그룹은 80개 계열사가 사업 계획을 작성하는 와중에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변수가 생겼다. 최태원 회장은 최근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관계사별 혁신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등 대변혁을 예고했다.

차완용 기자 cw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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