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가 이 땅의 캥거루족에 던지는 경고

[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성인식 코드'…“자신을 죽여야 완전히 거듭난다”

(사진)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의 한 장면.

[한경비즈니스=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마테오 가르네 감독의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는 동화가 원작이다. 16세기 이탈리아 작가 잠바티스타 바실레가 나폴리 지방에 있던 동화들을 채록해 엮은 동화집 ‘펜타메로네’에서 3개를 골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었다.

현대인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서인지 채록 당시 동화의 원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란다. 물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는 교육적 목표를 갖고 만드는 디즈니 영화에 존·비속 살해, 근친상간, 식인 풍습 등의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도 청소년 관람 불가의 19금 잔혹 동화다. 어떤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가 주인공들의 ‘욕망’을 다룬 영화라고 분석한다.

자식을 가지고 싶은 욕망에 남편까지 죽게 만드는 A국의 왕비, 멋진 남자와 만나 결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B국의 공주, 젊어지고 싶은 욕망에 자신의 피부까지도 벗겨달라고 요구하다가 죽음을 맞는 C국의 노파가 그들이다.

욕망 코드로 볼 수 있지만 심층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내용이 또 달라진다. 일례로 A국의 셀바스쿠라 왕비(샐마 헤이엑 분)는 자식을 갖고 싶은 엄청난 욕망에 사로잡힌 여인이다. 마법사가 이 틈새를 파고든다. “바다 괴물의 심장을 갖고 와 처녀가 요리한 것을 왕비마마께서 드시면 즉시 새 생명을 잉태할 것입니다.”

◆‘아이의 성인식’ 다룬 영화

왕은 바다로 가서 괴물을 죽여 심장을 구하지만 그 자신도 결투 과정에서 입은 치명상으로 죽고 만다. 왕과 왕비의 결합이 아니라 괴물의 심장과 왕비 사이에서 왕자 엘리아스(크리스찬 리스 분)가 태어난다. 처녀 요리사도 심장을 요리하다가 심장에서 나오는 증기를 쐬고 조나(조나 리스 분)를 낳는다. 민담에 신화적 요소인 영웅의 출생 신화가 섞인 셈이다.

자식을 자기 품 안에서만 키우고 싶어도 아이는 언젠가는 엄마 품을 떠나야 한다. 세월이 흘러 16세가 된 왕자. 왕비인 엄마와 다정하게 미로 찾기 놀이를 하던 왕자는(미로는 대개 무의식을 상징한다) 미로 속에 엄마를 남겨두고 조나와 함께 바다로 가서 유영(遊泳)을 즐긴다. 마치 아버지 바다 괴물의 고향을 찾아 나선 아들처럼 말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여인의 욕망이 아니라 아이의 성인식을 다룬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복선이다.

괴물의 사생아로 태어나 ‘아비 없는 자’로 자라난 엘리아스와 조나가 자신들이 살던 왕궁과 집을 떠나는 장면은 고구려 유리왕과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를 연상시킨다. 부자 관계를 증명할 신표(信標)인 칼 조각을 들고 아버지 주몽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유리 왕자.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남겨둔 신표인 칼과 구두를 들고 길고긴 모험을 떠나는 테세우스.
엘리아스나 유리 왕자나 테세우스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이야기한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아이의 아버지 찾기’다. 좀 더 확대하면 ‘아이의 성인식’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비교종교학자 마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처럼 성인식은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재생(regeneration)’의 의식이다. 자궁에서 엄마와 탯줄로 연결돼 일심동체였던 어린 시절로부터의 단절에서 독립은 시작된다.

엘리아스는 동굴(엄마의 자궁을 상징) 안에서 괴물로 변한 엄마 왕비를 자신의 분신인 조나와 함께 혈투 끝에 찔러 죽인다. 감독이 원작과 달리 쌍둥이 이름을 구약에서 고래 뱃속에 삼켜졌다가 나와 재생을 경험하는 그 요나와 동일한 조나로 정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사진) 영화 ‘테일 오브 테일즈’의 포스터.

◆심리적 탯줄, 직접 잘라야

이것은 엄마 품에서 심신 양면으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다. 엘리아스가 죽인 것은 자신의 엄마가 아니다. 자립하지 못한 어린이인 엘리아스 자신이다. 엄마와 자신을 든든하게 연결해 주던 육체적 탯줄을 자른 이가 제삼자였다면 심리적 탯줄은 엘리아스 자신이 직접 잘라야 하는 것이다.

초중고 시절은 물론 취업하고 결혼한 이후에도 아들을 감싸고돌며 마마보이를 양산하는 엄마들이나 그런 엄마의 품속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캥거루족의 기묘한 조합은 개인적인 정신병리이자 사회병리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것이 감독과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성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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