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에너지 시장, 길 잃은 투자자

[화제의 리포트]
‘가격 전망’은 사실상 불가능…확실한 것 하나는 ‘작년보다는 오른다’



[정리=김병화 한경비즈니스 기자]이번 주 화제의 리포트는 한영수·심혜진·윤석모·백재승·양지혜 삼성증권 애널리스트가 펴낸 ‘에너지 시장 점검’으로 정했다.

한영수 애널리스트는 “급격한 에너지 시장 변화를 감안하면 장기 투자자에게 에너지 가격(유가) 전망에 기반 한 투자 전략은 위험부담이 존재한다”며 “이러한 시장 상황 속에서 투자 전략은 가격에 대한 전망을 최소화하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실만을 근거로 수립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전망했다.

2014년부터 시작된 국제 유가 급락은 에너지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는 단순히 시장이 장기간 지속된 고유가 현상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가 급락의 원인이 수요가 아닌 공급 측면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공급과잉에 따른 유가 하락은 1985년 이후 최초의 현상이었다.

2014년 6월 이후 국제 유가 하락은 미국 중심의 비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산유량 증가와 OPEC의 전략 변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셰일 혁명에 따른 미국의 증산으로 국제 유가가 하락세에 접어들자 시장은 OPEC의 감산과 이를 통한 유가 안정을 기대했다. 통상 OPEC는 국제 석유 시장의 가격 조정자로 기능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OPEC는 생산비용이 높은 비OPEC의 감산을 유도하기 위해 기존의 생산량 조절을 통한 유가 방어 정책에서 시장점유율 우선 정책으로 전략을 변경하며 국제 유가의 급락을 야기했다.

◆OPEC와 비OPEC의 ‘치킨 게임’

OPEC는 이를 통해 저유가 환경에서 비OPEC의 산유량 감축을 기대했다. 하지만 비OPEC 역시 생산량을 늘렸다. 미국은 비용 절감과 기술 개발을 통한 효율성 증대로 견고한 수준의 원유 생산을 이어 나갔다.

러시아 또한 구소련 이후 최대치까지 원유 생산을 늘림으로써 국제 석유 시장의 공급과잉이 심화됐다. OPEC와 비OPEC가 모두 생산량을 늘리면서 국제 유가는 2016년 2월 배럴당 26달러까지 하락했다.

생산량 증가에 따른 유가 급락이 모두에게 같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에너지 생산자’에게는 치명적인 실적 훼손을 야기했지만 ‘에너지 중간 가공자(정유·화학 업체)’들은 원유 가격이 석유화학제품 가격보다 빠르게 하락하면서 기록적인 수익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최종 에너지 소비자’들 역시 제품 가격 하락의 수혜를 누리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급락하면 가장 주목할 만한 대상은 정유 및 화학 업체들이다. 이들은 원유를 이용해 석유화학제품을 만드는 일종의 중간 가공업자들이다.

이들에게 원유는 생산에 필요한 원재료이면서 동시에 제품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오랜 기간 이들이 판매하는 석유화학제품 가격이 원유 가격에 동행해 결정됐기 때문이다.

유가 급락은 이들에게 석유화학제품 평균판매단가(ASP) 하락과 보유 중인 원재료 재고에 대한 평가 손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모두 감안하면 이론적으로 유가 급락의 최대 수혜자는 이들이 아니라 유류 및 관련 제품을 직접 소비하는 개별 기업과 개인 소비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실제 유가 급락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는 정유사와 화학회사에 돌아갔다. 이는 에너지 시장의 협상력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저유가는 에너지 시장이 판매자 시장(seller’s market)에서 구매자 시장(buyer’s market)으로 전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직관적으로 최대 수혜는 최종 유류 소비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에너지를 최종 소비하는 주체들은 너무나 다양한 주체들이자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른 존재들이다. 즉, 이들은 이익 집단화가 불가능한 주체들인 것이다.

또한 원재료 가격 인하 효과 역시 오히려 하류 부문(downstream)으로 갈수록 희석돼 갔다. 하류 부문으로 갈수록 원유 외 가격 결정 요인들이 다양해진다. 일례로 원유의 최종 소비자인 개인은 큰 규모의 세금 때문에 수혜를 충분히 누릴 수 없다.

또 유가 급락으로 석유 정제 및 화학 설비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면서 기존 정유 및 화학 업체들의 원유 생산자(산유국과 E&P 업체)에 대한 협상력이 더욱 강화됐다.

실제로 유가 급락 이전에 대규모 정유·화학 설비 증설을 기획하고 있던 지역은 중동의 산유국이었다.

여기에 개별 에너지 소비자들이 대부분 가격 수용자(price taker)적인 성격을 보인다는 점도 이들에게 유리한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석유화학제품 가격을 원유 가격 급락만큼 인하하지 않으면서 큰 마진을 낼 수 있었다.

석유화학제품 가격 하락에 따른 수요 증가 효과와 함께 석유제품보다 급격한 원재료(원유) 가격 하락으로 이들은 2015~2016년 호황기 수준의 수익성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유가 변동성은 점차 축소되는 중

유가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유가 상승세의 둔화를 주장하는 측은 산유국의 감산에 따른 잉여 생산능력, 미국의 원유 생산 증가 가능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유가 상승에 대한 더 공격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측은 석유 수출에 재정을 의존하는 산유국들의 부양 의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재정의 석유 의존도는 77%, 수출의 석유 의존도는 80%에 달하며 기타 OPEC 회원국들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은 저유가 상황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다했음에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재정수지 및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현재로서는 유가에 대한 공격적인 의견과 보수적인 의견이 모두 나름의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 지난 3년간 에너지 가격이 보여준 급진적인 가격 변동을 감안하면 에너지 가격 전망에 근거한 투자 전략은 장기 투자자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유가의 방향성에 대한 가정을 최소화하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실(fact)’에 입각해 수립된 투자 전략이 이상적일 것이다.

현재 에너지 시장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유가의 변동성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시장 참가자 대부분이 국제 유가가 전년 대비 상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kb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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