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만 봐도 ‘아~그 회사’, 서체 개발 열풍

[라이프스타일]
현대카드 ‘유앤아이체’가 스타트…모바일 시대의 핵심 마케팅 툴로


(사진)현대카드 '유앤아이체' / 현대카드 제공.

[한경비즈니스=김영은 인턴기자] ‘MADONNA.’ 2014년 겨울, 일곱 글자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달궜다.

사진이나 설명도 없이 흰 배경에 ‘MADONNA’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과 포스터를 보고 사람들은 이 메시지가 현대카드가 주최하는 슈퍼 콘서트의 주인공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눈치챘다.

‘현대카드’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현대카드 고유 서체인 ‘유앤아이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자사가 쓰는 서체를 직접 개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체 개발은 기업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기업 이미지(CI) 활동의 일환이다.

CI 활동은 단지 기업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업의 마케팅 활동, 나아가 기업의 경영 활동 개선 작업에까지 활용된다.

이 중 서체 개발은 특히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각광 받고 있다. 고객들의 모바일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작은 화면 속에서 자사의 정체성을 부각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체만한 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 중 가장 먼저 기업 서체를 개발한 곳은 현대카드다. 2004년 현대카드가 만든 ‘유앤아이’ 서체는 신용카드 모양을 형상화했다. 글자에 신용카드의 물리적인 형태와 각도, 카드의 가로 세로 비율인 1.6 대 1을 적용하고 카드의 얇고 둥근 모서리를 반영했다.

카드사의 DNA를 글꼴에 심어 고객은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현대카드의 서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서체에 ‘B급 문화’ 녹인 배달의민족

(사진) 배달의민족 서체 포스터(왼쪽)와 서체를 활용한 배민문방구 제품. / 배달의민족 제공.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도 직접 서체를 개발해 쓰고 있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서비스인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서체에 기업 고유문화를 담았다.

배달 앱의 주요 고객층은 젊은 세대다. 배민은 확실한 주 고객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른바 ‘B급’, ‘키치’, ‘병맛’이라는 2030세대의 트렌드를 브랜드 콘셉트로 삼았다.

이 정서를 서체에 담기 위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서체가 아니라 1970~1980년대 아크릴 판에 삐뚤빼뚤하게 쓴 간판을 모티브로 해 배민만의 서체가 탄생했다.

2012년 개발된 ‘한나체’를 시작으로 ‘주아체’와 ‘도현체’ 등 총 네 개의 서체가 무료로 배포됐고 올해 또 다른 서체를 공개할 예정이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가 디자이너 출신인 것도 배민이 서체를 개발하고 무료로 배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김 대표는 “디자이너로 일하며 모두가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서체를 만들고 싶었다”며 “배달의민족 서체는 모두를 위한 서체이자 브랜드를 알리는 데 일조한 주요 자산”이라고 말했다.

배민에서 서체를 무료로 배포하자 서체를 이용한 콘텐츠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MBC 쇼 프로그램인 ‘무한도전’과 같은 공중파 예능 자막에도 나왔고 온라인에서는 ‘카드뉴스’ 등의 콘텐츠로 만들어져 SNS에 확산됐다.

옷 가게나 음식점 등 상점의 간판에도 사용됐고 대학생 과제나 기업의 프레젠테이션에서도 배민의 서체가 유용하게 쓰였다.

서체를 이용한 콘텐츠가 미디어와 오프라인에서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체에 담긴 배민의 브랜드 정체성도 이용자에게 각인되는 효과를 얻었다.


(사진) 배달의민족이 디자이너 계한희와 손잡고 만든 브랜드 '배민의류'는 서체를 활용한 디자인으로 2016 S/S 서울패션위크에서 주목받았다. / 배달의민족 제공.

배민은 독특한 서체를 활용해 상품생산에도 나섰다. 예컨대 ‘이런십육기가’ USB, ‘다 때가 있다’ 때수건 등 배민 특유의 B급 정서와 언어의 중의성을 이용한 제품들을 ‘배민문방구’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큰 수익성이 있는 사업은 아니지만 독특한 브랜드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평이다.

배민 관계자는 “독특하고 예쁘고 우수한 서체가 있으면 사람들이 ‘저거 배달의민족 글씨체 아닌가?’ 보고 딱 떠올릴 수 있다”며 “서체는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1만1172자 만들어 낸 네이버


(사진) 잉크를 절약하기 위해 글자에 구멍을 뚫어 만든 네이버 '나눔에코'체/ 네이버 제공.

한글 문화 확산이라는 대외 공헌적인 의도를 담아 서체를 개발한 기업도 있다. 네이버는 외래어가 빈번히 사용되는 현대사회에서 한글로 된 생각과 정보가 많아지기를 바라며 2008년부터 ‘한글한글아름답게’를 진행해 왔다.

이 프로젝트에는 ‘한글 시 공모전’, 소상공인을 위한 ‘한글 간판 나누기’, 한글 박물관 지원 등 공익적인 캠페인이 포함돼 있다. 서체개발도 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한글에 대한 관심을 디자인적으로 새롭게 표현한 것이 바로 서체다.

이 회사의 서체인 ‘나눔글꼴’은 한글의 우수한 조형성에 초점을 맞춰 개발됐다. 네이버 관계자는 “수많은 정보를 유통하는 플랫폼으로서 모두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서체를 보급해 한글 사용 환경을 개선하자는 목표가 있었다”고 전했다.

사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용 환경을 더 좋게 만드는 것 역시 서비스 회사로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사진) 네이버 '나눔손글씨'체 / 네이버 제공.

보통 서체 작업을 하는 데는 한글 2350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네이버는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한글 표현을 자사 서체로 할 수 있도록 1만1172자를 만들었다. 서체 제작 과정은 쉽지 않다.

네이버는 사용자가 원하는 것과 네이버가 지향하는 방향, 업계의 트렌드를 분석한다. 이후 폰트 전문 제작 업체를 공개 입찰을 통해 선정하고 네이버의 방향성을 잘 반영한 업체를 뽑는다.

실제 제작 과정에서도 최소 3~5번 이상의 시안 조율 과정을 거쳐 서체의 기본 디자인을 완성하고 그 이후 모든 자소에 대한 파생 작업과 검수를 통해 수정을 진행한다.

이처럼 서체 개발은 많은 비용과 시간, 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업들이 서체를 개발해 이용자에게 무료 배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에선 서체 개발이 당장의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지만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고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나눔 글꼴은 생활에 밀접한 곳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며 공익적인 측면에서 시작됐지만 네이버의 핵심 가치를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어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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