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시장 700조 전쟁…2월 24일 ‘증여신탁 절세 혜택’ 축소 앞두고 불티
입력 2017-02-14 17:18:56
수정 2017-02-14 17:18:56
[커버스토리 = 신탁시장 700조 전쟁 : 불어나는 신탁시장]
신탁업법 제정까지…날개 단 ‘신탁시장’
정부, 진입규제 완화·상품 다양화로 ‘판 키운다’…‘투자자 보호 먼저’ 목소리도
신탁시장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2015년 이후 국내 신탁 수탁액은 해마다 100조원씩 불어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130조원이 넘는 자산가들의 뭉칫돈이 신탁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신탁업법 개정은 이제 막 불씨가 붙기 시작한 신탁시장의 ‘확실한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보험금청구권, 부채 등 보다 다양한 재산을 관리하는 게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로펌·의료법인 등에도 새롭게 문이 열린다. 지금까지 ‘금융업’의 테두리에 묶여 있던 신탁시장의 한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저금리 고령화 시대에 ‘부의 이전 수단’이자 ‘종합적인 자산 관리’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국내 신탁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짚어봤다.
취재 이정흔·김서윤·정채희 기자 I 사진 서범세·김기남·이승재 기자
◆ '도깨비' 지은탁에게 '보험신탁'이 있었다면...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얼마 전 막을 내린 tvN의 인기 드라마 ‘도깨비’의 여주인공인 지은탁(김고은 분)은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사고무탁 혈혈단신(의지할 곳 없이 홀로)’ 힘겹게 삶을 이어 가는 인물이다.
이모가 한 명 있지만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은탁의 엄마가 남겨 놓은 보험금을 노리고 지은탁을 볼 때마다 “보험금 통장을 내놓으라”며 고래고래 윽박을 질러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이야기를 바꿔보면 어떨까. 만약 지은탁의 엄마가 거액의 보험금을 남기며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해보자.
어린 딸이 25세가 될 때까지 제삼자가 보험금을 관리하며 수익을 내고 그중 매달 200만원을 생활비로 딸에게 지급하도록 한다. 그 이후 딸이 25세가 되면 남은 보험금 원금을 모두 건네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보험금 처리를 믿을 만한 곳에 ‘신탁’하는 것이다.
보험금의 소유가 일시적으로 제삼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지은탁의 이모처럼 검은 속내를 지닌 주변인들로부터 자산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직 자산 관리 능력이 없는 지은탁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전문가들이 자산을 운용하며 안정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올바른 신탁 활용의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서는 아직 이와 같은 사례처럼 보험금 등을 신탁에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곧 가능해질 전망이다. 저금리·고령화 시대를 맞아 신탁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금융 당국 또한 2017년 5대 중점 금융 개혁 과제로 ‘신탁업 활성화’를 들고나왔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12일 금융 개혁 주요 추진 과제 중 첫째로 ‘신탁업 제도 전면 개편’을 발표했다. 신탁 상품을 보다 다양화하고 신탁업에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을 촉진하는 것이 골자다.
◆ ISA·퇴직연금도 기본적으론 ‘신탁 상품’
국내 신탁법에 따르면 ‘신탁’은 맡기는 사람(위탁자)의 다양한 재산이나 수익을 일정한 자(수익자)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운용·관리·보관하는 재산 관리 기구(수탁자)와 간단하게 말해 ‘내 재산이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한데, 현재 국내에서는 이 역할을 은행·증권·부동산 신탁회사와 같은 금융회사들이 맡고 있다.
다만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고 맡긴다’는 의미를 조금 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내 신탁법상 신탁은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일대일 계약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수탁자가 철저하게 ‘위탁자의 필요와 목적에 맞춰’ 자산을 관리·운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탁 상품은 크게 금전 자산을 관리하는 금전신탁과 부동산 등의 자산을 관리하는 재산신탁,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재산신탁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현재 고객이 맡긴 돈을 고객이 지정한 운용 방법에 따라 주식·채권·간접투자상품 등에 투자해 수익을 돌려주는 ‘특정금전신탁’, 위탁자가 맡긴 토지 등의 부동산 자산을 관리·개발한 뒤 발생한 수익을 돌려주는 ‘부동산신탁’, 위탁자가 금융회사에 자산을 맡기고 운용 수익을 받다가 사망 이후 미리 계약한 대로 자산을 상속·배분하는 ‘유언대용신탁’, 청년들에게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부금을 활용한 공익 신탁인 ‘청년희망펀드’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가장 가깝게는 ‘만능통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신탁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와 연금저축신탁·퇴직연금 등도 모두 신탁을 기반으로 한 금융 상품이다.
자료=금융투자협회
◆ 신탁시장 규모 5년 새 두 배 커져
최근 국내에서 신탁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데는 몇 가지 키워드가 맞물려 있다. ‘1인 가구’의 증가와 ‘고령화’ 추세 그리고 ‘저금리’에 따른 자산 운용의 어려움이다.
신탁은 금융자산뿐만 아니라 부동산 자산과 지식재산권 등 다양한 자산을 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광범위하고 유동적이다. 고객의 요구 조건에 따라 장기적이고 포괄적으로 자산을 관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장점이 부각되면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을 중심으로 ‘노후 자산 관리 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는 것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3년 11월 500조원 규모이던 전체 신탁 상품의 수탁액 규모(금전·재산·종합재산 포함)는 2016년 11월을 기준으로 739조원대에 이르고 있다. 3년 사이에 수탁액이 32% 정도 증가한 셈이다.
은행과 증권사들이 주로 판매하는 금전신탁과 부동산 신탁회사에서 취급하는 부동산신탁을 중심으로 한 재산신탁이 골고루 증가세를 보였다. 그중 특히 금전신탁은 2011년 157조원 규모이던 것과 비교하면 2016년 380조원 규모로 5년 새 그 규모가 2배 이상 커진 셈이다.
특히 최근 2~3년간 초고액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증여신탁’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 가파른 성장세에 한몫했다. ‘증여신탁’은 부모가 맡긴 자산을 국공채 등에 투자해 굴리면서 주로 10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원금과 투자 수익을 자녀·손자녀에게 나눠 지급하는 상품이다.
2016년 초까지만 해도 전체 시장 규모가 100억원에 못 미쳤던 증여신탁은 ‘증여세의 절세 수단’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지난 한 해 동안에만 5000억원이 넘는 신규 자금이 유입될 만큼 강남 지역의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한 은행권의 관계자는 “최근 몇년간 세법 개정 이슈가 불거지면서 상속·증여신탁에 대한 자산가들의 관심이 유독 뜨거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최근 증여신탁의 절세 혜택을 10%에서 3%로 축소하는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오는 2월 24일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강남의 프라이빗 뱅커(PB)들을 중심으로 단골 자산가들에게 상품 가입을 서두르라고 조언하는 분위기다.
이창동 KB국민은행 신탁사업부장은 “세제 혜택이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야가 상속·증여신탁”이라며 “초고액 자산가들의 ‘부의 이전 수단’으로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신탁 상품의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신탁법 제정, 뭐가 달라지나
점점 달아오르는 신탁시장은 올해 10월 이후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탁업법’ 제정안의 정기국회 제출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실무 태스크포스(TF)팀이 지난 2월 8일 본격적으로 출범했고 오는 5월 공청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국내 신탁업은 ‘자본시장법’의 규율을 받고 있다. 2009년 증권거래법·선물거래법·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신탁업법 등이 ‘통합 자본시장법’으로 묶인 결과다.
현재 신탁업법 개정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금융위원회 은행과 송현지 사무관은 “이에 따라 국내에선 신탁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었다”며 “고령화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신탁의 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7년 만의 신탁업법 분리 독립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신탁업법의 별도 제정 이후 가장 크게 변화가 예상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수탁 재산의 범위가 대폭 확대된다. 자본시장법 아래에서 신탁을 맡길 수 있는 재산은 금전·증권·부동산 등 총 7가지에 국한돼 있다. 수탁 재산의 범위를 신탁법 수준에 맞춰 자산에 결합된 부채·영업(사업)·담보권·보험금청구권 등까지 확대했다.
이 경우 ‘사망 보험금 유언 신탁’을 비롯해 보다 다양한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위탁자가 아파트와 퇴직금은 물론 부채인 주택 담보대출까지 포함한 전 재산을 생전신탁(유언장 없이도 신탁 계약을 통해 생전 또는 사후 재산을 관리해 주는 유언대용신탁)으로 맡기면 신탁업자가 자산을 운용하면서 생활비를 지급하고 부채 관리까지 해주는 상품이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탁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도도 크게 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선 신탁업을 금융투자업의 하나로 규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합신탁업은 자기자본 250억원 이상’과 같은 인가 기준이 적용된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독립 신탁업자의 출현이 어렵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이 겸업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신탁 이용자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이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비대면 신탁 계약과 지시의 제한적 허용’이다. 인터넷 전문 은행 등을 통해 보다 편리하게 모바일을 통한 신탁 계약이 가능해진다. 이와 동시에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신탁업자의 책임성은 한층 강화할 방침이다.
(사진) KB국민은행의 신탁상품 상담 모습/ 서범세 기자
◆'신탁=신의성실 의무' 정립이 먼저
하지만 이와 같은 신탁업법의 개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2월 6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신탁업법을 분리하는 것은 은행이 자산 운용업에 진출하려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황 회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신탁업법과 관련해 날 선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연성과 자율성이 강한 신탁 상품의 특성에 따라 향후 ‘불특정금전신탁(어디에 투자할지 미리 특정하지 않고 신탁회사가 돈을 맡아 관리하는 계약)이나 수탁 재산의 집합운용(전문적인 유가증권 투자 대행 기관인 증권투자신탁회사가 투자자로부터 투자 자금을 위탁받아 대규모의 공동 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유가증권에 투자·운용하는 것)까지 허용된다면 은행이 신탁 상품을 활용해 마치 펀드처럼 상품을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번에 논의되는 신탁업법의 개정에는 불특정신탁과 집합운용 등은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증권사와 자산 운용사 등에서는 결국 은행권의 요구에 따라 향후 이 같은 부분까지 허용 범위가 넓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송 사무관은 “신탁시장을 활성화하더라도 국내 금융시장의 기본적인 체계를 훼손하는 개선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며 “신탁업법이 개정되기 전에 5월 공청회 등을 통해 다양한 업계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현 한국투자신탁운용 상무는 “신탁업법의 본질은 투자자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신뢰와 기대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성실 의무(fiduciary duty)”라고 설명했다.
저금리·고령화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신탁업법을 자본시장법에서 분리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만큼 고객과 회사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도록 정교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 상무는 “신탁이라는 용어가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금융권마다 신탁업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정립하는 것이 먼저”라며 “신탁법 개정 또한 조금은 신중하게 기본기를 다져 가며 추진하는 것이 향후 신탁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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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로 예정된 신탁업법 개정은 이제 막 불씨가 붙기 시작한 신탁시장의 ‘확실한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보험금청구권, 부채 등 보다 다양한 재산을 관리하는 게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로펌·의료법인 등에도 새롭게 문이 열린다. 지금까지 ‘금융업’의 테두리에 묶여 있던 신탁시장의 한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저금리 고령화 시대에 ‘부의 이전 수단’이자 ‘종합적인 자산 관리’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국내 신탁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짚어봤다.
취재 이정흔·김서윤·정채희 기자 I 사진 서범세·김기남·이승재 기자
◆ '도깨비' 지은탁에게 '보험신탁'이 있었다면...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얼마 전 막을 내린 tvN의 인기 드라마 ‘도깨비’의 여주인공인 지은탁(김고은 분)은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사고무탁 혈혈단신(의지할 곳 없이 홀로)’ 힘겹게 삶을 이어 가는 인물이다.
이모가 한 명 있지만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은탁의 엄마가 남겨 놓은 보험금을 노리고 지은탁을 볼 때마다 “보험금 통장을 내놓으라”며 고래고래 윽박을 질러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이야기를 바꿔보면 어떨까. 만약 지은탁의 엄마가 거액의 보험금을 남기며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해보자.
어린 딸이 25세가 될 때까지 제삼자가 보험금을 관리하며 수익을 내고 그중 매달 200만원을 생활비로 딸에게 지급하도록 한다. 그 이후 딸이 25세가 되면 남은 보험금 원금을 모두 건네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보험금 처리를 믿을 만한 곳에 ‘신탁’하는 것이다.
보험금의 소유가 일시적으로 제삼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지은탁의 이모처럼 검은 속내를 지닌 주변인들로부터 자산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직 자산 관리 능력이 없는 지은탁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전문가들이 자산을 운용하며 안정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올바른 신탁 활용의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서는 아직 이와 같은 사례처럼 보험금 등을 신탁에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곧 가능해질 전망이다. 저금리·고령화 시대를 맞아 신탁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금융 당국 또한 2017년 5대 중점 금융 개혁 과제로 ‘신탁업 활성화’를 들고나왔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12일 금융 개혁 주요 추진 과제 중 첫째로 ‘신탁업 제도 전면 개편’을 발표했다. 신탁 상품을 보다 다양화하고 신탁업에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을 촉진하는 것이 골자다.
◆ ISA·퇴직연금도 기본적으론 ‘신탁 상품’
국내 신탁법에 따르면 ‘신탁’은 맡기는 사람(위탁자)의 다양한 재산이나 수익을 일정한 자(수익자)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운용·관리·보관하는 재산 관리 기구(수탁자)와 간단하게 말해 ‘내 재산이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한데, 현재 국내에서는 이 역할을 은행·증권·부동산 신탁회사와 같은 금융회사들이 맡고 있다.
다만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고 맡긴다’는 의미를 조금 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내 신탁법상 신탁은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일대일 계약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수탁자가 철저하게 ‘위탁자의 필요와 목적에 맞춰’ 자산을 관리·운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탁 상품은 크게 금전 자산을 관리하는 금전신탁과 부동산 등의 자산을 관리하는 재산신탁,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재산신탁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현재 고객이 맡긴 돈을 고객이 지정한 운용 방법에 따라 주식·채권·간접투자상품 등에 투자해 수익을 돌려주는 ‘특정금전신탁’, 위탁자가 맡긴 토지 등의 부동산 자산을 관리·개발한 뒤 발생한 수익을 돌려주는 ‘부동산신탁’, 위탁자가 금융회사에 자산을 맡기고 운용 수익을 받다가 사망 이후 미리 계약한 대로 자산을 상속·배분하는 ‘유언대용신탁’, 청년들에게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부금을 활용한 공익 신탁인 ‘청년희망펀드’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가장 가깝게는 ‘만능통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신탁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와 연금저축신탁·퇴직연금 등도 모두 신탁을 기반으로 한 금융 상품이다.
자료=금융투자협회
◆ 신탁시장 규모 5년 새 두 배 커져
최근 국내에서 신탁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데는 몇 가지 키워드가 맞물려 있다. ‘1인 가구’의 증가와 ‘고령화’ 추세 그리고 ‘저금리’에 따른 자산 운용의 어려움이다.
신탁은 금융자산뿐만 아니라 부동산 자산과 지식재산권 등 다양한 자산을 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광범위하고 유동적이다. 고객의 요구 조건에 따라 장기적이고 포괄적으로 자산을 관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장점이 부각되면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을 중심으로 ‘노후 자산 관리 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는 것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3년 11월 500조원 규모이던 전체 신탁 상품의 수탁액 규모(금전·재산·종합재산 포함)는 2016년 11월을 기준으로 739조원대에 이르고 있다. 3년 사이에 수탁액이 32% 정도 증가한 셈이다.
은행과 증권사들이 주로 판매하는 금전신탁과 부동산 신탁회사에서 취급하는 부동산신탁을 중심으로 한 재산신탁이 골고루 증가세를 보였다. 그중 특히 금전신탁은 2011년 157조원 규모이던 것과 비교하면 2016년 380조원 규모로 5년 새 그 규모가 2배 이상 커진 셈이다.
특히 최근 2~3년간 초고액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증여신탁’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 가파른 성장세에 한몫했다. ‘증여신탁’은 부모가 맡긴 자산을 국공채 등에 투자해 굴리면서 주로 10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원금과 투자 수익을 자녀·손자녀에게 나눠 지급하는 상품이다.
2016년 초까지만 해도 전체 시장 규모가 100억원에 못 미쳤던 증여신탁은 ‘증여세의 절세 수단’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지난 한 해 동안에만 5000억원이 넘는 신규 자금이 유입될 만큼 강남 지역의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한 은행권의 관계자는 “최근 몇년간 세법 개정 이슈가 불거지면서 상속·증여신탁에 대한 자산가들의 관심이 유독 뜨거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최근 증여신탁의 절세 혜택을 10%에서 3%로 축소하는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오는 2월 24일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강남의 프라이빗 뱅커(PB)들을 중심으로 단골 자산가들에게 상품 가입을 서두르라고 조언하는 분위기다.
이창동 KB국민은행 신탁사업부장은 “세제 혜택이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야가 상속·증여신탁”이라며 “초고액 자산가들의 ‘부의 이전 수단’으로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신탁 상품의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신탁법 제정, 뭐가 달라지나
점점 달아오르는 신탁시장은 올해 10월 이후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탁업법’ 제정안의 정기국회 제출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실무 태스크포스(TF)팀이 지난 2월 8일 본격적으로 출범했고 오는 5월 공청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국내 신탁업은 ‘자본시장법’의 규율을 받고 있다. 2009년 증권거래법·선물거래법·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신탁업법 등이 ‘통합 자본시장법’으로 묶인 결과다.
현재 신탁업법 개정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금융위원회 은행과 송현지 사무관은 “이에 따라 국내에선 신탁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었다”며 “고령화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신탁의 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7년 만의 신탁업법 분리 독립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신탁업법의 별도 제정 이후 가장 크게 변화가 예상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수탁 재산의 범위가 대폭 확대된다. 자본시장법 아래에서 신탁을 맡길 수 있는 재산은 금전·증권·부동산 등 총 7가지에 국한돼 있다. 수탁 재산의 범위를 신탁법 수준에 맞춰 자산에 결합된 부채·영업(사업)·담보권·보험금청구권 등까지 확대했다.
이 경우 ‘사망 보험금 유언 신탁’을 비롯해 보다 다양한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위탁자가 아파트와 퇴직금은 물론 부채인 주택 담보대출까지 포함한 전 재산을 생전신탁(유언장 없이도 신탁 계약을 통해 생전 또는 사후 재산을 관리해 주는 유언대용신탁)으로 맡기면 신탁업자가 자산을 운용하면서 생활비를 지급하고 부채 관리까지 해주는 상품이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탁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도도 크게 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선 신탁업을 금융투자업의 하나로 규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합신탁업은 자기자본 250억원 이상’과 같은 인가 기준이 적용된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독립 신탁업자의 출현이 어렵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이 겸업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신탁 이용자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이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비대면 신탁 계약과 지시의 제한적 허용’이다. 인터넷 전문 은행 등을 통해 보다 편리하게 모바일을 통한 신탁 계약이 가능해진다. 이와 동시에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신탁업자의 책임성은 한층 강화할 방침이다.
(사진) KB국민은행의 신탁상품 상담 모습/ 서범세 기자
◆'신탁=신의성실 의무' 정립이 먼저
하지만 이와 같은 신탁업법의 개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2월 6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신탁업법을 분리하는 것은 은행이 자산 운용업에 진출하려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황 회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신탁업법과 관련해 날 선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연성과 자율성이 강한 신탁 상품의 특성에 따라 향후 ‘불특정금전신탁(어디에 투자할지 미리 특정하지 않고 신탁회사가 돈을 맡아 관리하는 계약)이나 수탁 재산의 집합운용(전문적인 유가증권 투자 대행 기관인 증권투자신탁회사가 투자자로부터 투자 자금을 위탁받아 대규모의 공동 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유가증권에 투자·운용하는 것)까지 허용된다면 은행이 신탁 상품을 활용해 마치 펀드처럼 상품을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번에 논의되는 신탁업법의 개정에는 불특정신탁과 집합운용 등은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증권사와 자산 운용사 등에서는 결국 은행권의 요구에 따라 향후 이 같은 부분까지 허용 범위가 넓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송 사무관은 “신탁시장을 활성화하더라도 국내 금융시장의 기본적인 체계를 훼손하는 개선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며 “신탁업법이 개정되기 전에 5월 공청회 등을 통해 다양한 업계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현 한국투자신탁운용 상무는 “신탁업법의 본질은 투자자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신뢰와 기대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성실 의무(fiduciary duty)”라고 설명했다.
저금리·고령화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신탁업법을 자본시장법에서 분리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만큼 고객과 회사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도록 정교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 상무는 “신탁이라는 용어가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금융권마다 신탁업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정립하는 것이 먼저”라며 “신탁법 개정 또한 조금은 신중하게 기본기를 다져 가며 추진하는 것이 향후 신탁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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