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의 운명, 개정인가 조정인가

[글로벌 현장]
강경파와 온건파 간 헤게모니전 ‘치열’, 평가 한 달 만에 180도 바뀌어


(사진)강경파를 대표하는 피터 나바로(왼쪽)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과 온건파를 대표하는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한국경제신문)

[워싱턴(미국)=박수진 한국경제 특파원]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 5년 만에 미세 조정 또는 전면 개정의 기로에 섰다. ‘미국 우선주의’를 국정 운영 기조로 내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통상정책 때문이다.

아직은 어느 쪽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재협상한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폭으로 할지 모두 미지수다. 확실한 것은 미국 내에서 ‘한미 FTA를 손질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는 정도다. 공감대는 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의견이 분분하다.

◆선두에는 나바로와 콘 위원장

한미 FTA의 운명을 가를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트럼프 행정부 내 통상담당 관료 간 헤게모니 싸움이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강경 보호무역주의자들과 온건 자유무역주의자 간 세력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3월 10일 “백악관에서 내전(civil war)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강경파의 선두엔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이 있다. 공공 정책 경제학 전공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캠퍼스 경영대학원 교수인 그는 트럼프 대통령선거 캠프에 초기부터 참여한 몇 안 되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 ‘세계경제의 부를 바꾸는 슈퍼 파워 중국’, ‘웅크린 호랑이 : 중국의 군사주의는 세계에 어떤 의미인가’ 등 중국 관련 경제 서적을 많이 썼다. 대선 캠프에서 중국에 대한 환율 조작국 지정, 중국 제품에 대한 45% 보복관세 부과 등을 주장했다.

지난 3월 초에는 삼성과 LG전자를 향해 ‘무역 사기’를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국산 철강에 대해 특별히 보복관세를 높여야 한다고 상무부에 편지를 쓰기도 했다. 중국·한국뿐만 아니라 대미 흑자국들에 대해 ‘공정무역’의 칼날을 갈고 있는 인물이다.

나바로 위원장과 보조를 맞추고 있는 사람은 월가의 억만장자 투자자 윌버 로스 상무장관과 ‘트럼프의 오른팔’로 불리는 스티브 배넌 대통령 수석전략가 등이다.

월가 출신의 자유무역주의 성향 관료들이 이들에 맞서고 있는 그룹이다.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을 필두로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디나 파월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 등이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이 그룹에 속한다.

지난 1월 백악관에 들어간 콘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 제러드 쿠슈너의 추천을 받았다. 그는 기업인들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감세와 규제 완화 등의 작업을 추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가 하루에도 몇 번씩 콘을 부를 정도로 신뢰가 있다”고 보도했다. 콘 위원장은 보수 성향 미국 기업인들의 시각을 대변해 나바로 위원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악관 소식통은 “콘 위원장이 나바로 위원장의 극단적인 제안이나 보고서를 중단에서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두 계파 간 헤게모니전의 영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지난 3월 31일 공개된 미 무역대표부(USTR)의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NTE)’ 내용이다.

보고서는 한미 FTA에 대해 “2012년 한미 FTA 출범 후 6차례의 관세 인하와 꾸준한 무역 장벽 폐지 조치가 있었다”며 “이를 통해 모든 규모의 미국 수출 업체들이 한국 시장에서 새로운 접근 기회를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무역 장벽 보고서는 미국 기업들이 한국·중국·일본 등 60개국의 교역국에 진출하거나 사업하면서 느낀 애로 사항과 제도적 장벽들을 USTR이 모아 발간하는 보고서다. USTR은 무역 장벽 등을 지적하기 전에 각국과의 무역협정에 대해서도 서문 격으로 종합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한미 FTA에 대한 긍정 평가는 USTR이 지난 3월 1일 내놓은 ‘대통령의 2017년 무역정책 어젠다’ 보고서 내용과 다르다. 당시 보고서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의 대한 무역 적자가 132억 달러에서 276억 달러로 두 배로 늘었다.

한미 FTA는 미국인들이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았다”며 전면 재협상 가능성을 암시했었다. 한 달 새 같은 기관에서 내놓은 한미 FTA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워싱턴 통상 전문가들은 보고서 작성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지난 3월 1일 발표된 ‘통상정책 보고서’는 작성 기관이 USTR이지만 서문에 해당하는 ‘대통령의 2017년 무역정책 어젠다’ 부분은 나바로 위원장, 지난 3월 31일 발간된 국별 무역 장벽 보고서는 콘 위원장의 영향 아래 USTR 실무진이 각각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강경파·온건파 간 경쟁 즐겨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한미 FTA로 일자리 10만 개가 사라지고 대한 무역 적자가 두 배로 늘었다”고 비판했다. 또 “한미 FTA는 미국 내 일자리를 죽이는 나쁜 협정”이라며 집권 시 곧장 재협상에 나설 기세였다.

하지만 막상 당선 후 한국에 대한 비판 발언을 자제해 왔다. 일각에서는 중국·일본 등 대미 무역 흑자 대국들을 우선 처리하기 위해 한국을 뒤로 미뤘다는 해석이 나왔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미 여론이 일어 아시아 전략에서 공조하기 어려운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우려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파와 온건파 중 어느 쪽에도 힘을 몰아주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31일엔 로스 장관과 나바로 위원장, 배넌 전략가 등 ‘강경파’가 배석한 가운데 백악관에서 모든 교역국의 불공정 무역 행위 전수조사 등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며칠 후엔 콘 위원장과 파월 부보좌관 등이 주최한 기업인 행사에 참여해 온건파의 활약을 칭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 한쪽에 힘을 몰아주고 있지 않다”며 “(기업 경영자 시절처럼) 백악관에서도 세력 간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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