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이것만은” 중소기업의 ‘4대 희망사항’

[커버 스토리 = 중소기업은 바란다]
‘단가 낮추기, 인력 빼가기, 위험의 외주화, 약속어음’ 사라져야

[한경비즈니스=차완용 기자] 우리는 흔히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갑’과 ‘을’의 관계로 규정한다. 그중에서도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갑을 관계의 전형이다.

생살여탈권을 쥔 대기업 앞에 협력업체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쓴 침만 삼킬 뿐 감히 거부하는 만용은 부리지 못한다. 갑과 을의 계약을 빗댄 ‘을사조약’이라는 패러디에도 을의 무력함이 녹아 있다. 을사조약은 을이 죽어나는 계약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 을의 말문이 터졌다. “제발 이것만은 바꿔야 한다”며 갑에 맞서고 있다. 중소기업인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친(親)중소기업 공약을 밝혀 온 만큼 중소기업이 경영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협력업체인 중소기업들이 “꼭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4대 불공정 관행인 ‘납품 단가 낮추기’, ‘중소기업 우수 인력 빼가기’, ‘위험의 외주화’, ‘피 말리는 약속어음’ 등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 “납품 단가 낮추라”는 강요에 한숨만


#.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A사는 지난해 말 대기업 구매 담당자로부터 납품 단가를 낮추라는 강요를 받았다. 본사의 매출이 줄어드는 상황이기 때문에 부품 원가를 절반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6월 신차를 출시하며 계약한 ‘매년 3% 단가 인하’ 조건이 무의미해졌다. A사 관계자는 “매년 3%씩 공급 단가를 인하하는 것도 울며 겨자 먹기 식 계약이었는데 불과 6개월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납품 단가를 강요받았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상당수가 부당한 갑질에 몸살을 앓고 있다. 대기업의 매출 부진도 중국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에 따른 영업 차질의 손해도 모두 협력사인 중소기업에 전가된다.

비단 특정 대기업이나 업종에 따른 갑질도 아니다. 오랫동안 지속돼 온 대기업과 협력사 간의 병폐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계속되는 납품 단가 인하 요구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반발한다.

대기업 협력사로 오랫동안 납품해 온 한 중소기업 대표는 최근 사업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그동안 매년 연말마다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대기업의 꼴을 보지 않아도 돼 속이 시원하다”며 “요즘에는 두 발 뻗고 편히 잠들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1차 협력업체 중 매출 1000억원 미만의 중소기업 29곳은 지난해 상반기 2.03%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2015년 평균 2.06%보다 0.03%포인트 감소한 수치다. 대기업이 어려워지자 협력업체에 부품 단가 인하를 전가한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협력업체는 그나마 다행이다. 기계 업종의 1차 협력업체(42곳)는 평균 영업이익률이 1%대다. 2014년 2% 선이 무너진 뒤로 회복은커녕 점점 더 하락하고 있다.

◆ 인력에 기술까지 빼앗기는 중소기업


#. 2015년부터 국내 화장품 대기업에 기능성 화장품을 납품하던 제조업체 B사는 최근 충격에 휩싸였다. 지난 2월 핵심 인력인 연구개발팀장이 개인 사정을 이유로 회사를 그만둔 직후 3월 연구원 한 명이 추가로 회사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 둘은 납품처인 대기업에 출근을 시작했고 최근 B사는 대기업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갑으로 군림하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침해 사례가 가끔 언론에 보도되지만 실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입을 모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현직 임직원 영입을 통한 기술 탈취다. 약자인 중소기업으로선 인력과 기술을 강제적으로 탈취당하더라도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대기업의 심기를 건드리면 앞으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두려워 그냥 덮어두는 곳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 밖에 대기업들은 갑을 관계를 이용해 하도급 거래 과정에서 기술을 빼가기도 하고 사업 제안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가기도 한다. 기술 자문 또는 공동 연구 과정에서 허술한 보안의식을 틈타 몰래 기술을 빼돌리는 식이다.

모두 현행법이 허술해 중소기업이 법의 보호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기술 탈취에 관련된 대기업이 제재를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 위험한 일은 하청업체가


#.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한 조선소에서 타워크레인이 전도돼 총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났다. 피해를 본 노동자 전원이 사내외 협력업체 C사 직원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조선업 등 제조업 전반의 기형적인 고용 구조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위험의 외주화’는 기업들이 위험성이 높은 업무를 도급으로 떼어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는 관행을 말한다.

화학물질·가스 등 위험 물질을 운반·관리·유지·보수하는 일을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맡는다거나 가전제품·케이블·통신설비 수리를 맡는 외주업체 기사들이 제품을 점검하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고용노동부의 산재 노동자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노동자 1만 명당 산재로 숨진 노동자의 숫자는 사내 하청이 0.39명인데 반해 원청은 0.05명으로 하청업체의 사고 사망률이 원청의 8배에 달했다.

협력업체들은 위험한 작업을 하다가 문제가 생겨도 원청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다. 또 원청과 하청 간의 갑을 관계에 따른 무리한 작업 지시와 높은 노동 강도, 부족한 임금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 중소기업 피 말리는 약속어음


#. 올해 초에는 D 전자회사에 스마트폰용 금속 케이스를 공급했던 2차 협력사들이 1차 협력사의 파산으로 250억원 상당의 채권을 회수하지 못해 도산 위기에 몰렸다. D사는 1차 협력사에 약 1200억원 상당의 발주액 대부분을 현금으로 지불했지만 2차 하청업체들은 1차 협력사로부터 6개월 만기어음을 받았다. 어음 만기일이 다가오자 1차 협력사는 법정 관리를 신청했고 2차 하청업체들의 채권을 회수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거렸다.


미래의 일정 시점에 일정 금액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약속어음은 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납품 대금을 지급하거나 중소기업 간 대금 결제 때 활용된다.

하지만 제도상 폐해와 어음이 잘못되면 피해 기업의 존폐를 위협하는 등 심각한 결함이 존재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7월 중소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어음 결제 기일은 평균 107.9일이나 됐다.

만약 은행에서 어음을 만기 이전에 현금화하려면 할인 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연쇄 부도 위험이다.

어음에는 구매 기업이 부도나면 어음을 할인해 준 은행이 납품 기업에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환청구권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새 정부에서는 약속어음의 단계적인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cw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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