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정주영 현대 창업자 '맨주먹 베팅'… 500원 보여주며 "480억 내놔라"

[커버스토리= 대한민국 신인맥21 역사]
현대중공업, 두 차례 오일쇼크 극복하고 ‘세계 1위’ 정상에 우뚝

[편집자주]“현대중공업의 제2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현대중공업그룹이 세계 최고 조선사로서의 재기의 닻을 올렸다. 지난해 조선·해운에 불어닥친 사상 최악의 경영 한파를 딛고 사업 분리로 각 분야의 경쟁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첫발은 지난 4월 3일 계열사 분리로 뗐다. 이어 6월 21일 사업 분할 이후 첫 임원 인사를 단행하며 독자 경영의 시작을 알렸다. 회사는 이러한 조직 정비를 통해 글로벌 리딩 기업으로 성장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기술’과 ‘품질’이 신경영의 핵심이다. 다시 뛸 현대중공업을 위한 진용 정비도 한창이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부회장을 필두로 6개 계열사 사장단과 정기선 현대중공업 기획실 부실장(전무) 등 주요 임원이 중추가 돼 회사를 이끈다. 이를 230명의 임원진(상무보 이상)과 직원들이 뒷받침한다. ‘제2의 창업’, 달라진 현대중공업을 조명했다.

[한경비즈니스=김서윤 기자]대한민국이 수십 년간 중공업 강국으로 군림한 저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이하 정주영 회장)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선박을 수주하고 영국에서 차관을 빌려 조선소 건립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진행했다.

정 회장은 1971년 조선소 부지를 울산으로 확정짓고 막대한 외자를 확보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그는 당시 영국 최고의 은행이었던 버클레이은행에 43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을 요청했다.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도입은 조선소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버클레이 측은 현대의 조선 능력과 기술 수준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거부했다.



(사진)= 1973년 3월 20일 현대조선소 시업식에서 사원들을 격려하는 고 정주영 창업자다./현대중공업 제공

◆ 백사장 사진 한 장으로 투자 유치

버클레이은행을 직접 설득하는 데 실패한 정 회장은 버클레이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선박 컨설턴트 회사인 A&P애플도어(A&P Appledore)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찾았다.

롱바톰 회장을 통해 버클레이은행을 움직여 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롱바톰 회장은 현대의 차관 상환 능력을 의심했고 성장 잠재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롱바톰 회장에게 정 회장이 지갑을 뒤져 꺼낸 것은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였다.

정 회장은 지폐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보다 무려 300년이나 이르다. 산업화가 늦어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한 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돼 나올 것”이라며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다.

정 회장의 설명과 끈질긴 설득에 롱바톰 회장은 현대건설 등을 직접 둘러본 후 현대가 대형 조선소를 지어 독자적으로 경쟁력 있는 큰 배를 건조할 수 있다는 추천서를 써 버클레이은행에 건넸다. 현대의 차관 신청서가 버클레이은행을 통과한 것은 물론이다.

현대는 버클레이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기로 했지만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이라는 더 큰 산을 넘어야 했다.

영국에서는 은행이 차관 제공을 결정해도 ECGD의 승인을 얻어야 했는데, ECGD는 차관을 가져간 나라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해 주는 제도였다. 이 때문에 ECGD의 기준은 매우 까다로웠다.

현대는 ECGD로부터 조선소 건설 계획과 원리금 상환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선박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갖고 와야만 승인받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 회장은 즉시 선주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선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지도 한 장, 스코트리스고에서 만든 26만 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뿐이었다.

정 회장은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다녔다. 선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선박 수주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던 중 정 회장은 롱바톰 회장에게 소개받은 선박 브로커로부터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주력선이 노후화되고 경쟁국들의 추격 때문에 보다 저렴한 선박으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리바노스 회장이 머무르고 있던 스위스 몽블랑의 한 별장으로 날아갔고 계약은 그 자리에서 맺어졌다.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이 타계한 직후 현대중공업에 보낸 조문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을 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고인의 모습을 보고 유조선을 발주해도 문제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의 개척정신과 의지에 감탄, 대형 유조선 2척을 주저 없이 발주했다.
선박 수주에 성공함으로써 현대중공업은 ECGD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조선소 건설은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진)= 애틀랜틱배런(1호선) 명명식이다./현대중공업 제공

◆ 1972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

1972년 3월 23일 오후 2시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는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주한 각국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앞서 현대중공업이 조선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국내외에서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톤급 선박이 최대였고 건조 능력은 19만 톤에 불과했다. 세계 시장점유율이 고작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영세했기 때문이었다.

울산조선소 기공식은 한국 조선업의 기공식이자 한국 조선업이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뛰어들었다고 선언하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정 회장은 이날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 내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내용의 사업 계획을 밝혔다.

그로부터 2년여 뒤인 1974년 6월 28일 오전 11시,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역사적인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개최됐다.

배를 감정하는 데 까다롭기로 소문난 1, 2호선 선주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에게 “지금까지 내가 본 배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며 인사했다는 후문이다.

한국이 수주량 기준으로 처음 일본을 누르고 세계 1위를 기록한 것은 1993년이었다. 본격적으로 1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이보다 훨씬 앞선 1983년 세계 1위에 올랐다.

일본의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는 1985년 특집호에서 1983년 건조량을 기준으로 현대중공업을 조선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선정했다. 조선소 기공식을 가진 지 11년, 선박 건조 시업식을 가진 지 불과 10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특히 이는 1973년과 1978년의 1, 2차 오일쇼크 위기를 겪은 뒤 이뤄낸 성과여서 더욱 의미가 컸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세계 해운·조선 경기가 냉각돼 갔고 이는 신흥 현대중공업에 커다란 위기로 다가왔다.

현대중공업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대형 유조선(VLCC) 외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 운반선 등으로 선종을 다변화했다.

1975년에는 수리 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을 설립하고 같은 해 각종 육·해상 구조물을 제작하는 철구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1976년에는 주요 부품인 선박용 엔진 생산을 위한 엔진기계사업본부를 발족했다.

현대중공업은 특유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으로 두 차례의 오일쇼크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1983년 첫 세계 1위에 올라선 이후 현재까지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왔다.

s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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