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젠트리피케이션의 해법...‘미노타케<분수를 지키는> 재개발’

[스페셜 리포트 1 = 해외 젠트리피케이션④ 일본 도쿄]
도쿄 외곽에도 ‘관광지화’ 물결…마을 살리기 방식의 ‘무코지마’ 등 해결책 모색

[도쿄(일본)=이정흔 기자]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있는 도심부와 달리 도쿄의 외곽 지역은 여전히 ‘계란 값’ 땅값을 유지하고 있다. 초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빈집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건물주들이 임차인을 위한 다양한 유인책을 내놓아야 하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심과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투자 자금이 유입되며 임대료나 땅값의 상승을 일으키는 형태가 아니라 원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좁아지면서 지역 커뮤니티가 해체되고 ‘정체성이 사라지는’ 데 대한 우려가 집중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 쫓겨나는 산야 지역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도쿄 다이토구와 아라카와구에 걸쳐 있는 ‘산야(山谷)’ 지역이다. 도쿄의 최빈민가인 이곳은 전통적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산야 지역 어디를 가든 사물함을 쉽게 볼 수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산야 지역에 흩어져 있는 ‘1000엔(1만원) 쪽방 숙소’에 기거하는 이가 많은데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있지 않기 때문에 갈아입을 옷 등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쪽방 숙소에 외국 관광객이 하나둘 유입되면서 이들 일용직들이 산야 지역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싼값에 숙소를 잡을 수 있다’는 정보가 외국 관광객들에게 전해지면서 산야 지역에서도 적극적으로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숙소들이 생겨나고 있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연구하는 다무라 후미노리 연구원은 “숙소 한쪽에는 ‘장기 투숙객 할인’을 내걸고 일용직 노동자를 유인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영어로 된 플래카드에 ‘웰컴’이라는 인사말과 함께 2200엔(2만2500원) 정도의 숙소 이용 가격을 내걸어 놓은 곳들이 적지 않다”고 안내했다.




(사진)일용직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쪽방촌 숙소 입구에 관광객 안내를 위한 영어 간판이 붙어 있다. 도교 산야 지역을 안내 중인 다무라 후미노리(왼쪽) 연구원과 산야 지역 거리 풍경.

산야 지역에 변화의 물결이 본격화된 것은 2012년 도쿄 스미다구의 ‘스카이트리’ 완공 이후다. 높이 634m의 도쿄 스카이트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립식 전파탑으로, 도쿄를 찾는 관광객들이 ‘도쿄 야경’을 보기 위해 즐겨 찾는 대표적인 명소가 되고 있다. 스미다구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스카이트리와 밀접해 있는 산야 지역에까지 ‘관광지화’의 바람이 들이닥치게 된 것이다.

산야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 가능성을 예측한 도모쓰네 쓰토무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일본의 전체적인 산업구조와 경제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들의 생활 터전이 사라지면서 일본 내에 일용직 노동자들이 전체적으로 줄어드는 등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지역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 간의 ‘공간을 둔 싸움’으로 설명한다. 해결책 또한 ‘기존 주민들의 생활공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도모쓰네 교수는 “산야 지역 일용직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을 지켜내는 것이 결국은 그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끼리의 토론이 가장 중요하고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협의체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산야 지역에서 이와 같은 협의체를 통한 토론이 전혀 활성화돼 있지 않다는 것이 도모쓰네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해외의 사례를 보면 마을 내부에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 장소’를 잘 활용해 갈등을 해결한 사례가 많다”며 “예를 들어 마을 광장에 ‘벼룩시장’ 등을 개최해 원주민들과 새로운 유입 층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을 축제’로 상생법 찾은 무코지마

산야 지역처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져가는 지역도 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을 줄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사례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도쿄 스카이트리가 자리한 스미다구와 같은 지역에 속한 무코지마가 대표적이다. 무코지마는 도쿄의 대표적인 공업지역 중 하나로 금속가공업·섬유공업·인쇄업 등의 공장이 즐비한 곳이다. 이들 공장을 운영하거나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주택지 또한 한 지역에 들어서 있다.

도쿄 외곽의 조용한 마을인 무코지마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역시 ‘도쿄 스카이트리’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2009년 도쿄 스카이트리 공사가 한창 진행되면서 무코지마 마을에도 재개발에 따라 고층 아파트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무코지마에는 ‘빈 공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 ‘싼 임대료’를 찾아 도쿄 외곽 역까지 흘러들어온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젊은 예술가들은 ‘낡고 오래된 동네’였던 무코지마에 또 다른 색깔을 불어넣었다.

주변에 고층 아파트 빌딩이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무코지마는 마치 1920년대 도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코지마 지역의 중심 상권을 거닐다 보면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동산·미장원 등이 지금도 여전히 영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이처럼 오래된 가게 사이사이 눈에 띄는 모습의 카페나 예술 공방들이 눈에 띈다.



(사진) 1920년대 부동산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무코지마 상권 모습과 무코지마 그 사이에 들어선 젊은 예술가의 공방.

평소에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이 조용하기만 한 무코지마 마을은 1년에 한 달씩 ‘딴 세상’으로 변한다. 무코지마 지역의 마을 협의체랄 수 있는 무코지마학회의 사하라 시게모토 회장은 “마을 주민들이 주최가 돼 행사를 기획하고 축제를 연다”며 “외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만 5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예술 행사’들이 열리는 이 축제는 초창기만 하더라도 외부 예술가를 초청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행사가 자리 잡으면서 이 마을의 또 다른 구성원이 된 젊은 예술가들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지금은 공업 지역 시절부터 마을을 지켜 오던 원주민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함께 어울리며 서로를 이해하는 ‘장’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시아,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란 책을 통해 무코지마 사례를 소개한 김선미 연구원은 “일본은 특히 목조건물이 많아 지진에 취약하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는 재개발 사업이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며 “다만 이 과정에서 ‘신구 주민의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지역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양화되는 주민층이 공존하는 문제’로 접근할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옛것과 새것의 공존, 오미초시장

무코지마의 사례 외에도 최근 일본 학계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의 해법으로 새롭게 각광받는 것이 ‘미노타케(身の丈) 재개발’이라는 개념이다. ‘분수를 지키는’, ‘무리하지 않는’재개발 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 기존의 옛 모습을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둔 재개발 방식을 말한다.

우치다 교수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의 ‘오미초시장’을 소개했다. 2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시장은 1980년대부터 재개발 얘기가 나왔지만 ‘몇 십 층짜리 건물을 새로 짓자’는 초창기의 구상에서 전혀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부 상인들을 주축으로 ‘시장의 옛 모습을 지키며 분수에 맞게 재개발해 나가자’는 논의가 제기됐다. 이후 오미초시장은 인근의 100년 정도 된 근대 건축물인 은행건물을 활용한 재개발 방안을 본격적으로 구상했고 2009년 이를 완공했다.

먼저 오미초시장 상인들은 지자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긴 레일을 깔았다. 이 레일 위로 은행 건물을 그대로 시장까지 옮겨오는 작업을 진행했다.

오미초시장은 이 은행의 1층에 그대로 자리 잡았고 건물 한쪽에 여전히 금융기관(일종의 수협)이 운영되고 있다. 이후 이 오래된 건축물 위에 2층부터 5층까지 현대적인 건축물을 새로 올렸다. 현재 2층은 식당가, 3층과 4층에는 보육 시설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5층은 시장 사무소로 이용된다.

우치다 교수는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대표적인 재개발 사례”라며 “최근에는 일본 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미노타케 재개발’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좋은 극복 방안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