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도심 ‘슈퍼 젠트리피케이션’, 땅값 비싼 긴자, 버블기 가격 넘어서
입력 2017-09-05 10:06:34
수정 2017-09-05 10:06:34
[스페셜 리포트 1 = 해외 젠트리피케이션④ 일본 도쿄]
강력한 임대차보호법…임차인 영업권 보장으로 건물주가 더 힘들어
[도쿄(일본)=이정흔 한경비즈니스기자] “세상이 걱정하는 그런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겪고 있지 않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 도쿄의 한 상인연합회에 보낸 섭외 요청에 대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봉건시대부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쿄는 역사가 매우 오래됐고 세계적인 도시다. 이와 같은 도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인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답변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 학계를 중심으로 일본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분위기다. 도쿄 상인들에게는 아직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 자체가 생소할지 모르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 일본 부동산 투자의 개념을 바꾼, 초고령화와 20년의 장기 불황
우선 젠트리피케이션의 사전적 의미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영국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본류랄 수 있는 영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도시가 개발되면서 수반되는 모든 현상이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도시환경이 개선되고 치안이 좋아지는 등의 장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 이면에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고 투기 수요가 심화되며 결국은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필요악처럼 따라올 수밖에 없다.
도모쓰네 쓰토무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처음에는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학술 용어로 사용됐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면서 “각 도시들마다 글로벌화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최근 2~3년 사이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의 젠트리피케이션 또한 하나로 설명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전 지역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초고령화’와 ‘잃어버린 20년’이다. 도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되고 있는 도시다.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다섯 명에 한 명꼴이던 65세 이상 고령자는 2020년이면 네 명 중 한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도시 외곽 지역은 빈집이 넘쳐나는 공동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반면 도심부는 여전히 사람들이 몰리는 양극화가 심화되는 중이다.
지난 20년간의 장기 불황은 일본의 부동산 투자 문화와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도쿄 지역에는 ‘토지신화’라는 용어가 난무했다. 부동산에 투자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부동산 불패’나 마찬가지 개념이다. 거품이 낀 일본의 토지 가격은 1980년대 후반에만 3배 정도 뛰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거품이 꺼지며 수많은 투자자들이 뼈아픈 경험을 맛봤다.
이는 도쿄 도시 외곽 지역에 땅값이나 임대료 상승과 같은 현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쿄 도심 북동쪽 외곽 지역에 자리한 스미다구 무코지마의 마을 커뮤니티인 무코지마학회 사하라 시게모토 회장은 이를 두고 “일본의 땅값이 계란 값 같다고 한다”고 말했다. 마치 계란 값처럼 오랜 기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는 얘기다.
◆도쿄 뒤덮은 ‘관광지화’ 물결
‘계란 값’이나 다름없던 도쿄 지역의 땅값이 최근 2~3년 사이 꿈틀대고 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맞아 도시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한 덕분이다. 이는 일본의 국토교통성이 공개하는 공시지가 중 도쿄 23구 주택지의 평균가격을 확인해 봐도 알 수 있다. 2015년까지(1월 1일 기준) ㎡당 51만8600엔(약 528만원) 수준에 머물렀던 이 가격은 2017년(1월 1일 기준) 54만9100엔(약 560만원)대까지 올랐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긴자’ 상권이다.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즐비한 도쿄의 대표적인 상권 긴자는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의 명동과 비슷하다. 서울을 대표하는 명동 상권은 곧잘 ‘국내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곳’으로 언급되듯이 긴자는 ‘일본 제일의 금싸라기 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사진)도쿄 긴자 상권./ 연합뉴스
올 들어 긴자의 땅값이 1992년 버블 직후의 땅값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긴자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1992년 ㎡당 3650만 엔(약 3억7231만원) 수준이었다. 이후 2015년까지 2969만 엔(약 3억285만원)까지 떨어졌던 것이 2017년 4032만 엔(4억1128만원)까지 가격이 뛰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젠트리피케이션 학자인 샤론 주킨 뉴욕시립대 교수의 책 ‘네이키드 시티’ 일본어 번역판 작업에 참여한 우치다 나오미 사이타마대 교수는 이와 같은 현상을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로 설명했다.
우치다 교수는 “최근 5년 사이에 도쿄 내에서도 센스가 돋보이고 길거리가 예쁜 상권들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며 “다만 이런 곳들은 원래 부동산이 비싼 지역들이었는데 새롭게 유입되는 투자로 부동산 가격이 ‘더욱 비싸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긴자와 다이칸야마·기치조지·롯폰기 등이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추기는 요인이 최근 일본 상권들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체인점화’, ‘관광지화’ 현상이다.
◆임차인보다 건물주가 더 힘들어
긴자 상권과 같은 도쿄 주오구(중앙구)에 속해 있는 니혼바시 요코야마초(日本橋*山町)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도매상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승려복을 비롯해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은 한국의 남대문시장과도 비슷하다.
(사진)도쿄의 대표적 도매 상권인 요코야마초 내부 모습.
그런데 2~3년 사이 이곳의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중국인을 비롯해 해외에서부터 유입되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이곳 요코야마초에도 대형 호텔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코야마초 상권 초입 부분에 최근 새롭게 들어선 대형 호텔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그 맞은편에 또 다른 호텔이 공사 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코야마초는 특히 도쿄역 등과 가까워 호텔이나 숙박 시설 등을 유치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인데다 인근에 고급 주택 단지 등이 들어서면서 상권의 범위가 빠르게 위축되고 있는 중이다. 전형적인 ‘관광지화’의 모습이다.
(사진)요코야마초 초입에 들어선 대형 호텔. 그 맞은편에 새로운 호텔이 공사 중이다.
요코야마초 상인들의 협의체인 도쿄도매연맹의 아이카와 히로시 이사장은 “요코야마초는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깊은 상권”이라며 “무엇보다 일본 전 지역의 도매상들이 모여드는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곳 상인들의 어려움은 한국 상인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겪고 있는 갈등과 그 상황이 사뭇 달랐다. 건물주가 있는 상가에 세입자로 들어가 있는 상인들보다 오히려 자신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상인들이 더 힘들어했다. 아이카와 이사장은 “임차인들은 사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조건이 맞는 다른 곳을 찾을 수 있다”며 “오히려 건물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서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은 ‘차지차가법’이라는 일본의 임대차상인보호법이다. 일본의 상가 계약은 전통적으로 건물주와 임차인이 상가계약을 할 때 ‘무기자가계약’으로 이뤄진다. 임대차계약서는 2년 혹은 5년마다 갱신하더라도 ‘임차인이 원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계약 방식이다.
버블 직후인 1992년 일본 정부는 차지차가법을 개정하며 ‘임차인’에 대해 강력한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건물주는 ‘정당한 사유’ 없이 임차인을 내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정당한 사유’라는 것이 법정에 가더라도 웬만해서는 인정받기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때문에 법 개정 당시 일본 정부는 무기자가계약 외에 ‘정기자가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이는 계약이 성사될 당시부터 ‘3년 뒤에는 상가를 비우겠다’는 등의 기간을 정해놓는 경우를 말한다. 도쿄 지역 내에 도심 재개발 지역이 늘어나면서 이와 같은 계약이 필요한 경우들이 생겨난 데 따른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임차인은 ‘예외 없이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것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계약 기간이 끝난 이후의 상황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재 일본의 상가 계약은 80%가 무기자가계약이고 20%가 정기자가계약이다. 아이카와 이사장이 상권 내 임차인들의 경우 오히려 어려움이 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건물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카와 이사장은 “요코야마초 상권만 하더라도 100년 이상 대를 이어 가며 장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운을 뗐다. 그만큼 대부분의 상인들이 ‘이 상권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하다. 하지만 건물을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관리비’는 물론 건물이나 땅 소유에 따른 ‘고정자산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카와 이사장은 “물론 상인들 중에는 버티다 여력이 안 되니 땅이나 건물을 팔고 떠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를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며 “상권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거나 최근에는 리모델링을 통해 건물의 기능을 바꾸는 곳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 상인들의 이와 같은 ‘사명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시아,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의 공동 저자로 참여한 김선미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 힌트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김 연구원은 “일본의 50대 이상 자영업자들은 대를 이어 가며 독자적인 기술이나 품질을 바탕으로 가게를 운영하며 부를 쌓아온 곳이 많다”며 “게다가 오랫동안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지역의 리더’ 역할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 “호텔 지으려면 주민들과 협의 먼저”
그러면 지금과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상인들은 상권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예상과 달리 아이카와 이사장은 “시대가 변하면 상권의 모습도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앞으로도 기대가 크다”고 시원시원하게 답변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감의 원천으로 지난해 출범한 ‘디자인협의회’를 들었다.
(사진)아이카와 히로시 도쿄도매연맹 이사장
요코야마초 상권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부작용을 완화하고 상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2~3년 전부터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다양한 협의체를 구성해 왔다.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디자인협의회였다.
눈에 띄는 것은 이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다. 재정적인 지원도 물론 크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행정적 지원’이다. 주오구는 지난해 디자인협의회와 관련해 특별 조례를 마련했다. 요코야마초는 기본적으로 상업지역이기 때문에 호텔이나 아파트 등 어떠한 용도의 건물도 들어설 수 있다. 그런데 특별 조례에 따라 앞으로는 상권 내에 새로운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디자인협의회와 논의를 거치도록 제도적인 틀을 마련한 것이다.
디자인협의회의 역할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디자인협의회는 이 지역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거나 허가를 내주는 것과 같은 ‘방파제’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새롭게 들어서게 될 건물이 ‘기존 상권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디자인적 컨설팅을 해주거나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다.
상인들의 자발적인 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정책의 방향성은 도쿄 주오구 관계자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스가누마 마사히로 주오구 도시정비부 지역정비과장은 “일본에선 건물주가 마음대로 상가 임차인을 쫓아내는 것이 법률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임대료나 매매가의 변동 폭이 크지 않다”며 “이 때문에 도쿄 내 지자체 대부분이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을 ‘지역공동체 커뮤니티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며 부동산 버블이 꺼지는 과정을 모두가 지켜봤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인식이 건물주나 상인들은 물론 부동산 개발업자들 사이에 체화돼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대표적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체)인 모리빌딩의 박희윤 한국지사장은 이에 대해 “일본의 장기 불황 동안 디벨로퍼들이 새롭게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며 “이 때문에 일본의 디벨로퍼들은 신규 분양을 통해 얻는 수익보다 좋은 건물을 지속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디벨로퍼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개별적으로 노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지역공동체와의 상생’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박 지사장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을 줄이는 것은 상권 내 상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면서 “향후 한국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흐름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강력한 임대차보호법…임차인 영업권 보장으로 건물주가 더 힘들어
[도쿄(일본)=이정흔 한경비즈니스기자] “세상이 걱정하는 그런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겪고 있지 않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 도쿄의 한 상인연합회에 보낸 섭외 요청에 대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봉건시대부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쿄는 역사가 매우 오래됐고 세계적인 도시다. 이와 같은 도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인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답변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 학계를 중심으로 일본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분위기다. 도쿄 상인들에게는 아직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 자체가 생소할지 모르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 일본 부동산 투자의 개념을 바꾼, 초고령화와 20년의 장기 불황
우선 젠트리피케이션의 사전적 의미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영국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본류랄 수 있는 영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도시가 개발되면서 수반되는 모든 현상이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도시환경이 개선되고 치안이 좋아지는 등의 장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 이면에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고 투기 수요가 심화되며 결국은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필요악처럼 따라올 수밖에 없다.
도모쓰네 쓰토무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처음에는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학술 용어로 사용됐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면서 “각 도시들마다 글로벌화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최근 2~3년 사이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의 젠트리피케이션 또한 하나로 설명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전 지역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초고령화’와 ‘잃어버린 20년’이다. 도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되고 있는 도시다.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다섯 명에 한 명꼴이던 65세 이상 고령자는 2020년이면 네 명 중 한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도시 외곽 지역은 빈집이 넘쳐나는 공동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반면 도심부는 여전히 사람들이 몰리는 양극화가 심화되는 중이다.
지난 20년간의 장기 불황은 일본의 부동산 투자 문화와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도쿄 지역에는 ‘토지신화’라는 용어가 난무했다. 부동산에 투자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부동산 불패’나 마찬가지 개념이다. 거품이 낀 일본의 토지 가격은 1980년대 후반에만 3배 정도 뛰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거품이 꺼지며 수많은 투자자들이 뼈아픈 경험을 맛봤다.
이는 도쿄 도시 외곽 지역에 땅값이나 임대료 상승과 같은 현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쿄 도심 북동쪽 외곽 지역에 자리한 스미다구 무코지마의 마을 커뮤니티인 무코지마학회 사하라 시게모토 회장은 이를 두고 “일본의 땅값이 계란 값 같다고 한다”고 말했다. 마치 계란 값처럼 오랜 기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는 얘기다.
◆도쿄 뒤덮은 ‘관광지화’ 물결
‘계란 값’이나 다름없던 도쿄 지역의 땅값이 최근 2~3년 사이 꿈틀대고 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맞아 도시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한 덕분이다. 이는 일본의 국토교통성이 공개하는 공시지가 중 도쿄 23구 주택지의 평균가격을 확인해 봐도 알 수 있다. 2015년까지(1월 1일 기준) ㎡당 51만8600엔(약 528만원) 수준에 머물렀던 이 가격은 2017년(1월 1일 기준) 54만9100엔(약 560만원)대까지 올랐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긴자’ 상권이다.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즐비한 도쿄의 대표적인 상권 긴자는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의 명동과 비슷하다. 서울을 대표하는 명동 상권은 곧잘 ‘국내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곳’으로 언급되듯이 긴자는 ‘일본 제일의 금싸라기 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사진)도쿄 긴자 상권./ 연합뉴스
올 들어 긴자의 땅값이 1992년 버블 직후의 땅값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긴자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1992년 ㎡당 3650만 엔(약 3억7231만원) 수준이었다. 이후 2015년까지 2969만 엔(약 3억285만원)까지 떨어졌던 것이 2017년 4032만 엔(4억1128만원)까지 가격이 뛰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젠트리피케이션 학자인 샤론 주킨 뉴욕시립대 교수의 책 ‘네이키드 시티’ 일본어 번역판 작업에 참여한 우치다 나오미 사이타마대 교수는 이와 같은 현상을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용어로 설명했다.
우치다 교수는 “최근 5년 사이에 도쿄 내에서도 센스가 돋보이고 길거리가 예쁜 상권들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며 “다만 이런 곳들은 원래 부동산이 비싼 지역들이었는데 새롭게 유입되는 투자로 부동산 가격이 ‘더욱 비싸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긴자와 다이칸야마·기치조지·롯폰기 등이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슈퍼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추기는 요인이 최근 일본 상권들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체인점화’, ‘관광지화’ 현상이다.
◆임차인보다 건물주가 더 힘들어
긴자 상권과 같은 도쿄 주오구(중앙구)에 속해 있는 니혼바시 요코야마초(日本橋*山町)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도매상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승려복을 비롯해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은 한국의 남대문시장과도 비슷하다.
(사진)도쿄의 대표적 도매 상권인 요코야마초 내부 모습.
그런데 2~3년 사이 이곳의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중국인을 비롯해 해외에서부터 유입되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이곳 요코야마초에도 대형 호텔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코야마초 상권 초입 부분에 최근 새롭게 들어선 대형 호텔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그 맞은편에 또 다른 호텔이 공사 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코야마초는 특히 도쿄역 등과 가까워 호텔이나 숙박 시설 등을 유치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인데다 인근에 고급 주택 단지 등이 들어서면서 상권의 범위가 빠르게 위축되고 있는 중이다. 전형적인 ‘관광지화’의 모습이다.
(사진)요코야마초 초입에 들어선 대형 호텔. 그 맞은편에 새로운 호텔이 공사 중이다.
요코야마초 상인들의 협의체인 도쿄도매연맹의 아이카와 히로시 이사장은 “요코야마초는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깊은 상권”이라며 “무엇보다 일본 전 지역의 도매상들이 모여드는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곳 상인들의 어려움은 한국 상인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겪고 있는 갈등과 그 상황이 사뭇 달랐다. 건물주가 있는 상가에 세입자로 들어가 있는 상인들보다 오히려 자신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상인들이 더 힘들어했다. 아이카와 이사장은 “임차인들은 사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조건이 맞는 다른 곳을 찾을 수 있다”며 “오히려 건물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서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은 ‘차지차가법’이라는 일본의 임대차상인보호법이다. 일본의 상가 계약은 전통적으로 건물주와 임차인이 상가계약을 할 때 ‘무기자가계약’으로 이뤄진다. 임대차계약서는 2년 혹은 5년마다 갱신하더라도 ‘임차인이 원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계약 방식이다.
버블 직후인 1992년 일본 정부는 차지차가법을 개정하며 ‘임차인’에 대해 강력한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건물주는 ‘정당한 사유’ 없이 임차인을 내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정당한 사유’라는 것이 법정에 가더라도 웬만해서는 인정받기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때문에 법 개정 당시 일본 정부는 무기자가계약 외에 ‘정기자가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이는 계약이 성사될 당시부터 ‘3년 뒤에는 상가를 비우겠다’는 등의 기간을 정해놓는 경우를 말한다. 도쿄 지역 내에 도심 재개발 지역이 늘어나면서 이와 같은 계약이 필요한 경우들이 생겨난 데 따른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임차인은 ‘예외 없이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것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계약 기간이 끝난 이후의 상황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재 일본의 상가 계약은 80%가 무기자가계약이고 20%가 정기자가계약이다. 아이카와 이사장이 상권 내 임차인들의 경우 오히려 어려움이 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건물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카와 이사장은 “요코야마초 상권만 하더라도 100년 이상 대를 이어 가며 장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운을 뗐다. 그만큼 대부분의 상인들이 ‘이 상권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하다. 하지만 건물을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관리비’는 물론 건물이나 땅 소유에 따른 ‘고정자산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카와 이사장은 “물론 상인들 중에는 버티다 여력이 안 되니 땅이나 건물을 팔고 떠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를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며 “상권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거나 최근에는 리모델링을 통해 건물의 기능을 바꾸는 곳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 상인들의 이와 같은 ‘사명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시아,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의 공동 저자로 참여한 김선미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 힌트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김 연구원은 “일본의 50대 이상 자영업자들은 대를 이어 가며 독자적인 기술이나 품질을 바탕으로 가게를 운영하며 부를 쌓아온 곳이 많다”며 “게다가 오랫동안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지역의 리더’ 역할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 “호텔 지으려면 주민들과 협의 먼저”
그러면 지금과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상인들은 상권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예상과 달리 아이카와 이사장은 “시대가 변하면 상권의 모습도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앞으로도 기대가 크다”고 시원시원하게 답변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감의 원천으로 지난해 출범한 ‘디자인협의회’를 들었다.
(사진)아이카와 히로시 도쿄도매연맹 이사장
요코야마초 상권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부작용을 완화하고 상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2~3년 전부터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다양한 협의체를 구성해 왔다.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디자인협의회였다.
눈에 띄는 것은 이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다. 재정적인 지원도 물론 크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행정적 지원’이다. 주오구는 지난해 디자인협의회와 관련해 특별 조례를 마련했다. 요코야마초는 기본적으로 상업지역이기 때문에 호텔이나 아파트 등 어떠한 용도의 건물도 들어설 수 있다. 그런데 특별 조례에 따라 앞으로는 상권 내에 새로운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디자인협의회와 논의를 거치도록 제도적인 틀을 마련한 것이다.
디자인협의회의 역할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디자인협의회는 이 지역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거나 허가를 내주는 것과 같은 ‘방파제’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새롭게 들어서게 될 건물이 ‘기존 상권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디자인적 컨설팅을 해주거나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다.
상인들의 자발적인 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정책의 방향성은 도쿄 주오구 관계자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스가누마 마사히로 주오구 도시정비부 지역정비과장은 “일본에선 건물주가 마음대로 상가 임차인을 쫓아내는 것이 법률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임대료나 매매가의 변동 폭이 크지 않다”며 “이 때문에 도쿄 내 지자체 대부분이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을 ‘지역공동체 커뮤니티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며 부동산 버블이 꺼지는 과정을 모두가 지켜봤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인식이 건물주나 상인들은 물론 부동산 개발업자들 사이에 체화돼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대표적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체)인 모리빌딩의 박희윤 한국지사장은 이에 대해 “일본의 장기 불황 동안 디벨로퍼들이 새롭게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며 “이 때문에 일본의 디벨로퍼들은 신규 분양을 통해 얻는 수익보다 좋은 건물을 지속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디벨로퍼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개별적으로 노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지역공동체와의 상생’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박 지사장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을 줄이는 것은 상권 내 상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면서 “향후 한국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흐름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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