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 혁신성장의 조건 :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 단독 인터뷰]
기업 경영의 세 화두 ‘장기간’·‘관여’·‘사람’
(사진) 야콥 벨렌베리 인베스터 회장. (/이명지 기자)
[한경비즈니스 스톡홀름(스웨덴) = 이명지 기자]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모범적인 기업 경영 환경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유럽은 국내 학계가 지향하는 영원한 ‘이데아’다.
그중에서도 북유럽, 특히 스웨덴의 경제·사회·노동 분야는 수십 년 동안 연구 대상이었다. 타 북유럽 국가보다 관련 자료가 풍부하고 대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게 한국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GDP의 30% 이상을 책임지는 명문가 ‘발렌베리’의 과거와 현재는 한국의 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사례로 손색이 없다.
발렌베리의 기업 구조와 사회 환원 모델은 올바른 기업가 정신과 함께 스웨덴 정부의 지원 그리고 노동계의 협력이 어우러지며 가능했다.
한경비즈니스는 창간 22주년을 기념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과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2017년의 ‘발렌베리 패밀리’를 대표하는 그의 입을 통해 향후 우리 경제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간단하고 투명한 기업 구조
스웨덴 스톡홀름 도심에 있는 발렌베리재단에는 에릭슨·SEB·ABB 등 세계적 기업의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경영인들이 모여 있다.
흔히 생각하는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집무실은 도심의 마천루에 있지만 발렌베리재단이 자리 잡은 스톡홀름의 골목은 조용하다 못해 오히려 고요하기까지 했다. 무심히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이 과연 이 건물 안에 발렌베리가의 주요 경영인들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발렌베리가는 1856년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스웨덴의 은행 SEB의 전신)을 창업한 이후 161년의 역사를 이어 왔다. 이는 유럽은 물론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발렌베리가의 5세대다. 그는 2004년 인베스터 회장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맡고 있는 직책은 인베스터 회장뿐만이 아니다. 발렌베리의 소유 기업인 에릭슨과 ABB의 부회장직은 물론 또 다른 재단인 FAM의 부회장직도 맡고 있다.
이러한 그의 바쁜 업무 때문에 인터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0월 17일(현지 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의 인베스터 본사에서 동이 채 트지 않은 오전 8시부터 이뤄졌다.
국내 언론이 발렌베리를 주목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200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스웨덴을 방문, 직접 고(故)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한 발렌베리가의 일원들을 만났다.
이 회장이 발렌베리를 찾은 것은 기업 지배구조 재편에 대한 고민 때문으로 알려졌다. 국내 대기업들이 물고 물리는 복잡한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진 것에 비해 발렌베리는 상당히 간단하고 동시에 투명한 기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펜을 들고 종이에 발렌베리그룹의 지배구조를 그려주는 것으로 인터뷰의 포문을 열었다.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더 많은 자금을 재단에 보내 어떠한 방법으로 사회 환원을 이룰지 고민합니다.”
발렌베리가 그려 온 기업의 목적을 한마디로 압축한 발언이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2015년 세상을 떠난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은 1992년 각 지주사에 흩어져 있던 소유 기업들의 지분을 인베스터로 이관했다. 그 후부터 발렌베리의 지배구조는 재단-지주회사-자회사로 정리됐다.
자회사를 통해 취한 이득은 발렌베리재단으로 가게 되는데, 재단은 이를 활용해 다양한 공익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발렌베리 인베스터 본사. 이 건물에는 야콥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해 발렌베리 소유 기업들의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 모여 있다. (/이명지 기자)
◆인재 파견으로 소유 기업에 영향력 행사
인베스터 외에도 2007년 설립된 재단 자산 운용 회사 FAM 역시 기업 7곳의 지분을 일부 보유하고 있다. 또 인베스터는 2015년 패트리샤재단을 설립했는데 이곳 또한 발렌베리가 소유한 비상장사 8곳의 지분을 갖고 있다.
즉 지배구조 맨 위에 발렌베리재단이 있고 중간을 인베스터와 FAM이 이어주며 그 아래에 소유 기업들이 자리한 이른바 ‘피라미드 구조’다.
발렌베리가의 모토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이는 발렌베리가가 소유한 기업들의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에릭슨·SEB·아틀라스코프 등 어떠한 기업명에서도 ‘발렌베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발렌베리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은 상당히 많다. 2017년 기준으로 인베스터·FAM·패트리샤재단이 다수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만 해도 27곳이다.
소수 지분을 보유한 기업까지 합치면 100여 곳에 이른다. 인베스터가 소유한 기업의 시가총액만 해도 스웨덴 스톡홀름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렇게 많은 기업들에 대해 발렌베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이러한 질문에 세 가지 단어를 직접 종이에 적었다. ‘장기간(longterm), 관여(engaged), 사람(people)’이었다.
“발렌베리가는 1856년 SEB의 전신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을 설립하며 160년이 넘는 오랜(longterm) 역사를 지녔습니다. 이후 SEB를 비롯한 소유 기업들에 깊숙이 관여하며 경영해 왔습니다”
그는 ‘깊은 관여’를 설명하기 위해 세계적 정보기술(IT) 기업이자 자신이 부회장으로 재직 중인 ‘에릭슨’의 예를 들었다.
“우리는 소유 기업의 경영에 적합한 인물을 이사회에 참여시킵니다. 에릭슨은 제가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저는 에릭슨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통신 산업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해 왔습니다.”
사람을 파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 관계자들과 꾸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저는 이사회 미팅에 참석해 견해를 말하고 에릭슨 관계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말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소통’을 중요히 생각합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특히 강조한 단어는 ‘사람(people)’이었다. 발렌베리는 소유 기업들의 새로운 경영진을 결정할 때 오랫동안 함께 근무해 온 이들을 주로 발탁한다. 그들이 기업에 대해 어떠한 지식을 갖췄고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분석한다.
이러한 발렌베리가의 인사에 대해 언론은 ‘마치 체스를 두는 것 같다(playing chess)’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 야콥 발렌베리 회장의 설명이다.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들은 세계에서 활약하는 ‘톱클래스’입니다. 우리는 그 무게를 알기에 수년 동안 지켜보고 검증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사진)2012년 한국을 방문한 발렌베리가의 일원들. (/한국경제신문)
◆발렌베리가(家), 대타협 현장에 함께하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발렌베리그룹의 지배구조 및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만큼 발렌베리의 기업 구조가 투명하고 동시에 강한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가의 구성원들은 기업의 주식을 직접 소유하는 대신 기업의 지분을 가진 재단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발렌베리만의 소유 및 지배구조는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의 산물이다. 스웨덴은 정부·기업·노조가 모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로 자주 언급된다.
기업은 의무를 다하고 정부는 기업에 특혜를 주는 대신 국가에 기여하라고 말한다. 노동자는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기업에 전달한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성과가 아니다. 1920년대 말 대공황의 여파로 스웨덴의 GDP는 13%나 하락하고 실업률이 높아졌으며 파업과 직장 폐쇄 등 노사 간 대립이 빈번히 일어났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과 발렌베리가를 비롯한 경영자 집단, 노동계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수년간의 협상 끝에 1938년 이른바 세계사에서 노사정 대타협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살츠셰바덴 협약’이 체결됐다.
협약을 통해 스웨덴 정부는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대신 자본가의 경영을 인정하고 자본가는 사회 환원과 고용 증대 등을 꾀하는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협약을 디딤돌 삼아 발렌베리를 비롯한 스웨덴의 대기업은 해외로 본거지를 이전하는 대신 스웨덴 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협약이 맺어진 고급 휴양지 살츠셰바덴의 그랜드호텔 또한 발렌베리가의 소유 기업 중 하나다. 스웨덴의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역사적 순간에 발렌베리가가 관여돼 있었던 것이다.
스웨덴의 제도는 거대 자본가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웨덴은 한국과 달리 금융과 산업의 분리 원칙에 엄격하지 않다. 1911년 은행이 일반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거나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됐다.
발렌베리가문의 모태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은 이 법을 기반으로 1920년부터 1930년 사이 여러 기업을 인수해 지금과 같은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진)발렌베리가의 인물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라울 발렌베리'다. 스웨덴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7만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발렌베리 인베스터 본사 근처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의 조형물에는 그의 업적이 쓰여 있다. (/이명지 기자)
◆‘차등의결권’으로 오너가 지분 보호
오너가의 지분을 보호하는 방안도 마련돼 있다. 스웨덴에서 채택하고 있는 ‘차등의결권’ 제도는 기업이 주식을 상장할 때 의결권에 차등을 둔 두 가지 종류의 주식을 발행하는 제도다. 이는 기존 주주들의 기업 지배력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A주와 B주로 나눠진 주식에서 A주식을 가진 주주는 B주식을 가진 주주에 비해 더 많은 의결권을 가질 수 있다. 발렌베리의 소유 기업들은 A주에 1개의 의결권을, B주에는 10분의 1의 의결권을 부여한다. 이 제도는 발렌베리 가문이 소유 기업들을 외국자본으로부터 지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 있는 만큼 기업은 사회 환원을 통해 건강한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발렌베리재단은 매년 2억5000만 달러를 스웨덴대에 지원하며 연구·개발(R&D)을 위해 힘쓰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최근 재단이 관심을 갖는 사회 환원 활동으로 ‘환경보호’를 언급했다. “스웨덴에서는 나무가 매우 중요한 자원입니다. 우리는 WWRS(Wallenberg Wood Science center)와 기타 프로젝트롤 통해 나무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소유 기업들에 대한 R&D 투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에릭슨은 5G(5세대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향후 통신 시장은 5G 기술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한국의 기업들처럼 에릭슨 또한 R&D 투자를 통해 5G 기술 선도에 나설 것입니다.”
스웨덴의 기업 문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노조와의 관계다. 이 또한 살츠셰바덴 협약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발렌베리가의 소유 기업들 또한 노조의 대표들을 이사회에 참여시킴으로써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에릭슨은 6명의 노조 대표들이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노동환경, 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나눕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이러한 발렌베리가의 기업 문화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기업의 현직 노동자들이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경영에 대한 수월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발렌베리 패밀리’는 야콥 발렌베리 회장뿐만이 아니다. 페테르 발렌베리의 형 마르크 발렌베리의 아들인 마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 페테르 발렌베리의 작은아들인 페테르 발렌베리 주니어 발렌베리재단 회장이 그룹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즉 현재 발렌베리가는 ‘스리 톱’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저와 제 동생 및 사촌 형제는 모두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눕니다.”
◆‘유일한 방법’이 아닌 ‘하나의 방법’
5세대까지 이어진 발렌베리가는 비교적 순탄하게 세대 간 승계를 이룰 수 있었다. 이는 발렌베리가의 주요 구성원이 그동안 미혼으로 자식을 두지 않았거나 아들을 많이 낳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후손들의 이름에 마쿠스와 야콥이 반복된다”는 농담과 함께 그룹의 가계도를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발렌베리가는 곧 현실로 다가올 고민을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발렌베리가의 미래’를 준비 중인 6세대들이 무려 30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어떠한 후손을 경영에 참가시킬지 가려내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현재 발렌베리가가 추진하고 있는 업무 중 하나다. “우선 우리는 경영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후손들에게 코칭·멘토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원에 나설 것입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후세대를 향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 많은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또 경영에 참여하더라도 이는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열정이 없다면 절대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발렌베리가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 또한 세계의 기업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국 기업 중에선 ‘삼성’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과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인연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야콥, 마쿠스 회장까지 이어졌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을 ‘제이(j) 리’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세계 경제계가 발렌베리를 주목하는 것에 대해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존경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즉답을 내놓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인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 세계적으로 발전했고 기업 지배구조가 투명하다는 점이 큰 몫을 한 것 같습니다. 또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이것은 하나의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발렌베리가가 택한 기업 지배구조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기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경영하는지 늘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의 말대로 발렌베리가의 경영 문화가 그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1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업과 금융을 아우르는 다양한 기업을 운영해 온 발렌베리가의 역사는 분명 우리에게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교훈을 영원한 이데아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현실로 받아들일지, 열쇠는 우리에게 쥐여져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은 발렌베리가(家)의 5세대로 2015년 작고한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의 아들이다.
그는 발렌베리가가 소유한 기업들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인베스터의 회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FAM의 부회장, 크누트앤드앨리스발렌베리재단의 이사직도 맡고 있다.
또 발렌베리가의 소유 기업인 SEB, 에릭슨 및 ABB의 부회장으로 항공·통신 및 전력 자동화 기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펜실베이니아대의 왓슨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발렌베리가의 세계적 기업들
(사진)스웨덴 국민들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통신 기업 에릭슨은 최근 5G 기술 개발에 여념이 없다.(/한국경제신문)
은행부터 제약까지…다양한 산업군에서 영향력 발휘
인베스터가 지분을 갖고 있는 발렌베리의 소유 기업은 에릭슨·ABB·SEB·아스트라제네카·바르질라·아틀라스콥코(Atlas Copco) 등 12곳이 있다.
통신 기업 에릭슨은 스웨덴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에릭슨은 스웨덴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웨덴 국민들의 ‘자존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부회장으로 있다.
SEB는 발렌베리의 초석이 된 기업이다. 스웨덴 왕가의 자산을 관리하는 ‘로열뱅크’로도 유명하다. 또 여성을 정식 직원으로 처음 고용한 진보적 면모도 지니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과 함께 ‘스리 톱’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마쿠스 발렌베리가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마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인베스터 대신 SEB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발렌베리가가 가진 SEB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는 해석도 있다.
발렌베리가 소유 기업들 중 가장 활약이 두드러지는 분야로 ‘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위궤양 치료제 ‘로섹’으로 세계적인 제약 회사로 발돋움한 아스트라제네카가 그 주인공이다. 아스트라는 1998년 영국의 제약회사 제네카와의 합병을 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인베스터는 중전기 및 자동화 설비 기업 ABB, 산업 장비 기업 아트라스콥코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안정적 경영을 지원하고 있다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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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경영의 세 화두 ‘장기간’·‘관여’·‘사람’
(사진) 야콥 벨렌베리 인베스터 회장. (/이명지 기자)
[한경비즈니스 스톡홀름(스웨덴) = 이명지 기자]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모범적인 기업 경영 환경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유럽은 국내 학계가 지향하는 영원한 ‘이데아’다.
그중에서도 북유럽, 특히 스웨덴의 경제·사회·노동 분야는 수십 년 동안 연구 대상이었다. 타 북유럽 국가보다 관련 자료가 풍부하고 대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게 한국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GDP의 30% 이상을 책임지는 명문가 ‘발렌베리’의 과거와 현재는 한국의 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사례로 손색이 없다.
발렌베리의 기업 구조와 사회 환원 모델은 올바른 기업가 정신과 함께 스웨덴 정부의 지원 그리고 노동계의 협력이 어우러지며 가능했다.
한경비즈니스는 창간 22주년을 기념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과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2017년의 ‘발렌베리 패밀리’를 대표하는 그의 입을 통해 향후 우리 경제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간단하고 투명한 기업 구조
스웨덴 스톡홀름 도심에 있는 발렌베리재단에는 에릭슨·SEB·ABB 등 세계적 기업의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경영인들이 모여 있다.
흔히 생각하는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집무실은 도심의 마천루에 있지만 발렌베리재단이 자리 잡은 스톡홀름의 골목은 조용하다 못해 오히려 고요하기까지 했다. 무심히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이 과연 이 건물 안에 발렌베리가의 주요 경영인들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발렌베리가는 1856년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스웨덴의 은행 SEB의 전신)을 창업한 이후 161년의 역사를 이어 왔다. 이는 유럽은 물론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발렌베리가의 5세대다. 그는 2004년 인베스터 회장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맡고 있는 직책은 인베스터 회장뿐만이 아니다. 발렌베리의 소유 기업인 에릭슨과 ABB의 부회장직은 물론 또 다른 재단인 FAM의 부회장직도 맡고 있다.
이러한 그의 바쁜 업무 때문에 인터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0월 17일(현지 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의 인베스터 본사에서 동이 채 트지 않은 오전 8시부터 이뤄졌다.
국내 언론이 발렌베리를 주목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200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스웨덴을 방문, 직접 고(故)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한 발렌베리가의 일원들을 만났다.
이 회장이 발렌베리를 찾은 것은 기업 지배구조 재편에 대한 고민 때문으로 알려졌다. 국내 대기업들이 물고 물리는 복잡한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진 것에 비해 발렌베리는 상당히 간단하고 동시에 투명한 기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펜을 들고 종이에 발렌베리그룹의 지배구조를 그려주는 것으로 인터뷰의 포문을 열었다.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더 많은 자금을 재단에 보내 어떠한 방법으로 사회 환원을 이룰지 고민합니다.”
발렌베리가 그려 온 기업의 목적을 한마디로 압축한 발언이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2015년 세상을 떠난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은 1992년 각 지주사에 흩어져 있던 소유 기업들의 지분을 인베스터로 이관했다. 그 후부터 발렌베리의 지배구조는 재단-지주회사-자회사로 정리됐다.
자회사를 통해 취한 이득은 발렌베리재단으로 가게 되는데, 재단은 이를 활용해 다양한 공익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발렌베리 인베스터 본사. 이 건물에는 야콥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해 발렌베리 소유 기업들의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이 모여 있다. (/이명지 기자)
◆인재 파견으로 소유 기업에 영향력 행사
인베스터 외에도 2007년 설립된 재단 자산 운용 회사 FAM 역시 기업 7곳의 지분을 일부 보유하고 있다. 또 인베스터는 2015년 패트리샤재단을 설립했는데 이곳 또한 발렌베리가 소유한 비상장사 8곳의 지분을 갖고 있다.
즉 지배구조 맨 위에 발렌베리재단이 있고 중간을 인베스터와 FAM이 이어주며 그 아래에 소유 기업들이 자리한 이른바 ‘피라미드 구조’다.
발렌베리가의 모토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이는 발렌베리가가 소유한 기업들의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에릭슨·SEB·아틀라스코프 등 어떠한 기업명에서도 ‘발렌베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발렌베리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은 상당히 많다. 2017년 기준으로 인베스터·FAM·패트리샤재단이 다수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만 해도 27곳이다.
소수 지분을 보유한 기업까지 합치면 100여 곳에 이른다. 인베스터가 소유한 기업의 시가총액만 해도 스웨덴 스톡홀름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렇게 많은 기업들에 대해 발렌베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이러한 질문에 세 가지 단어를 직접 종이에 적었다. ‘장기간(longterm), 관여(engaged), 사람(people)’이었다.
“발렌베리가는 1856년 SEB의 전신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을 설립하며 160년이 넘는 오랜(longterm) 역사를 지녔습니다. 이후 SEB를 비롯한 소유 기업들에 깊숙이 관여하며 경영해 왔습니다”
그는 ‘깊은 관여’를 설명하기 위해 세계적 정보기술(IT) 기업이자 자신이 부회장으로 재직 중인 ‘에릭슨’의 예를 들었다.
“우리는 소유 기업의 경영에 적합한 인물을 이사회에 참여시킵니다. 에릭슨은 제가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저는 에릭슨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통신 산업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해 왔습니다.”
사람을 파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 관계자들과 꾸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저는 이사회 미팅에 참석해 견해를 말하고 에릭슨 관계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말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소통’을 중요히 생각합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특히 강조한 단어는 ‘사람(people)’이었다. 발렌베리는 소유 기업들의 새로운 경영진을 결정할 때 오랫동안 함께 근무해 온 이들을 주로 발탁한다. 그들이 기업에 대해 어떠한 지식을 갖췄고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분석한다.
이러한 발렌베리가의 인사에 대해 언론은 ‘마치 체스를 두는 것 같다(playing chess)’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 야콥 발렌베리 회장의 설명이다.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들은 세계에서 활약하는 ‘톱클래스’입니다. 우리는 그 무게를 알기에 수년 동안 지켜보고 검증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사진)2012년 한국을 방문한 발렌베리가의 일원들. (/한국경제신문)
◆발렌베리가(家), 대타협 현장에 함께하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발렌베리그룹의 지배구조 및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만큼 발렌베리의 기업 구조가 투명하고 동시에 강한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가의 구성원들은 기업의 주식을 직접 소유하는 대신 기업의 지분을 가진 재단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발렌베리만의 소유 및 지배구조는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의 산물이다. 스웨덴은 정부·기업·노조가 모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로 자주 언급된다.
기업은 의무를 다하고 정부는 기업에 특혜를 주는 대신 국가에 기여하라고 말한다. 노동자는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기업에 전달한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성과가 아니다. 1920년대 말 대공황의 여파로 스웨덴의 GDP는 13%나 하락하고 실업률이 높아졌으며 파업과 직장 폐쇄 등 노사 간 대립이 빈번히 일어났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과 발렌베리가를 비롯한 경영자 집단, 노동계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수년간의 협상 끝에 1938년 이른바 세계사에서 노사정 대타협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살츠셰바덴 협약’이 체결됐다.
협약을 통해 스웨덴 정부는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대신 자본가의 경영을 인정하고 자본가는 사회 환원과 고용 증대 등을 꾀하는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협약을 디딤돌 삼아 발렌베리를 비롯한 스웨덴의 대기업은 해외로 본거지를 이전하는 대신 스웨덴 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협약이 맺어진 고급 휴양지 살츠셰바덴의 그랜드호텔 또한 발렌베리가의 소유 기업 중 하나다. 스웨덴의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역사적 순간에 발렌베리가가 관여돼 있었던 것이다.
스웨덴의 제도는 거대 자본가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웨덴은 한국과 달리 금융과 산업의 분리 원칙에 엄격하지 않다. 1911년 은행이 일반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거나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됐다.
발렌베리가문의 모태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은 이 법을 기반으로 1920년부터 1930년 사이 여러 기업을 인수해 지금과 같은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진)발렌베리가의 인물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라울 발렌베리'다. 스웨덴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7만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발렌베리 인베스터 본사 근처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의 조형물에는 그의 업적이 쓰여 있다. (/이명지 기자)
◆‘차등의결권’으로 오너가 지분 보호
오너가의 지분을 보호하는 방안도 마련돼 있다. 스웨덴에서 채택하고 있는 ‘차등의결권’ 제도는 기업이 주식을 상장할 때 의결권에 차등을 둔 두 가지 종류의 주식을 발행하는 제도다. 이는 기존 주주들의 기업 지배력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A주와 B주로 나눠진 주식에서 A주식을 가진 주주는 B주식을 가진 주주에 비해 더 많은 의결권을 가질 수 있다. 발렌베리의 소유 기업들은 A주에 1개의 의결권을, B주에는 10분의 1의 의결권을 부여한다. 이 제도는 발렌베리 가문이 소유 기업들을 외국자본으로부터 지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 있는 만큼 기업은 사회 환원을 통해 건강한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발렌베리재단은 매년 2억5000만 달러를 스웨덴대에 지원하며 연구·개발(R&D)을 위해 힘쓰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최근 재단이 관심을 갖는 사회 환원 활동으로 ‘환경보호’를 언급했다. “스웨덴에서는 나무가 매우 중요한 자원입니다. 우리는 WWRS(Wallenberg Wood Science center)와 기타 프로젝트롤 통해 나무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소유 기업들에 대한 R&D 투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에릭슨은 5G(5세대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향후 통신 시장은 5G 기술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한국의 기업들처럼 에릭슨 또한 R&D 투자를 통해 5G 기술 선도에 나설 것입니다.”
스웨덴의 기업 문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사안은 노조와의 관계다. 이 또한 살츠셰바덴 협약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발렌베리가의 소유 기업들 또한 노조의 대표들을 이사회에 참여시킴으로써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에릭슨은 6명의 노조 대표들이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노동환경, 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나눕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이러한 발렌베리가의 기업 문화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기업의 현직 노동자들이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경영에 대한 수월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발렌베리 패밀리’는 야콥 발렌베리 회장뿐만이 아니다. 페테르 발렌베리의 형 마르크 발렌베리의 아들인 마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 페테르 발렌베리의 작은아들인 페테르 발렌베리 주니어 발렌베리재단 회장이 그룹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즉 현재 발렌베리가는 ‘스리 톱’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저와 제 동생 및 사촌 형제는 모두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눕니다.”
◆‘유일한 방법’이 아닌 ‘하나의 방법’
5세대까지 이어진 발렌베리가는 비교적 순탄하게 세대 간 승계를 이룰 수 있었다. 이는 발렌베리가의 주요 구성원이 그동안 미혼으로 자식을 두지 않았거나 아들을 많이 낳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후손들의 이름에 마쿠스와 야콥이 반복된다”는 농담과 함께 그룹의 가계도를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발렌베리가는 곧 현실로 다가올 고민을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발렌베리가의 미래’를 준비 중인 6세대들이 무려 30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어떠한 후손을 경영에 참가시킬지 가려내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현재 발렌베리가가 추진하고 있는 업무 중 하나다. “우선 우리는 경영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후손들에게 코칭·멘토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원에 나설 것입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후세대를 향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 많은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또 경영에 참여하더라도 이는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열정이 없다면 절대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발렌베리가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 또한 세계의 기업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국 기업 중에선 ‘삼성’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과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인연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야콥, 마쿠스 회장까지 이어졌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을 ‘제이(j) 리’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세계 경제계가 발렌베리를 주목하는 것에 대해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존경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즉답을 내놓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인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 세계적으로 발전했고 기업 지배구조가 투명하다는 점이 큰 몫을 한 것 같습니다. 또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이것은 하나의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발렌베리가가 택한 기업 지배구조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기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경영하는지 늘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의 말대로 발렌베리가의 경영 문화가 그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1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업과 금융을 아우르는 다양한 기업을 운영해 온 발렌베리가의 역사는 분명 우리에게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교훈을 영원한 이데아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현실로 받아들일지, 열쇠는 우리에게 쥐여져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은 발렌베리가(家)의 5세대로 2015년 작고한 페테르 발렌베리 회장의 아들이다.
그는 발렌베리가가 소유한 기업들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인베스터의 회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FAM의 부회장, 크누트앤드앨리스발렌베리재단의 이사직도 맡고 있다.
또 발렌베리가의 소유 기업인 SEB, 에릭슨 및 ABB의 부회장으로 항공·통신 및 전력 자동화 기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펜실베이니아대의 왓슨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발렌베리가의 세계적 기업들
(사진)스웨덴 국민들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통신 기업 에릭슨은 최근 5G 기술 개발에 여념이 없다.(/한국경제신문)
은행부터 제약까지…다양한 산업군에서 영향력 발휘
인베스터가 지분을 갖고 있는 발렌베리의 소유 기업은 에릭슨·ABB·SEB·아스트라제네카·바르질라·아틀라스콥코(Atlas Copco) 등 12곳이 있다.
통신 기업 에릭슨은 스웨덴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에릭슨은 스웨덴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웨덴 국민들의 ‘자존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이 부회장으로 있다.
SEB는 발렌베리의 초석이 된 기업이다. 스웨덴 왕가의 자산을 관리하는 ‘로열뱅크’로도 유명하다. 또 여성을 정식 직원으로 처음 고용한 진보적 면모도 지니고 있다.
야콥 발렌베리 회장과 함께 ‘스리 톱’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마쿠스 발렌베리가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마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인베스터 대신 SEB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발렌베리가가 가진 SEB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는 해석도 있다.
발렌베리가 소유 기업들 중 가장 활약이 두드러지는 분야로 ‘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위궤양 치료제 ‘로섹’으로 세계적인 제약 회사로 발돋움한 아스트라제네카가 그 주인공이다. 아스트라는 1998년 영국의 제약회사 제네카와의 합병을 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인베스터는 중전기 및 자동화 설비 기업 ABB, 산업 장비 기업 아트라스콥코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안정적 경영을 지원하고 있다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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