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골드만삭스’ 첫발, 한국투자증권 승기 잡았다

[스페셜 리포트Ⅰ= 초대형 IB 탄생]
자기자본 규모 4조원 이상 ‘초대형 IB’ 지정…IB 핵심 ‘발행어음 업무’는 일단 한투만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초대형 투자은행(IB)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금융위원회는 11월 13일 정례 회의를 열고 미래에셋대우·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삼성증권·KB증권을 ‘초대형 IB’로 지정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을 목표로 2011년 7월 초대형 IB 육성 계획을 발표한 지 6년 4개월 만이다.

모두 다섯 개의 증권사가 국내 첫 ‘초대형 IB’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들 중 넷은 울고 하나는 웃었다. 한국투자증권만 유일하게 초대형 IB의 핵심 사업인 ‘발행어음’ 인가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초대형 IB 대전의 ‘주인공’인 한국투자증권은 향후 증권사들 간의 치열한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IB 전쟁의 서막, 한투만 웃었다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1조원)를 넘어서는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을 흔히 ‘유니콘 기업’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우버, 중국의 샤오미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유니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꼽히는 것은 이들에게 풍부한 자금을 공급해 줄 ‘자본시장의 활성화’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 IB인 골드만삭스가 투자한 스타트업만 살펴보더라도 우버·드롭박스 등 10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치를 지닌 곳들이 수두룩하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초대형 IB 육성 또한 바로 이와 같은 정책과 맞닿아 있다. 국내의 초대형 IB들이 ‘혁신 성장의 주역’으로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무르익은 사회적 분위기만큼이나 증권사들도 ‘초대형 IB’는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증권사들은 수익의 70% 정도를 수수료 수익에 의존하던 구조였다. 하지만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 등으로 증권사들의 수수료는 거의 무료에 가까운 최저 수준까지 하락했다.

증권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동안 신규 수익원 확보와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IB 사업 부문의 확대가 두드러졌다. 2017년 상반기 증권사들의 IB 부문 수익(1조2397억원)은 전년 동기(8733억원) 대비 4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증권사들이 ‘초대형 IB’에 더욱 공을 들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정부가 초대형 IB 육성을 위해 자기자본 규모에 따라 신규 사업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에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6월 말을 기준으로 국내 초대형 IB 다섯 곳의 자기자본은 미래에셋대우 7조1498억원, NH투자증권 4조6925억원, 한국투자증권 4조3450억원, 삼성증권 4조2232억원, KB증권 4조2162억원이다.

이에 따라 자기자본 규모 4조원을 충족하고 이번에 초대형 IB로 지정된 5개 증권사는 기업 환전 등 외국환 업무 범위가 확대되고 영업용순자본비율(NCR) 및 레버리지 규제도 완화된다. 이에 따라 증권업과 연관된 외환 업무만 할 수 있었던 증권사들이 초대형 IB의 타이틀을 달고 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환전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증권사의 건전성을 측정하는 지표인 NCR 규제 완화도 의미가 크다. 증권사들의 투자 여력이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투자증권을 제외한 나머지 증권사들은 웃지 못하고 있다. IB 사업의 핵심인 발행어음(단기 금융) 사업을 놓쳤기 때문이다. 발행어음은 증권사나 종합 금융회사가 영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회사 자체 신용을 바탕으로 일반 투자자들에게 발행하는 만기 1년 이내 단기 금융 상품을 말한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은 기업 대출, 비상장사 지분 투자, 부동산 금융 등에 쓸 수 있다. 발행어음 업무를 인가받지 못한다면 실질적으로 IB 사업을 확대하기에는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발행어음 50%는 기업금융 투자

초대형 IB 발행어음 사업의 선두 주자로 올라선 한국투자증권은 표정 관리가 한창이다. 대형 증권사 중 유일하게 신규 수익원 창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발행어음 사업 인가를 받은 증권사는 자기자본의 2배까지 어음을 발행할 수 있다. 다만 자본시장의 기업금융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조달 자금의 50% 이상은 기업금융에 의무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부동산 관련 투자는 30% 이내로 제한된다.

임수연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조달 금리 1.8%에 기대 마진율 150bp(1bp=0.01%포인트)를 가정하면 발행어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증권사들의 추가 수익 규모는 평균 최대 1120억원까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신규 수익 창출원으로서의 위력이 막강하다는 의미다.



이제 시장의 시선은 한국투자증권이 제시할 첫 발행어음의 금리에 쏠리고 있다. 발행어음 사업의 성패를 가늠할 만큼 핵심적인 요소인데다 향후 시장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에게 발행어음은 고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매력적인 투자처다.

한국투자증권이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금리’를 투자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현재 1.6% 수준의 은행 예·적금 금리와 비교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1%대 후반~2.0%대 수준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시장 선점 효과를 높이기 위해 2% 이상의 높은 금리를 제시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지만 지나치게 높은 금리는 한국투자증권 쪽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현재 자기자본 규모가 4조원을 넘어가는 증권사들은 모두 발행어음 업무 인가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그중 삼성증권은 대주주 격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으로 대주주 적격성에 문제가 있다며 일찌감치 심사 보류 판정을 받았다. 재판이 끝나기 전에는 인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래에셋대우는 11월 23일 불완전 판매와 관련한 제재 심의 결과에 따라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KB증권은 합병 전 현대증권이 불법 자전거래(내부계좌 2개 이상으로 주식이나 채권을 거래)로 1개월 영업정지 등의 제재를 받은 것이 문제가 됐다. NH투자증권은 K뱅크 특혜 인가 논란에 발목이 잡혔다.

◆갈 길 먼 ‘한국형 골드만삭스’

삼성증권을 제외한 세 증권사는 발행어음 인가를 심사 중인 만큼 향후 추가 인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연내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래에셋대우·NH투자증권·삼성증권·KB증권 등 나머지 4개사까지 인가를 받으면 5개 초대형 IB가 조달할 수 있는 모험자본 규모는 최대 49조원(5개사 자기자본의 2배)까지로 불어난다.

하지만 이제 막 첫발을 뗀 초대형 IB가 제대로 ‘한국형 골드만삭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 당장 글로벌 IB들과 비교해도 체급의 차이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정부가 롤모델로 거론한 골드만삭스와 노무라증권만 하더라도 자기자본 규모가 100조원과 30조원에 이른다. 국내 초대형 IB들이 궁극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본 확충을 통해 덩치를 키울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전문 인력과 정보 네트워크 구축 등의 문제도 IB 경쟁력 강화에 필수다. 발행어음 업무는 단지 시작일 뿐 결국 관건은 ‘수익률 높은 투자처 발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초대형 IB의 성공을 위해 각 사별 ‘IB 전략의 차별화’가 강조되는 이유다.



권대정 한국신용평가 금융2실 실장은 “초대형 IB가 단순히 덩치만 키운다면 현재 사업 모델에서 발행어음 영업만 덧붙인 소형 상업은행(CB) 형태에 그칠 수도 있다”며 “사업 포트폴리오의 질적 개선과 위험관리 능력 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국회에 계류 중인 초대형 IB 기업 신용공여 한도 확대안의 올해 정기 국회 통과가 불확실하다는 것도 또 다른 걸림돌이다. 초대형 IB 성공을 위한 시스템과 운용 전략을 구축해야 할 시기에 인가와 규제 문제 등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 신용공여 한도는 쉽게 말해 한 기업이 빌릴 수 있는 포괄적인 빚에 한도를 정하는 것이다. 증권업계에서는 그동안 초대형 IB를 통한 모험자본의 활성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 신용공여 한도가 반드시 확대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당초 정무위원회는 초대형 IB의 기업 신용공여 한도를 자기자본의 100%에서 200%로 늘리는 대신 대상을 중소기업으로 한정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올해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법적 불확실성이 제기되며 논의가 길어지고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초대형 IB의 지정 자체가 성공적인 초대형 IB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면서 “독자적인 사업 기반을 갖추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증권사의 노력과 관련 규제·제도 정비 등 정부의 지원이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첫발을 떼게 된 초대형 투자은행(IB)은 사실 증권업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초대형 IB 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최근 1~2년 새 논의가 본격화됐지만 그 시작은 2000년대 초반 ‘자본시장통합법’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자본시장통합법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무렵이다. 당시 정부는 한국판 골드만삭스 등과 같은 대형 IB 설립을 유도하겠다는 정책 의도로 통합금융법 구상 계획을 발표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겪으며 론스타·골드만삭스와 같은 해외의 IB들이 한국 시장에 들어와 손쉽게 이익을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깨달은 영향이 컸다.



당시 통합금융법 구상 계획은 1986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단행한 ‘금융 빅뱅’이 그 모델이었다. 주식 매매 고정 수수료 폐지 등 은행과 증권회사 간 장벽 철폐, 외국 금융회사의 자유로운 시장 참여 등이 골자였다. 2007년 7월 국회는 은행법·자산운용법·신탁업법 등 6개 금융 관련법을 통합한 ‘자본시장과 금융 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통합법)’ 제정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국내 자본시장에 ‘빅뱅’은 쉽게 오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안정성’이 중시되는 분위기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2007년 국회를 통과한 자본시장통합법은 1년 6개월여가 지난 2009년 2월이 돼서야 시행됐고 금융투자업(매매·중개·자산운용·투자자문·투자일임·자산보관관리) 간 겸영을 허용했다.

이후 자본시장통합법은 급변하는 금융시장의 환경에 따라 지속적으로 보완을 거쳐 왔다. 정부는 2011년 자기자본 규모 대형 증권사를 ‘종합금융투자사업자’로 지정하기로 했다. ‘초대형 IB 육성’을 위한 디딤돌이었던 셈이다. 2013년 자기자본 3조원 이상을 갖춘 증권사(당시 삼성증권·현대증권·대우증권·우리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가 ‘종합금융투자사업자’로 지정됐다. 이들에게는 기업 신용공여와 프라임브로커서비스(PBS : 헤지펀드 운용에 필요한 대출, 증권 대여, 자문, 리서치 등 관련 종합 서비스)를 신사업으로 허용했다.

2015년에는 기업금융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 신용공여 한도를 확대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2016년 8월 금융위원회는 자기자본 규모 4조원 이상을 기준으로 ‘초대형 IB 육성을 위한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육성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5개 증권사(미래에셋대우·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삼성증권·KB증권)는 중소 증권사 인수 등을 통해 공격적으로 자기자본을 확충하며 정부가 제시한 기준을 맞췄다.

2017년 7월 금융위에 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결과 이번에 ‘초대형 IB’로 지정됐다. 5개 증권사 외에 신한금융투자와 메리츠종금증권이 자기자본 규모 3조원대를 넘어서며 차기 ‘초대형 IB’ 후보로 물망에 올라 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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