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내 금융 산업 발전에 헌신하겠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 온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1월 22일 말문을 열었다. 이날 늦은 저녁까지 진행된 하나금융지주 회장후보추천위원회(이하 회추위) 회의에서 최범수 한국크레딧뷰로(KBC) 전 사장과 김한조 전 외환은행장을 제치고 차기 회장 최종 후보로 추천된 데 따른 소감이었다. 3연임을 눈앞에 둔 최고경영자(CEO)는 기쁨 대신 ‘무거운 책임감’을 털어놓았다.
김 회장의 3연임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회추위가 가동된 지난해 10월 27일 이후 최종 후보를 추천하기까지 88일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셀프 연임(CEO가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사외이사들이 해당 CEO 선임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 논란으로 금융 당국과 마찰을 빚었고 회추위가 ‘관치금융’이라고 맞서면서 금융 당국과 정면 대응하는 듯한 모양새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외환은행 조기 통합과 사상 최대 실적 등 우수한 경영 성과가 그의 3연임 가도에 파란불을 켰다. 물론 연임 이후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하나금융에 대한 금융 당국의 지배구조 관련 검사와 ‘연임 불가’를 외쳐 온 노동조합과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1981년 말단 행원에서 출발해 은행장과 회장에까지 오른 ‘하나금융맨’ 김 회장의 지난 37년 그리고 앞으로의 3년을 조명했다.
‘37년.’ 올해로 예순다섯을 맞은 김 회장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금융업에서 보냈다. 1981년 서울은행에서 행원 생활을 시작해 1992년 하나은행의 창립 멤버로 합류한 뒤 현재 자산 450조원대 금융지주를 이끄는 수장으로 세 번째 임기를 앞두고 있다.
지금은 최고위직에 올랐지만 김 회장의 시작은 처음부터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행원이 된 그는 초년병 시절 남들보다 손가락이 굵어 주판알 사용이 서툴렀다. 주판알을 튀기다 오류를 내기도 여러 번, 당시 동료 직원들의 도움은 지금도 그에게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주산이 서툴렀던 늦깎이 행원
하나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1992년부터는 ‘하나은행맨’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송파지점장과 중소기업부장, 가계영업점총괄본부장, 가계고객사업본부 부행장을 거치며 가계영업 부문에서 능력을 보였다.
지주사가 출범한 2005년 12월부터 하나금융지주 부사장, 2006년 11월부터 하나대투증권 사장을 역임했고 2008년 3월 하나은행장에 선임되며 승승장구했다.
하나은행은 한국투자금융이라는 단자회사를 모태로 성장한 은행이다. 그래서 안팎에서는 하나은행에서 승진하려면 한국투자금융의 창업 공신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나돌던 때였다.
하지만 그를 밀어올린 80%는 영업 현장이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영업의 달인’이란 별명이 보여주듯 하나은행 창립 초기 영업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마케팅 팀장’, ‘학습 조직’, ‘지점별 주특기’, ‘토요일 미팅’, ‘야간 산행’ 등 직원들의 영업력을 끌어내기 위해 한 시도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김 회장은 실적을 내라고 닦달하는 대신 즐겁게 일할 것을 주문했다. 실제 그가 담당한 지점은 대부분 영업 실적이 상위권으로 상승했다.
그의 영업 능력은 하나대투증권 사장 시절 두각을 나타냈다. 하나대투증권은 김 회장이 취임한 지 1년 만에 당기순이익이 전년도 대비 472% 증가한 2255억원을 달성했다. 당시 증권업계에서는 김 회장이 회사의 제2 도약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2008년 3월 제4대 하나은행장이 됐다. 취임 후 그는 격의 없는 의사소통을 위해 행장실 문패를 바꿔 달았다. ‘조이 투게더 룸(Joy Together Room).’ ‘누구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오라’는 뜻으로, 본인의 이름 영문 이니셜 ‘JT’를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풀이했다.
문턱을 낮췄지만 성과는 최고였다. 행장 재임 시절인 2011년 1조2118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역대 최대 실적 기록을 남겼다. 은행·증권·방카슈랑스 등의 분야를 두루 경험한 것은 그의 자양분이 됐다.
소탈한 성격도 화제였다. 하나대투증권 사장 시절에는 사내 장기 자랑 행사에서 운동복을 입고 당시 유명 개그맨을 따라한 ‘마빡이 춤’을 췄고 하나은행장 재임 시절에는 출근길 반짝이 옷을 입고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회장에 올랐을 때도 김 회장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선보이며 격의 없는 소통을 시도했다.
지금의 직함을 처음 단 것은 2012년이다. 당시 김 회장은 증권과 은행 등 각 계열사에서 보여준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아 2012년 3월 김승유 전 회장의 후임으로 하나금융지주의 2대 회장에 올랐다.
그리고 6년의 재임 기간 동안 하나·외환은행 조기 통합과 사상 최대 실적 등 우수한 경영 성과를 기록했다. 그의 3연임 가도를 뒷받침한 것 역시 우수한 경영 실적이었다.
◆조기 통합, 사상 최대 이익 ‘성과’
윤종남 하나금융지주 회추위 위원장은 “김 회장은 급변하는 금융시장 변화에 대비하고 미래 성장 기반을 확보해 그룹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적임자로 판단, 회추위 위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며 “향후 3년간 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하나금융그룹의 위상을 더욱 높여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6년 업적 중 가장 첫째로 손꼽히는 것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통합이다. 그는 양 사를 통합해 국내 1위(은행 자산 규모 기준)의 KEB하나은행을 출범시켰다. 김 회장은 2014년 7월 처음으로 조기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1년 만에 ‘노조의 동의’를 얻어 조기 통합을 성사시켰다.
과거 서울은행 출신으로 합병 경험이 많은 김 회장인 만큼 외환은행 직원들의 심정을 다독이며 지지부진하던 통합 논의의 물꼬를 텄다. 당시 김 회장은 “노사 합의를 할 마지막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나를 믿지 않으면 통합하지 않아도 좋다”며 외환은행 노조를 강하게 설득해 극적인 동의를 이끌어 낸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 은행명 상호에는 외환은행의 영문명인 ‘KEB’를 포함시키고 고용 안정성과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노조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면서 한 지붕 두 가족의 결합을 이끄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업의 달인’이란 별명에 걸맞게 경영 성과도 우수했다. 김 회장은 역대 최대 실적과 주가 상승세를 선두에서 이끈 수장이었다.
하나금융지주는 2017년 1~3분기 누적 당기순이익 (지배 주주 순이익) 1조5410억원을 기록하며 최근 5년간 사상 최대 순이익을 달성했다. 전년 동기 대비 24.3% 늘어난 수치다. 이 기세대로라면 순이익 ‘2조 클럽’ 진입도 노려봄직하다.
금융 정보 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하나금융지주는 2017년 1조9612억원(증권사 추정치 평균)에 달하는 순이익을 올려 창사 후 처음으로 ‘순이익 2조 클럽’목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어 올해는 그보다 7.23% 증가한 2조1798억원의 순이익을 거둘 것으로 추정된다.
김태현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하나금융지주의 4분기 순이익은 4631억원으로 시장 컨센서스를 웃돌 전망”이라며 “은행 간 조직 통합에 따른 판관비 절감과 높아진 자본 여력이 중기적으로 비은행 부문 이익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주가 역시 고공 행진을 거듭하며 2005년 지주 설립 후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다. 2016년 초 2만원에서 5만원대로 뛰며 지난해 하나금융 주가 상승률(연간 주가 변이)은 59.36%로 타 금융지주를 크게 앞섰다. 같은 기간 KB금융지주는 48.13%, 신한금융지주는 9.17% 올랐다.
◆금감원 검사·노조 갈등 등 과제 산적
우수한 실적을 기반으로 사실상 3연임을 확정한 김 회장이지만 그의 앞에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가장 먼저 금융 당국과의 관계 회복이다. 문제가 된 ‘셀프 연임’ 논란은 하나금융 회추위가 현 회장인 김 회장을 제외하고 사외이사 중심으로 회추위를 구성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하나금융지주에 대한 금융감독원 검사는 또 다른 문제다.
앞서 최흥식 금감원장은 1월 18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하나금융 회장 후보가 결정되면 적격성 검사를 진행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적격성 심사는 은행법에 따라 김 회장이 은행지주회사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법적 요건을 따지는 것이다.
또한 금감원은 미뤄뒀던 박근혜 정부 ‘창조경제 1호’ 기업인 아이카이스트에 대한 KEB하나은행의 부당 대출 의혹과 은행권의 채용 비리 의혹에 대한 검사도 본격화할 예정이다.
앞서 금감원은 1월 중순 하나금융지주 측에 관련 의혹들을 검사하겠다며 차기 회장 선임 일정을 보류할 것을 요청했지만 회추위가 예정대로 일정을 강행하면서 금감원과 마찰을 빚은 바 있다.
금융권에서는 향후 진행될 금감원의 검사·심사가 김 회장의 3연임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 회장도 이를 의식한 듯 최종 후보로 선출된 직후 “금융 당국의 금융 혁신 추진 방안과 지배구조 관련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며 자세를 낮췄다.
노조와의 갈등도 그가 풀어야 할 숙제다. 허권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최종 후보가 결정된 다음 날 성명서를 냈다.
그는 “어떤 기업의 CEO라도 수익성에 기반 한 성과가 유일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다”며 “박근혜 정권과 유착한 수많은 불법행위 의혹으로 지탄받아 온 김 회장을 최종 후보로 확정한 회추위의 결정을 강력 규탄한다”고 밝혔다.
장기 과제는 역시 수익성이다. ‘순이익 2조 클럽’ 가입이 예상되는 등 고무적인 성과를 냈지만 아직까지는 신한·KB금융의 성과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신한지주는 2017년 3조2590억원, KB금융은 3조3220억원에 달하는 순이익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증권·보험·신용카드 등 비은행 부문 비율이 금융지주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보고 있다. 김 회장 역시 향후 비은행 부문의 경쟁력 강화에 주력할 계획이다. 그는 올 초 신년사에서 “자산운용·신탁·투자은행(IB)·글로벌·미래금융 그리고 비은행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사회 의결과 3월 주주총회를 거쳐 셋째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확정 시 그의 임기는 2021년 3월까지다.
◆약력
1952년 2월 부산 출생.
1971년 경남고 졸업.
1980년 성균관대 행정학과 졸업. 1981년 서울은행 입행.
1986년 신한은행.
1992년 하나은행 창립 멤버.
2002년 하나은행 영남사업본부 부행장. 2005년 하나금융지주 부사장.
2008년 하나은행장.
2012년 하나금융그룹 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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